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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원들이 하늘을 관찰하던 곳이다. 사진은 창경궁 관천대다.
▲ 관천대. 서운관원들이 하늘을 관찰하던 곳이다. 사진은 창경궁 관천대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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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와 함께 경덕궁에서 밤을 보낸 태종은 이튿날 제릉(齊陵)을 참배했다. 제릉은 태종 이방원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능침이다. 태종은 젊은 나이에 지아비를 새색시에 내주고 5형제 기르느라 평생을 헌신했던 한씨가 부귀영화를 누려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했다. 환궁한 태종은 서운관 이양달을 불렀다.

“어젯밤 유성은 무슨 연유인가?”
“……”

서운관 이양달이 유성을 보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평범하게 묻고 있는데 이양달은 눈앞이 캄캄했다. 어젯밤 유성을 보지 못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답을 해도 죄인이다. 서운관은 임금이 묻기 전에 보고해야 하는 것이 철칙이었다. 천변(天變)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야 하고 감히 대문(對問)이 있은 뒤에 나와서 아뢰는 자는 죄 주는 것이 법도였다.

“유성의 곡절을 묻고 있지를 않느냐?”
“실은 어젯밤에 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양달은 할 말이 없었다.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었다.

“뭣이라고? 너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밤에 하늘을 살펴보고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즉시 상달해야 하는 것이 너희들의 직무이거늘 유성을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너희들이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냐?

임금은 대노했다. 서운관은 천문지리를 살피는 관원이다. 주간 일보다도 야간 업무가 막중하다. 별자리의 운행을 살펴 천기(天氣)를 예측해야 한다. 천기는 곧 왕권과 연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서운관이 임금이 본 유성을 못 보았다면 직무를 태만했거나 유기한 증좌다.

“저희 서운관은 2인 1조가 되어 밤하늘을 살피고 있으나 보름달이 뜨는 보름에는 성좌가 달빛에 가려 제대로 살필 수 없어 근무를 서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서운관은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와도 하늘을 살펴야 한다. 허나, 서운 관원들은 둥근달이 중천에 걸리는 보름 전후를 휴일로 생각하는 것이 관례였다. 밝은 달빛 때문에 별자리의 운행을 정확히 살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밤하늘을 관찰해야 하지만 호기였다. 이러한 날에는 관상대를 비워두고 술타령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렇다고 술 마시느라 유성을 보지 못했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목이 둘이라도 부족하다.

서운관원들이 하늘을 관찰하던 곳이 관천대다. 일영대 또는 첨성대라 불리었으며 태종 조에는 창덕궁에 본감을 두고 경복궁서북, 천추전서측, 북부광화방 등 세 곳에 관천대를 두었으나 조일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유실되었다. 숙종 조에 창경궁과 경희궁에 관천대를 신설하고 북부광화방 관천대를 복구한 것이 오늘에 전한다.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이러하고도 나라의 녹을 먹는단 말이냐? 달빛 때문에 별을 관찰하는데 방해를 받는다 하드래도 하늘을 살펴보는 것이 너희들 직무가 아니더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책이 없었다. 목을 늘이는 수밖에 없었다. 딱 걸린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자리를 비운 사이에 꼭 이런 일이 터진다. 평소에 근무를 잘 서던 경비가 잠간 화장실에 간 사이 사장이 암행을 나온다던지, 두 눈을 부릅뜨고 경계근무에 만전을 기하던 초병이 잠간 조는 사이 중대장이 점검을 나오거나 대대장이 시찰을 나오는 경우와 비슷하다.

정권이 노쇠해지면 관리들이 준동 한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은 잡고 백성들은 풀어주는 통치자를 만백성은 칭송한다. 항해하는 선박에 위기가 닥치면 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듯이 정권이 노쇠해지면 관리들이 준동한다. 나라의 예산을 연고처에 밀어주고 성상납을 받는가 하면 공금으로 여행을 다니고 국가의 재정을 물 쓰듯이 펑펑 쓴다. 5년차의 정권도 이러할진대 태종 정권 18년차. 그동안 관리들을 휘어잡고 잘 지탱해왔지만 이제는 피로가 쌓이고 노쇠한 증거다.

“고이얀 놈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이 유성을 못 보았다니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 다음부터는 보름날에도 근무를 확실히 서도록 하라.”

