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허진호 감독

<행복>의 허진호 감독 ⓒ 조이씨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변할까. 사람이 변하잖아요. 어느 순간, 냉정해질 수도 있고. 그 다음에 또 놀러 가자고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느낌이 좋았어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할 때처럼 인간의 감정 변화가 급격할 때가 또 있을까.

조근조근 신중하게 말을 건네는 허진호 감독을 한 발짝 떨어져보니 그의 영화 스타일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왜 그가 멜로 영화를 고집하는지, 사람의 변화하는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한석규·심은하의 <8월의 크리스마스>, 유지태·이영애의 <봄날은 간다>, 배용준·손예진의 <외출>. 모두 허진호 감독이 인장이 깊숙이 박힌 멜로 영화들이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대중과 평단의 호평을 고루 받고 데뷔한 지 10년. 그 허진호 감독이 황정민·임수정과 작업한 <행복>을 들고 나왔다.

도대체 사람이란 존재는 왜들 그럴까

술과 담배·여자에 찌든 남자 영수(황정민)가 망가진 간 때문에 요양원을 찾는다. 거기서 폐가 아파 8년간 요양원 생활을 해 온 여자 은희(임수정)을 만난다.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가는 두 사람. 이어 연애의 쓴맛 단맛을 모두 보여줘 온 허진호 감독다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행복>은 원래 전작인 <외출>보다 먼저 떠오른 기획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 영화의 순서가 바뀌었다. "그저 나이를 더 먹었다는 정도?"로 변화를 설명하지만 그 사이 허진호 감독은 결혼을 하고 네 번째 작품의 편집을 맞췄다. 다시금 죽음에 가까이 간 기승전결 뚜렷한 이야기를 들고 나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 데뷔작을 빼고는 공교롭게도 다 가을 개봉이에요. 모두 멜로 장르라 그럴까요.
"그러고 보니 그런데,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시간 경과가 있는 영화들을 하다 보니까. 9~11월까지 찍어서 2월이나 5월에 개봉하는 게 맞는데 이번엔 좀 더 늦어졌네요."

- 전작들이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면 이번 <행복>은 이야기에서 시작됐다고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몸이 아프고 가진 것 없는 두 사람이 만나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그러다가 병이 나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 같네요."

- 전작 <외출>은 허진호 작품세계의 변화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었는데요.
"이야기의 선택이 달랐던 거 같고요. <외출>은 두 사람의 심리적인 부문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번 이야기는 제 영화 중에 사람도 제일 많이 나오고 요양원이란 공간이 생기면서 따뜻한 기운도 느껴지고 거기서 웃음도 주고요. 이 쪽에서의 행복한 생활과 도시로 떠나간 후에의 대비되는 효과가 있었던 거 같아요."

 <행복>의 영수와 은희.

<행복>의 영수와 은희. ⓒ 라이필름, 영화사집


- 아무래도 요양원 장면들이 유머도 있고 정감있게 느껴집니다. 감독님 영화에서는 시골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흥미로워요.
"시골이라(웃음). 이번엔 완전 시골이고(웃음),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경우는 군산이니까 지방이고요."

- 네, 시골 말고 지방(웃음). 뭐랄까, 농담을 섞자면 지방 선호사상?(웃음)
"제가 지방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촬영하기가 참 좋아요. 서울에선 계속 출퇴근하느라 집중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지방에서는 계속 영화 생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번 <행복>은 아픈 사람들이 외딴 곳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좀 더 전원적이랄까요. 의도적으로 이 쪽의 생활·공간, 우리가 흔히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 말은 분명히 살아가면서 부족하고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거겠죠. 현실적으로 봤을 땐 그것 또한 힘들다는 것도 다 알고 있고. 그런 어떤 평온함 삶과 이 쪽에서의 부딪히는 삶의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 확실히 양쪽의 삶의 대비가 두드러져요. 특히 관객들 중 다수도 도시에 살고 있을 테니. 어떤 통속적인 이상향이라기보다 아프다는 구체적인 설정 탓에 더 공감이 갔던 것 같고요. "요양원이란 공간이 어떻게 보면 (도시에서) 치료를 받다가 실패한 사람들이거나 현실적으로 치료받을 돈이 없거나 규칙적인 생활의 변화를 통해서 치료하는 곳이잖아요. 처음엔 굉장히 어두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취재를 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건 (그 사람들이) 밝더라고요. 병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인식도 하고, 또 잊어버리기도 하는 그런 공간이었어요."

