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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산에 들어와
억새밭에는 채 오르기 전인데
하늘을 온통 퍼렇게 멍들인
억새의 슬픔을 본다.
바람 탓도 계절 탓도 아닌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슬픈 것이다.
산 아래서부터 사람들은
슬픔을 등에 지고
턱턱 숨이 막힌다.
가파른 오르막 중간 중간
풍경을 의지 삼아 쉬어보지만
당장의 목표는 정상이 아니라 백 보의 걸음이다.
드디어 정상
너나없이 힘겹게 지고 온 슬픔을 내려놓는다.
아, 슬픔은 이토록 아름답고 가벼운 흰빛이었구나.
사람들은 슬픔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씩 찍고는
내려놓았던 슬픔을 다시 등에 짊어지고 산을 내려간다.
 
-정암사 시화전에 출품된 이현숙의 시 .억새. 모두-
 


10월 12일 우리나라 3대 억새 명산 중의 하나라는 충남 홍성에 있는 오서산 등산길에서 만난 정암사 입구는 마침 시화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히 가파른 산비탈 비좁은 터에 자리 잡은 정암사는 입구에 2층 건물인 범종각이 서 있었다. 1층은 절에 드나드는 통로이고, 위층엔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었다.
 
오서산 억새풀 시화전 열린 정암사입구
 
이 범종각에서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 좌우에는 시화전에 출품된 작품들이 걸려 있어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빨래처럼 펄럭인다. 한국문인협회 홍성군지부에서 주관한 ‘오서산 억새풀시화전’으로 10월6일부터 13일까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 지역 시인들의 작품인지 억새와 가을풍경을 담은 시들이 가슴 속에 정겹게 와 닿는다. 걸려있는 작품들을 둘러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절집이래야 조금 위에 따로 서있는 작은 산신각을 제외하면 대웅전인 극락전까지 3동의 건물들이 ㄷ자 형으로 아담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가을 산사의 고즈넉함 속에 포근히 묻혀있었다.
 
“아니 그런데 오늘은 웬 시골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라오는 거야?”
 
산 밑 주차장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을이라고 해도 평일이어서 등산객들이 별로 많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요즘은 시골 사람들도 등산을 좋아한다
 
그런데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지역 사람들처럼 보인다. 옷차림이나 말씨가 그랬다. 대도시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는 대부분 등산복과 등산화차림이다. 그런데 이날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청바지나 낡은 신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고, 여성들도 바지는 역시 청바지나 일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일행 한 사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30여명의 단체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연령층도 다양해서 70대 노인들에서부터 30~40대들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저희들은 서산에서 왔구먼유, 그런데 댁들은 어느 산악회에서 오셨남유?”
 
내 얼굴피부가 거무스레한 모습이어서 같은 시골사람으로 보여 그런지, 그들의 표정이 격의 없이 친근해 보인다. 일행이 우리들은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서울이나 서산이나 오서산에 오려면 1시간 밖에 시간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좋아진 교통 환경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난주에는 원주 치악산에 갔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도중에서 내려오고 말았구먼유.”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었다. 매주 등산을 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아직 젊은 층이어서 그런지 복장들이 깔끔하다. 그냥 일상복을 입고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60~70대 노인들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잠깐 들에 나갔다 오느라고 바빠서 등산신발도 못 찾아 신고 이렇게 왔구먼유."

60대로 보이는 노인은 낡은 구두를 신은 채 산에 오르고 있었다.
 
"농사짓는 노인들이야 어디 등산 할 여유가 있남유? 우리들은 그래도 읍내에 사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등산을 하지유, 요즘은 시골사람들도 등산 많이 다니는 편이구먼유."

시골 노인들은 관광을 즐기는 편이지만 등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뜻밖이라고 일행들끼리 나누는 말을 들었는지, 옆에서 걷던 노인이 하는 말이었다.
 
산은 흙산이어서 느낌이 좋았지만 경사가 심해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전날 배탈설사로 고생했다는 일행은 힘이 부치는지 헉헉거리며 정말 힘들어 한다. 앞서 걷는 일행들에게 속도를 줄이도록 당부하며 천천히 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첫 번째 안부에 도착했다. 뒤돌아보니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광천읍내와 주변의 경치가 풍요롭게 펼쳐져 있다. 특히 읍내 주변의 벼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저래 보여도 올 수확은 별로 기대를 안 하는구먼요."

우리들이 누런 벼논을 바라보며 탄성을 지르자 먼저 올라와 있던 40대 등산객이 하는 말이었다. 그도 벼농사를 짓는 농부라고 했다. 그런데 금년 가을은 비가 너무 자주 많이 내려서 결실이 시원찮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저렇게 보기 좋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면 결실이 형편 없구먼유.”
 
지난 9월의 장마처럼 내린 많은 비와 태풍 때문에 피해를 입은 농민 한 사람이 남몰래 멍든 속내를 털어 놓고 있었다. 우리 같은 도시 사람들이 그들의 아픈 마음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와서 쉬고 있던 그들이 일어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그들을 따랐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일행들 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우리들은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능선에 올라서자 전망은 더욱 좋아졌다.
 
한쪽으로는 낮은 산들과 작은 골짜기 안의 논밭을 건너 멀리 서해가 바라보인다. 산 아래쪽 골짜기에 있는 저수지의 물빛도 하늘을 닮아 파란 모습이었다. 능선길은 경사가 심하지 않아 걷기가 한결 수월한 편이었다.



