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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의 봄 소년 이원수가 이 마을에 살 때 마을 사람들이 "꽃대궐"이라 부르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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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는 '고향의 봄'이라고 한다. 서정적인 가사를 음미하며 콧노래라도 부르노라면 국민 누구나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정서가 가장 잘 배어있는 아름다운 노래이기 때문이리라.

1970년대, 밤 10시만 되면 라디오에서는 청소년을 선도하는 '사랑의 종'이 울렸는데 그때  실로폰에 실려 나오던 선율 역시 '고향의 봄'이었다. "청소년 여러분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음성과 함께 울려나오던 '고향의 봄' 멜로디가 듣기 좋아 밤 10시만 되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봇짐을 싸들고 대도시 공장으로 향했던 당시의 근로청소년들이 고향땅을 바라보며 불렀던 노래가 '고향의 봄'이었고, 외국으로 돈벌러 나갔던 해외근로자들이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서 향수를 달래며 부르던 노래 또한 '고향의 봄'이었다고 한다.

소년 이원수가 소답동에 살 때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을 '꽃대궐' 또는 '소답꽃집'으로 불렀다.
▲ 꽃대궐 돌담과 고목 소년 이원수가 소답동에 살 때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을 '꽃대궐' 또는 '소답꽃집'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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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는 고가옥과 고목.
▲ 꽃대궐과 정자나무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주는 고가옥과 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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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고향의 봄'을 부르던 광부에 얽힌 추억

1975년 3월, 나는 강원도 장성탄광에 잠시 머문 적이 있다. 춘 3월임에도 주변 산간에는 눈이 녹지 않은 채 쌓여있을 정도로 추웠고, 눈녹은 개울물이 검정색으로 채색되어 흘러내리던 곳이었다.

하루 3교대로 지하 수백m 갱도로 작업하러 들어가던 광부들의 창백한 얼굴 모습,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던 개짖는 소리, 그리고 간간이 들리던 광부들의 술주정과 싸움소리가 아직도 희미한 기억의 저편에서 되살아나 나의 눈시울을 적신다.

오지 탄광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젊은 나에게는 매우 고달프면서도 단조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일을 마치고 난후 곧장 숙소로 돌아와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기가 막히도록 지루한 일과가 반복되는 가운데 하루는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술 취한 광부의 노래 소리에 잠을 깼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리저리 담벼락에 몸을 부딪쳐가며 끊어질 듯 이어지던 광부의 노래 소리는, 나중에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술주정으로 변했고 끝내는 '고향의 봄' 노래 가락과 뒤섞여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낯설은 산간벽지에서 고단한 탄광생활을 하긴 해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건 하나의 희망이자 꿈이었을진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나머지 흘리는 눈물이었으리라.

나 역시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객지를 전전하면서 고향이 그리울 때면 남쪽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의 봄'을 자주 부르곤 했다. 때로 나의 고향이 '고향의 봄'에 나오는 정겨운 산골 꽃동네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했으니, 그 아릿한 추억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당시는 요즘처럼 휴대전화나 인터넷 등 마땅한 통신수단마저 없던 시절이었으니 편지 한 장 띄워놓고 고향소식 전해줄 답장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부르던 고향노래는 구구절절 나의 심장을 파고드는 망향가였던 것이다.

적어도 그 당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객지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화두였고, 고향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이렇게 '고향의 봄'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민족의 정서와 어우러지면서 날이 갈수록 국민들이 부르기 좋아하고 듣기 좋아하는, 호소력 있는 민족의 대표곡이 되었으리라.

이원수9길 좌측으로 한옥이 보이고 오르막 끝자락에는 야산이 보인다
▲ 이원수9길 이원수9길 좌측으로 한옥이 보이고 오르막 끝자락에는 야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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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대궐 전경.
▲ 꽃대궐 꽃대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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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만에 찾은 이원수의 고향

'고향의 봄'의 배경이 된 동네는 경남 창원시 소답동 일대이다. 이원수는 창원 동정동에 살 때 소답리에 있는 서원을 다니며 초라한 창원 성문밖 개울이며 서당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보리 등을 보며 자랐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을 '소답꽃집' 또는 '꽃대궐'로 불렀으며, 산골마을 곳곳에는 진달래와 철쭉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이 아름다운 산골동네에서 살던 이원수는 7살에 도회지로 이사를 갔다. 세월이 흘러 15살이 되던 해에 이원수는 어릴 적 창원의 산골마을에서 뛰어놀던 즐거웠던 때를 떠올리며 '고향의 봄' 시를 지어 <어린이> 잡지에 원고를 보냈는데, 1926년 잡지에 이 시가 소개되면서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린이 이원수'가 오래전에 떠났던 창원 동정동과 소답동 마을을, 나는 '나그네 이원수'의 입장이 되어 90년 만에 찾아가보았다.

소답시장에서 하차하여 소답동 마을로 들어서니 현대식 주택들이 즐비하다.

어린시절, 창원읍성의 동문을 지나면서 보았던 수양버들이 넘실대던 개울은 지금 모두가 복개되어 그 위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변해있고, 푸른 보리가 그 싱싱함을 뽐내었던 남쪽 들판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복숭아꽃·살구꽃·아기진달래가 자랐던 아름답던 산골은 온통 현대식 건물과 차들로 뒤덮여 있고, 각종 새소리와 시냇물소리가 들렸던 냇가 마을에는 도시의 소음과 자동차의 경적만이 요란하다.