- 전작들을 보면 항상 죽음이 어른거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이나 <외출>도 그렇고, <봄날은 간다>에서는 할머니의 죽음이 있었고요. 이번 캐릭터들은 병도 있고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 있는 인물이라 더 직설적으로 느껴져요.
"은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물이라 죽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것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생을 더 충실하고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사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더 현명하게 될 수 있는 거고."

- 허진호 영화의 특징은 연애의 쓴맛, 단맛을 다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현실적이라 더 좋아하는 관객들도 있고, 쓴맛은 보기 싫고 '아, 너무 아프다' 하면서 싫어하는 관객들도 있고요.

"<행복>은 원래 '둘이 만나서 행복하게 산다'라는 걸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한 사람이 병이 나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슬픔도 밝게 찍고 싶었고 둘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은 밝게 그리고 싶었어요. 둘이 만나는 과정들은 웃음을 주고 따뜻하게 그리면서 결국 행복하게 산다는 걸로 끝내고 싶었는데, 다시 몸이 나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취재하면서도 실제 영수와 은희 같은 케이스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분명히 한 번 경험을 했고 죽을 수도 있지만 또다시 넘어가는 건 뭔가, 왜 그럴까? 사람이 원래 그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 번 더 반복을 줬죠. 그 반복에 있어서 이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나란 얘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 <행복>은 전작인 <외출>보다 분명 친절해졌다는 느낌이 강한데요.
"<외출>은 당시 공간도 한정되어 있었고 생략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행복>은 생략보다는 뭐랄까요, 설명들이 필요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좀 친절하게 갈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복>은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이니까 설명이 필요하리라 생각했죠."

- 후반부를 보면 은희를 떠난 영수에게 벌을 내린다 싶을 정도로 쓸쓸한 느낌이 나는데요.
"네,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영수가 미워서 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싶었던 것 같아요. 그게 다시 망가지게 한 가장 큰 이유고. 원래는 전혀 망가지지 않는 결말이었는데, 아까도 얘기했듯이 행동을 다시 반복하고 또 후회하면서 어떻게 보면 자학하는 게 있지 않을까. 감독이 응징한 게 아니라 영수 본인도 그 상처를 가지고는 잘살지 못했을 거다."

"<행복>은 연기자들의 몫이 큰 영화"

'삼촌과 조카 사이 아냐?' '황정민과 임수정이 베드신을?'. <행복>의 개봉 소식이 들려오면서 네티즌들이 보였던 반응들이다. 남성 관객들의 황정민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끝이 없었고 그러는 사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높아만 갔다. 게다가 멜로의 계절 가을이 아닌가.

<행복>은 항상 남녀 주인공의 앙상블을 중시해 온 허진호 감독의 작품답게 황정민과 임수정의 익숙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쁜 남자' 영수와 '당찬 여자' 은희의 사랑 속에 황정민과 임수정은 완전히 몰입한 듯 보인다. 그 중간에서 세심한 배려와 대화로 연기를 이끌어 낸 허진호 감독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행복>의 키스신.

<행복>의 키스신. ⓒ 라이필름, 영화사집


- 이번 영수 캐릭터는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와 대구를 이룬다는 느낌도 얼핏 들던데요.
"글쎄요, 은수와의 대구는 아닌 것 같은데(웃음). 캐릭터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웃음). 그럴 수도 있지만 전 또 다른 인물 같아요.

예를 들면 <봄날은 간다>에서는 어떻게 보면 사랑이 식어가잖아요. 식어가면서 느슨해지고 일상화되고 그러면서 한 사람은 변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고. 이 사람은 왜 변할까 하는. 반면 <행복>은 정확하게 떠나가는 거에요. 전 영수가 떠나가는 순간에도 은희를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그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물론 변하지 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도 있지만(웃음).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변했다는 느낌보다는 어떻게 보면 잘못된 선택이랄까?"

- 카메라와 인물과의 거리를 보면 전작들과 비교해서 굉장히 좁혀졌단 생각이 들거든요. 행복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건가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어요. 특히 행복한 부분에서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요. 행복해 하는 모습과 느낌들, '왜 뽀뽀를 했는데 또 뽀뽀하고 싶지'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대사인데 느낌은 전달되잖아요. 전 은희다운 대사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느낌들이나 '너 아프니까 내가 죽을 것 같다'는 영수의 모습들? 그 느낌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 좀 다른 얘기를 해 보자면 전작들 경우 남자 주인공의 직업에서 사진이나 소리·무대라는 어떤 매개체가 있었다면 <행복>은 죽음이나 요양원에 집중한 것 같아요. 
"이번에도 직업은 고민했는데 그렇게 중요하진 않았어요. 직업으로 어떤 얘기를 하기보다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가라오케 같은 거 경영하면서 월급사장이 됐든 클럽도 다니면서. 인물을 설정하면서 가라오케 사장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먼저 했던 것 같아요."

