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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하략)

<박봉우님의 시  - 휴전선>

 

 
소풍을 가는 아이들마냥 들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약속시간이 이른 줄 알면서도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임진강역에 도착하니 아직도 약속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남았다. 가을의 새벽은 제법 쌀쌀했다.
 
임진강역에는 동그란 시비가 서 있었다.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이라는 시가 신영복 교수의 정갈한 글씨체로 새겨져 있었다.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그 구절이 분단의 세월, 이제 그냥 이렇게 분단에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질타하는 것만 같았다. 추수를 마친 임진강역 주변의 논길에는 허수아비들이 쓸쓸한 들판을 지키고 있고, 나지막한 언덕에는 감국이 진한 향기를 품고 피어 있다. 철새들이 질서정연하게 하늘을 난다. 저 하늘, 저 새는 저리도 자유로이 오가는데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철조망이 아닌 듯하여 마음이 무겁다.
 
 
새벽바람에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임진강역에 들어갔다. 역 안 게시판에는 작은 메모지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이 곳을 찾은 이들이 통일의 열망을 담은 쪽지들인가 싶어 하나 둘 유심히 본다. 분단의 아픔을 담은 글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사랑타령을 담은 글들이다. 조금은 씁쓸하다. 사랑타령은 이리도 넘쳐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찌 이리도 사랑이 메말랐는지. 이런 곳에서는 조금 가식적이라도 통일을 열망하는 글들이 담겨져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이정표를 보는 마음이 착찹하다. 막힘 없이 철로를 따라 달리고 달려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 유럽까지 자유로이 오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있기를 기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헉헉거리며 제 한 몸 살기도 버거운데 민족이니 통일이니 그 큰 꿈들을 꾸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경쟁사회가 가져다준 병이다.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믿고 살아가게 만드는 현실이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이다. 물론 꿈만 먹고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남북한출입국사무소의 모든 절차들을 마치고 봉정역에 도착을 했다. 이런 저런 절차가 없다면 임진강에서 20여분도 안 걸릴 그 곳에 서니 분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난다.
 
봉정리를 한참 바라보았다. 마치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에 온 느낌이다. 오리떼를 몰고 언덕 위로 올라가는 촌로의 몸짓에서 고향을 느낀다. 따사로운 햇살에 뭐라뭐라 떠들며 노는 꼬마들의 웃음소리를 통해서 유년을 본다.
 
 
봉정역에서 수해복구물자로 지원된 시멘트하역작업을 마친 후 개성시내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은 후 선죽교를 찾았다. 국사책을 통해서 충신으로 각인된 정몽주, 그 충신을 비웃는 듯한 이방원의 시조를 떠올렸다. 부패한 정권이라도, 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정권이라도 끝내 의리를 지키는 것이 충신일까 생각이 들다가도 군부독재를 겪은 세대다 보니 위화도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 대한 생각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
 
 
선죽교 근처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이 향나무의 모양새처럼 정몽주의 변함없는 일편단심도 높았을 것 같다. 배신이 판을 치는 이 시대다보니 이런들 저런들 하는 이들보다는 정몽주 같은 이가 그리워진다.
 
 
개성공단을 둘러보고 다시 비무장지대를 지나 남한땅으로 들어왔다. 그 땅이 그 땅이고, 그 하늘이 그 하늘인데 자유로이 오가지 못한다는 것이 서글퍼진다. 아직도 개성에서 먹은 점심으로 인한 포만감이 남아 있는데 언제 다시 그 곳을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도 슬픈 일이다.
 
박봉우 시인의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하는 그 구절이 절규가 되어 마음 속을 헤집는다.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요런 자세로 꽃이 될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
 
 
봉정리에서 만난 가을꽃들을 떠올렸다. 작은 실개천만 지나면 담을 수 있었던 구절초,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는 지금껏 들었던 그 어느 호루라기 소리보다도 섬뜩했다. '아, 이것이 분단이구나!' 순간에 느낄 정도로 섬뜩했다.
 
남한에서 만났던 꽃과 다르지 않은 구절초며 코스모스며 가을꽃들이 꼭 그런 자세로 꽃이 되어 피어 있다. 사람도 그렇게 꽃처럼 피어났는지 오고감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프다. 그러나 언젠가는 남과 북이 어루러져 대동의 춤을 추는 그런 날이 오겠지 꿈을 꾸며 해지는 임진강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새들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한다. 한나절도 안 걸려 오갈 수 있는 그 곳, 그 곳을 가기까지 내겐 4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18일 남북나눔운동본부와 함께 북한수해물자2차지원 행사로 시멘트 500톤을 전달하면서 개성에 다녀오면서 느낌을 적은 것입니다.


태그:#개성, #봉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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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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