약간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어가다가 콘크리트 숲 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두 채의 한옥을 발견하니 가슴이 뭉클할 따름이다. 이곳이 바로 오랜 옛날에 새터마을 꽃대궐(근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의 생가)로 불리던 곳이다.

온갖 꽃이 만발했던 꽃대궐의 마당을 돌담너머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고가옥(古家屋)의 안마당을 울긋불긋 물들이던 꽃들은 비록 보이지 않고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잡초만이 듬성듬성 보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토록이나마 버티어준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온다.

'울긋불긋 꽃대궐'이 여기였구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조각가 김종영의 생가이다
▲ 꽃대궐 마당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조각가 김종영의 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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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미루는 길 건너편에 있는 꽃대궐의 부속 건물이었으나 30여 년 전에 개발바람을 타고 마당 가운데로 도로가 나면서 도로 양옆으로 나뉘어져 지금은 별개의 가옥처럼 보인다.
▲ 사미루 전경 원래 사미루는 길 건너편에 있는 꽃대궐의 부속 건물이었으나 30여 년 전에 개발바람을 타고 마당 가운데로 도로가 나면서 도로 양옆으로 나뉘어져 지금은 별개의 가옥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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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대궐 또한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30여 년 전에 서너 동강으로 찢겨지는 파란을 겪었으니 가옥의 가운데 마당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된지 이미 오래고, 한 때 천 평이 넘던 꽃대궐은 이제는 그 규모가 축소된 채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꽃대궐 앞에는 몇 아름이나 되는 정자나무가 '잃어버린 고향의 봄'에 대한 아픔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먼 길을 찾아온 나그네의 쉼터역할을 하며 백년이 넘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원수1길에서부터 이원수9길에 이르기까지 전봇대에 걸려있는 '이원수길 팻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향의 봄' 동네에 대한 내력을 알려 줄 변변한 안내판 하나 없고,'고향의 봄'을 기리는 시비(詩碑) 하나 찾을 수 없다.

소년시절 뛰어놀던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의 모습을 찾아보려 애써보지만 냇물은 이미 30년 전에 복개가 되어 볕이 안 드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아래서 소리죽여 흐를 뿐이다.

냇가에 수양버들이 춤추던 동네의 흔적이나마 찾아보고자 나그네는 오르막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윗동네와 야산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원수4길에 이르자 현대식 빌라단지가 보이고 그 맞은편으로는 복개가 안 된 도랑물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산에서 내려오는 이 계곡물이 저 아랫마을을 흘러내려 시냇물을 이루고, 파란들 남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냇가의 수양버들을 간질여 춤추게 하던 아스라한 광경에 젖어보기도 하고, 잠시 눈을 감고 어릴 적 회상에 잠겨보기도 한다.

징검다리가 놓인 냇가에서 바지를 걷어 올린 채 철벅거리며 놀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철쭉과 아기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산골짝에서 동무들과 정신없이 놀다가 해질녘에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나와서 달구경하며 놀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릴 때 버들피리 만들어 불던 정겨웠던 동무들의 모습과 함께 사라져버린 '고향의 봄'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나그네가 눈물겹도록 그리워하며 찾아온, 꿈꾸던 고향은 아니로구나.

돌담 안으로 바라본 소답꽃집 마당
▲ 꽃대궐 마당 돌담 안으로 바라본 소답꽃집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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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던 동네의 복개 안 된 개울물
▲ 산골의 개울물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던 동네의 복개 안 된 개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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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로 싸바른 대지, 흔적없는 '고향'

수십년간의 도회지 생활에 지친 셰익스피어에게는 심신을 달래줄 돌아갈 고향 에이번과 아늑하게 보존된 옛집과 마을이 그대로 있었지만, 우리의 고향은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상한 영혼을 어루만져줄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겠는가.

서양에서 200년이나 걸린 산업화기간을 30년의 세월로 압축하면서 성급한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서구화를 향한 조급증에 출세지향적인 사회분위기가 겹치면서 어쩌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각박한 삶을 살아오는 동안 우리의 고향땅은 이렇게 콘크리트 벽과 아스팔트에 갇힌 채 질곡의 세월을 보내며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온갖 생물이 살아 숨쉬던 개울을 시멘트로 덮어 생명체가 호흡할 수 없는 하수구로 만들어 버리고, 철따라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던 대지를 아스팔트로 싸 바른 대가(代價)로 우리는 물질의 풍요는 얻었을지 모르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의 봄'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잘 보존된 프라하 옛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이 연1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존하는 오래된 한옥을 중심으로 '고향의 봄 거리'라도 조성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마련한다면, 많은 방문객들이 지금처럼 허전한 마음으로 그냥 돌아가진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이원수 4길 좌측으로는 빌라단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흐른다
▲ 이원수4길 이원수 4길 좌측으로는 빌라단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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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 동네에서는 오래된 가옥들을 드문드문 볼 수있다
▲ 향교 '고향의 봄' 동네에서는 오래된 가옥들을 드문드문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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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0월 12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고향의 봄, #이원수, #꽃대궐, #김종영 생가, #냇가의 수양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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