- 그런데 영수는 전작의 소심형 남자들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어요.
"O형이 활달한 성격이죠? 황정민이란 배우가 굉장히 활발하고 동적인 친구에요. 인물이 전작에서는 굉장히 정적인 느낌이었다면 동적으로 바뀐 것에는 황정민이란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 부분들이 찍으면서도 재미있었고 좀 더 황정민에 가깝게 간 것 같아요." 

- 일부에서는 은희 캐릭터가 남성의 판타지가 개입된 인물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반면 여성의 심리를 잘 그려낸다는 평가도 있고요.
"항상 그랬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 때도 그랬고. 제가 적극적인 여자를 좋아해서 그럴까요(웃음)? 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나눈 얘기들과 실재 인물들로 캐릭터를 가져오고 그걸 대사로 썼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요? 사실 여자 심리 잘 몰라요(웃음)."

- 임수정씨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때와 달리 촬영기간 동안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행복>은 연기자들의 몫이 커요. 각자 영수가 되고 은희가 된 부분이 있거든요. 편집을 하면서도 저 역을 임수정이 아니었으면 누가 했을까, 그냥 임수정이다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아픈 병을 가지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어떤 밝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누구일까 생각을 해 봤을 때 그건 바로 임수정이었던 것 같아요. 인물에 깊게 들어갔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은희의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실제로 배우들이 굉장히 친했고 서로 또 잘 아는 사이였어요. 진짜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 라고 스탭들이 농담을 했을 정도니까. 근데 헤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 실제로 황정민이란 배우가 임수정에게 말도 잘 안 붙일 정도였어요. (배우들이) 정말 좋았던 거 같아요."

- 영화 속에서 인상적으로 쓰인 한대수씨의 노래 '행복의 나라'는 참 좋다 싶으면서도 좀 튄다 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는데요.
"시작부터 생각했던 노래에요. 제가 참 좋아하고 넣고 싶었고. '행복의 나라' 자체가 가사나 느낌은 경쾌하지만 그 안에 슬픔이 있어요. 그런 감성을 옛날부터 좋아했고요. 실제로 한대수 선생을 만나서 물어보니까 자기가 열여덟 살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참 힘들 때 만들었고 이민자의 슬픔이 담겨 있구나 싶었죠."

"언제까지라도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

-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로 화제의 감독이 된 지 10년이나 됐어요. 그동안 어떤 점이 가장 달라진 것 같나요? 개인적으로 혹은 외적으로. 
"그전에도 그랬지만 관객들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또, 그 때도 영화 만들기는 쉽지 않았고 영화는 항상 어렵게 만들어지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이런 고민은 전에나 지금에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시장 상황이 바뀌었지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나 제작자들은 영화 정신이랄까요? 그런 마인드는 항상 가지고 있는 것 같고요."

- 곽경택 감독은 방송에 나와서 흥행이 좋냐, 상이 좋으냐란 질문에 '빚이 많아서 상금이 제일 좋다'라고 농담을 하던데요. 감독님은 어떤가요?
"그럼요. 관객이 많이 들고 흥행이 잘됐다는 건 모든 감독들이 원하는 거죠. 왜냐하면 영화에 들어간 자본의 문제도 있는 거고, 영화라는 게 결국 많은 사람들을 보여 주려고 하는 작업이니까요. 제가 판단을 하는 건 아닌 것 같고요.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까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행복>의 허진호 감독

<행복>의 허진호 감독 ⓒ 조이씨네


- 그런 점에서 전작 <외출>은 조금 아쉬웠겠어요?
"이번엔 좀 소통하게 도와주세요(웃음)."

허진호 감독은 차기작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훈의 단편 소설 <화장>을 각색 중이다.

아내를 뇌종양으로 먼저 떠나보낸 화장품 회사 중역인 남자가 아내를 화장하면서 중간 중간 회사의 젊은 여직원을 떠올리는 짤막한 이야기다.

죽음·감정·관계 등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익숙한 코드들이 언뜻 떠오른다. <행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허진호 감독은 죽음에 관한 성찰을 보여줄 셈이지만 주인공의 남자의 외양은 분명 또 다른 변화를 예측하게 한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일상적인 시선으로 녹아내온 '멜로 영화의 작가주의' 감독의 작품세계는 지금도 전진 중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블로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허진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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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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