산자락에 흐드러진 억새꽃
 
“우와! 저 억새꽃들 좀 봐. 대단한데.”

정상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곳에서 바라보았을 때와는 달리, 가까이 접근해 바라본 정상부근 산자락을 뒤덮은 억새군락지는 마침 불어오는 산바람에 하얀 꽃밭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정말 대단했다.
 
“명성산 억새보다 조금 못한 것 같지 않아?”

지난해 가을 명성산에 함께 다녀온 일행 한 사람이 그쪽과 비교가 되는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이쪽이 더 좋지 않아?.”

천관산, 명성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억새명소 중의 한곳으로 꼽히는 오서산이었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최고의 명소로 이름이 나있어서 인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을 정취를 찾아 몰려오는 곳이다.
 
정상 부근에 서 있는 오서정과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웃고 떠드는 모습도 보인다. 우리들도 오서정으로 올라섰다. 전망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해발 791미터로 충남 북부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라는 이 오서산은 산줄기도 단순한데다 주변에 높은 산이 없고, 홀로 우뚝 솟아 있어서 휘휘 둘러보아도 시야가 막힘이 없었다.
 
우리들도 준비해간 과일로 간식을 들고 정상표지석이 서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상은 가까웠다. 정상에서 바라본 오서정은 일렁이는 억새꽃밭에 감싸여 있었다.

“정상에 섰으니 우리들도 기념사진 한 번 찍어야지.”
 
이현숙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들도 사진 한 장을 찍고 돌아섰다.
 
“까막까치는 안보이고 으악새만 천질세 그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닌가. 특히 ‘으악새’를 발음 할 때는 노래를 하듯이 곡조를 붙여 더욱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서산이라는 산 이름이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살고 있는 산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거짓말처럼 까마귀와 까치는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 살펴보니 올라올 때 만났던 40대의 그 농민이다. 태풍과 잦은 비 때문에 결실이 시원찮다고 은연중에 아픈 속내를 내비쳤던 그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 전의 약간은 서글퍼 보이던 표정은 찾을 수가 없었다.
 
툭 트인 산정에 올라 지천으로 흐드러진 억새꽃을 바라보며 모든 시름을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정말 으악새 천지네요. 그 으악새 노래 한 곡 어때요?”
 
그의 표정이 밝아진 것이 반가워 내가 그의 숨겨져 있는 것 같은 정서를 충동질해 보았다.
 
"에이! 아저씨도 참,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이히히 안 되겠다."
 
그가 노래 한 소절을 부르다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짐짓 저만큼 달아난다. 나도 그의 밝아진 표정만으로도 마음이 홀가분해져 그에게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쓰레기 줍다가 생긴 재미있는 이야기들
 
일행들은 저만큼 앞서 내려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에서는 항상 쓰레기를 줍는 일행 한명은 여느 때처럼 쓰레기를 주워 담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부근과 오서정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가 많아 어느새 비닐주머니가 제법 불룩해져 있었다.
 
평탄한 내리막길이어서 일행들의 걷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나 쓰레기를 줍는 일행은 버려진 쓰레기가 많아 그것을 줍느라 자꾸만 뒤처지고 있었다.
 
“아저씨 참 좋은 일 하시네, 자, 이 떡 한 개 잡숴보세요.”

길가에 둘러 앉아 떡을 나눠먹고 있던 50대 아주머니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쓰레기를 줍고 있던 일행의 입속에 노란 콩고물이 묻은 인절미 한 개를 쏘옥 넣어주는 것이 아닌가.
 
“어허! 오늘은 쓰레기 줍다가 호강 한 번 했네, 그려!”

쑥스러워 하면서도 엉겁결에 떡 한 개를 입에 받아 문 일행은 기분이 몹시 좋은 모양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쓰레기를 줍는 건데. 부럽다 부러워, 하하하“

다른 일행이 부럽다고 거든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오다가 강아지를 데리고 산에 오른 아주머니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도 올라갈 때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아저씨, 어디서 알밤을 그렇게 많이 주우셨어요?”

그 아주머니들은 일행이 들고 내려오는 불룩한 비닐주머니에 알밤이 들어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거요? 알밤이 아니고 쓰레깁니다. 웬 쓰레기들을 이렇게 많이 버려놓고 갔는지, 이 산에는 유난히 쓰레기가 많네요.”

일행이 비닐주머니를 열어 보여준다. 그러자 아주머니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다음 순간 그녀들은 몹시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후다닥 몇 걸음 달아난다.
 
“아이고 미안해라, 우리들도 몇 개 버리고 올라왔는데.”

어이가 없어 머쓱해진 쪽은 오히려 우리들이었다. 그런 말 하지 않았으면 그녀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왔는지 우리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거참, 오늘은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기네.”

저만큼 멀어진 아주머니들을 바라보며 일행들이 빙긋 웃는다. 오서산 억새산행은 다른 산을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재미있었던 날이었다.
 

산 아래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의 농가 창문 밑에는 어느새 수확을 끝내고 씨앗용으로 걸어놓은 수수 모가지 몇 개가 정겨운 모습이다. 그런데 등산길에서 만난 농부의 말처럼 길가의 누렇게 익어가는 논 옆에 쭈그리고 앉아 살펴본 벼이삭은 정말 여느 풍년의 탱글탱글한 모습이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철#정암사#오소산#억새꽃#시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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