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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지인들이 보낸 청첩장이 쌓이는 계절이다. 자녀의 혼인을 자랑하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나 가끔은 받는 이를 난처하게 한다.

 

결혼식이 대부분 주말 점심시간이어서 청첩장을 받는 이들 중에 하루 일정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고, 혼인 날짜가 중복됐는데 식장의 거리가 멀어 종일 허둥대다가 결국 짜증으로 하루를 끝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주말이라는 시간도 문제지만 그보다 난감한 것은 아무래도 보낸 사람이 모호할 때일 것이다. 10여 년 전 아들의 고등학교 담임이 보낸 청첩장, 아주 오래 전 같은 학교에서 잠시 근무해 얼굴도 아득한 분이 보낸 청첩장, 공식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으나 특별한 교분이 없는 분들이 보낸 청첩장을 받을 때는 난감한 정도를 넘어 황당하기까지 하다. 

'첫출발에 축복과 격려'를 부탁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고, 그렇다고 시간을 내어 찾아보기도 내키지 않아 갈등하다보면 마지못해 예식장에 가더라도 이미 축복의 의미가 퇴색한 축의금이나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
 

혼인은 일생에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남녀가 합법적으로 혼인해 가족을 꾸리고 그 안에서 사회 성원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혼인은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초 제도요, 축복받아야 할 축전이다.
 

그러나 요즘 혼인 풍습을 보면 비정상적인 상업주의가 가세하여 허례허식의 정도가 심하다. 혼인하는 당사자는 물론 청첩을 보낸 혼주와 대면할 시간 없이 대충 눈도장이나 찍고 나오는 결혼식도 문제지만 그런 풍토에 편승해 자기를 과시하는 계기로 삼는 부류도 있기 때문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자신이 쫓아다니며 바친 축의금이라도 회수하겠다는 생각에 청첩장을 남발하는 경우도 볼썽사납지만, 지위와 명예를 이용해 정작 자녀의 혼인은 서울에서 하는데 '그곳까지 못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굳이 날짜를 잡아 청첩장을 돌리는 부모들을 보면 그 저의가 고와보일 것인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야 축복받는 혼인은 아닐 것이다. 축의금이 많아야 축복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간에 쫓기고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찾아준다면 진정 축복받은 혼인일 수 없을 것이다.

 

'안 오면 말고' 식으로 보낸 청첩장보다 틈을 내어 정감어린 육성으로 직접 초대하는 혼인을 보고 싶다. 기꺼이 초대에 응해준 가까운 친구와 친지들만 모인 조촐할 혼인식, 주말이 아니더라도 평일 오후 다른 일을 마친 하객들이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 음식을 나누며 덕담이 오가는 혼인잔치를 보고 싶다.
 

약 30년 전, 아내와 나는 화요일에 결혼했다. 그때 양가 부모님들은 주말 혼인을 고집했지만 아내와 내가 남의 주말 시간을 빼앗아 부담을 주는 혼인은 하지 않겠다며 설득한 결과였다. 가까운 친구들과 친지들만 모인 예식장은 빈자리가 많았지만 나는 지금도 당시의 우리의 결정에 자부심을 갖는다.
 

아내와 나는 앞으로 두 아들의 혼인은 누가 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잔치가 되지는 않도록 하자고 다짐한다. 예식에는 참석도 않고 모든 예식장이 제공하는 비슷한 맛도 모를 음식을 대충 먹고 떠나는 하객들, 신랑 신부는 예식장에서 제공하는 순서에 따라 식이 끝나기 바쁘게 신혼여행을 떠나는 혼인식이어서는 안 된다.

 

혼인식 내내 가까운 지인들의 진솔한 축복을 받으며 새 출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축복의 자리는 없다고 믿는다. 덧붙여 우리가 준비한 정갈한 몇 가지 음식을 친지들과 나눌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덧붙이는 글 | 의례적인 청첩장을 받고 현재의 혼인 풍습이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태그:#혼인, #청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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