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1년 8월, 강정구 동국대 교수가 김포공항에서 '만경대 필화사건'으로 전격 구속됐다. 강 교수가 김일성 주석 생가로 알려진 만경대의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 남긴 일이 화근이었다. 또 한 명의 진보 학자가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묶이는 순간이었다.

 

그 해, 나는 가까운 이가 그 사슬에 묶이는 장면을 보았다. 단과대 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던 선배가 매향리 투쟁 현장에 가던 중 경찰에 검거됐다. 그는 이적단체인 한총련 간부라는 이유로 몇 년째 수배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6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마지막 진술이 생생하게 귀에 들려온다.

 

"국가보안법은 저 독재정권의 장발단속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의 머리카락 길이를 권력이 마음대로 정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역시 이와 같습니다. 누군가가 타인의 사상과 표현을 재단하겠다는 생각은 오만하기 짝이 없고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보안법도 결국 장발단속법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질긴 망령처럼 살아남은 국가보안법

 

그 선배의 말처럼 국가보안법은 곧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북핵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량은 개성공단을  계속해서 오갔고, 금강산을 오르내리는 이들의 발길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2007년 10월 두번째 남북 정상의 만남이 이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만수대 의사당에서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는 글까지 남겼다. 조 · 중 · 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서 노 대통령의 방명록 내용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에 굴하지 않고 4일 서해갑문에서 "인민은 위대하다"고 다시 남겼다. 더 이상 냉전적 사고가 남북 관계의 진전을 막지 못한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부장판사 김한용) 심리로 열린 강 교수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만난 검찰은 여전히 냉전시대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피고인은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으며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 반미활동을 하는 등 그 행위 자체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행위다. 사법부가 헌법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1심이 선처를 했음에도 전혀 뉘우침 없이 항소심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는 등 법원의 권위를 해치고 있다."

 

방청석 곳곳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저 검사는 언제적 검사야?"

 

 

이날 서울지방법원 423호 방청석은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향린교회, 교수협의회 등 강 교수의 지인들과 동료들과 제자들 50여명이 자리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들은 검찰이 밝힌 강 교수의 실형 이유에 대해 실망감과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도대체 저 검사는 언제적 검사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검사에게도 들렸는지 검사는 잠시 진술을 중단했다가 다시 최후 의견을 개진해나갔다.

 

"피고인은 6·25 전쟁은 통일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 맥아더 장군을 원수라 지칭하는 등 북한의 주장을 답습하고 있다. 선동적인 글이 군중심리와 결합할 경우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지난번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와 관련해서 찾을 수 있다. 맥아더 동상 철거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단체들과 이를 막으려는 단체들 양쪽에서 치이는 전경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를 근거로 검찰은 "피고인이 유죄판결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회의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와 분리시키는 엄벌에 처하는 것이 옳다"며 강 교수에게 1심과 같은 징역 4년 및 자격정지 4년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변호인은 최후 변론을 통해 "검찰은 전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며 "이 나라가 파쇼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질책했다.

 

"역사적 진실과 객관적 사실을 지적한 강 교수의 행위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행위라고 봐야 한다."

 

"거짓은 거짓으로, 진실은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판결 부탁"

 

 

변호인은 검찰이 제기한 사실 관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마치 강 교수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행동한 것처럼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있는데 객관적인 사실 입증 없이 유 · 무죄 판결이 나서 되겠나. 이후 10·4 공동선언이 국회통과가 되고 실질적 법 효력을 갖게 된다면 냉전법령인 국가보안법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번 판결은 그런 미래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된다."

 

또 변호인은 "법원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키는 것은 법원 자신"이라며 "최근 600여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이 난 인혁당 판결, 그리고 진보당 판결 등 특히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해서 법원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정치권력 판단의 영향을 받아왔다"고 질책했다.

 

이어 강 교수도 미리 준비한 최후 진술 원고를 통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의 상황에 맞는다고 생각한다"며 "거짓을 거짓이라고 또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고, 이러한 자유인으로 우리들이 거듭날 때에만 우리 민족이 자유로워지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항변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참과 진실을 밝히고 알리는 학문의 규범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저의 학문적 좌표는 허구에 입각한 냉전 성역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판사님들께서는 강정구 필화사건이라는 개인과 개별적 사건 차원에 머물지 말고 사법부가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기초로, 역사와 후손에 부끄럼 없는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을 당부 드린다."

 

장장 2시간 30분 이상 진행된 결심 공판은 11월 13일 오전 선고공판을 예정한 뒤 막을 내렸다.

 

강 교수와 방청객들은 공판이 끝난 후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깝다"며 서로를 격려하고 승리를 자신했다. 그러나 공판 내내 검찰이 보인 냉전적 태도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녹아있었다.

 

향린교회 홍근수 목사가 "징역 4년은 아무 것도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유죄판결을 받지 않는 한 우리 강 교수가 징역살이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 높였지만 6년을 끌어온 이 법정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태그:#국가보안법, #남북정상회담, #강정구, #만경대 필화사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