임금이라고 서운관들의 관례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선대왕들은 밤을 새우며 고생하는 서운관들에게 보름날이면 야식을 내려주기도 했다. 지휘 감독자는 이러한 약점을 잡았을 때 더욱 공고한 지위를 확보해두려는 것이 상정이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성을 발견하지 못한 서운관 사진(司辰) 위사옥을 순금사에 내려 장 60대를 쳐 파직시켰고 일식을 잘못 예측한 서운부정(書雲副正) 박염을 동래로 유배시켰으며 우레 소리를 보고 하지 않은 관승(觀丞) 황사우와 감후(監候) 강숙을 의금부에 내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양달이었다.

“어젯밤에 잠이 오지 않아 뜨락을 거닐고 있을 때 동쪽 하늘에서 유성이 나타나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무슨 연유인가?”

“유성의 머리 부분에서 발하는 광채가 붉은 빛이냐? 정청색(正靑色)이냐? 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우리나라의 일이냐? 상국의 일이냐? 판단이 다릅니다. 정수(井宿)에서 나와 묘수(昴宿)로 사라지는 유성은 길조가 아니라 흉조입니다.”

유성 머리 부분에서 발산하는 광채에 따라 조선의 일과 명나라의 일을 분별한다는 얘기다.

“알았다. 물러가도록 하라.”

십년감수했다. 많이 봐준 셈이다. 편전을 물러나온 이양달은 땀으로 온몸이 후줄근했다. 이양달을 내보낸 태종은 심사가 유쾌하지 않았다. 좋은 징조가 아니라 나쁜 징조라니 기분이 언짢았다. 대소신료들이 퇴청한 시간. 태종은 지신사 조말생을 경덕궁으로 비밀히 불렀다.

흔들리는 태종, 양녕대군 이후의 정국을 구상하다

“죽은 자식 성녕은 우리 가문에서 얼굴을 바꾼 아이였다. 명나라의 사신에게 술을 청(請)할 때에는 사신 황엄이 주선(周旋)하는 사이에 주의하여 보고 심히 그를 사랑하였다. 장차 성취(成就)시켜서 노경을 위로하려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 단명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마음을 잡겠느냐?”

태종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랬다. 유명을 달리한 성녕은 그의 형 양녕, 효령, 충녕보다 인물이 훤칠하고 수려했다.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빼앗아 세자전에 들이었다가 일이 발각되어 쫓겨났었다. 어느 날 첫째와 둘째가 궁에 들어와 중궁을 보는데 내가 마침 이르니 평양군궁주가 말하기를 ‘세자전에서 유모를 구하여 부득이 이를 보내었습니다’고 하므로 중궁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게 어떤 유아이냐?’고 하니 궁주가 ‘어리의 소산입니다’고 하였다. 그 까닭을 들으니 김한로의 처가 종비라 칭탁하고 어리를 데리고 들어가 세자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 <태종실록>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를 청평군 이백강에게 출가시켰으므로 청평군궁주라 말하는 것이고 태종의 2녀 경정공주는 평양군 조대림에게 시집보냈으므로 평양군궁주라 이르는 말이다. 궁주와 공주가 혼동이 되는데 시대의 변천에 따라 호칭도 변했다. 정순공주는 이저 이거이 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렀고 경정공주는 작은공주라는 애칭으로 통했으며 그녀가 살던 곳을 소공주골이라 불러 소공동의 유래가 되었다. 오늘날 조선호텔 자리다.

한숨을 내쉬던 태종이 말을 이어갔다. 

“세자가 어려서 체모(體貌)가 장대하여 장차 학문이 이루어지면 종묘사직을 부탁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가르치고 깨우치는 것을 부지런히 하였다. 이제 수염(鬚髥)이 방불(髣髴)하고 자식이 있는 성인이 되었으나 학문을 멀리하고 황음(荒淫)하기가 날로 심하다.

역대의 인주(人主) 가운데 태자에게 사의(私意)를 가지고 이를 바꾼 자가 있었고 참언(讒言)을 써서 이를 폐(廢)한 자도 있었다. 내가 일찍이 이를 거울삼아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러나 세자의 행동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는가? 태조께서 개국한 지 오래지 않아 그 손자에 이르러 이와 같은 자가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태종은 비 오듯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세자가 학문을 일삼지 아니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니 대소신료가 실망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이제 또 이와 같으니 진실로 작은 연고가 아닙니다. 마땅히 김한로를 죄 주어서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세자가 불의(不義)한 연고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하나둘이 아니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 세자를 가르쳐서 스스로 새 사람 되기를 기다릴 터이니 이 일을 누설하지 말도록 하라.”

태종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태종이 한양을 비우고 개성에 온 것은 성녕대군 사망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휴식하기 위한 피방이라는 구실도 있었지만 양녕대군 이후의 정국을 구상하고 중대 결심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태그:#서운관, #이양달, #태종, #정비, #관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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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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