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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인권이 만난 사람' 인터뷰 대상이 화가 홍성담이라는 얘기에 귀가 먹먹해졌다. 홍성담이 누군가. 1980년대 이래 나라 안팎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행사와 전시회를 통해 민중미술의 빛나는 성취를 일궈온 민중화단의 기수가 아닌가. 순전히 그의 화가로서의 편력만 더듬어도 그 작업이 대하장강일진대, 어찌 홍성담을 말하면서 그림이나 그림쟁이만을 주제로 삼을 수 있겠는가.

 

그는 ‘80년 광주’를 한복판에서 겪어냈던 투사였을 뿐 아니라, 이후 고집스럽게 ‘광주정신’으로 비틀린 세상에 몸 부딪쳤다가 모진 고문과 장기간의 옥고를 감내해야 했던 어두운 시대의 양심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의 궤적을, 그가 살고 있는 현재와 그가 꿈꾸고 있는 미래까지를 버무려서 작은 그릇에 담아내라는 제의에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


약속한 날짜는 다가오고 뭔가 준비를 해야 되겠다 싶어 우선 그의 작품들을 일별하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보다가 어렵지 않게 화두 하나를 건져낼 수 있었다. ‘밥’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밥이며 밥그릇이 무시로 등장했다. 가령 ‘어머니의 땅’이라는 작품을 보면, 큼지막한 사기그릇에 고봉으로 쌓아올려 담은 쌀밥을 어머니가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올 만큼 넉넉하다. 그 다음 또 하나의 밥은 이러저러 설명이 필요 없는, 흔히 ‘해방광주’라고 일컫는,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대동세상을 상징하는 주먹밥이다.


홍성담의 그림에 나타난 밥 한 그릇을 더 소개하기로 하자. 이른바 ‘콩밥’이라 불리는 감옥 밥인데 이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다. 1988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서울에서 민족문학제가 열렸다. 당연히 행사 주제는 구속문인 석방이었다. 외국에서 참여한 문인들을 위해 영문으로 된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포스터 제목이 ‘Poet's Meal In Prison’이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옥에 갇힌 시인의 식사’ 뭐 그쯤 될 것이다.

 

지하 감방에 갇힌 죄수가 두 팔을 포승줄에 묶인 채로 엎드려서 개처럼 입으로 밥을 먹는 모습이 판화로 새겨져 있고, 그 그림을 배경으로 ‘오 지하의 시간이여 / 표독한 야수의 발톱에 떨어진 / 살점이여 살점으로 뒹구는 / 육신이여 영혼이여 / 죽어서는 안 된다 / 살아남아야 한다…’로 이어지는 김남주의 시구가 적혀 있는 포스터였다.


나는 그 포스터를 받아와서 판넬로 제작한 다음 골방에 걸어놓았다. 포스터 속 포승줄에 묶인 시인의 모습은 워낙 이미지가 강렬해서, 한동안은 가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게으름과 나태에 젖은 나를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20여 년 동안 수차례 이사를 다니는 중에도 용케 그 포스터 판넬은 아무 손상 없이 지금도 내 골방 벽면에 무사히 걸려 있다.

 

그런데 홍성담의 블로그에 올라 있는 작품들 속에 바로 그 포승줄에 묶인 죄수 모양을 형상화한 판화작품이 떠억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제목도 ‘옥에 갇힌 시인의…’ 어쩌고가 아니라 단순 명쾌하게 ‘개밥’이었다. 그러니까 난 20년 동안 홍성담의 판화작품 ‘개밥’을 개밥인 줄도 모르고, 또한 작가가 홍성담인 줄도 모르고 날마다 우러러 감상해온 것이었다. 이만하면 화가 홍성담을 만날 자격을 갖춘 것 아닐까?


이제 ‘밥’이라는 화두를 수첩 속에 챙겨 넣고 경기도 안산에 사는 그를 만나러 나선다. 4호선 고잔역에서 승용차로 5분여 거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는데, 작품창고로 쓰이는 1층의 방들엔 전시장에서 임자를 만나지 못한 작품들이 포장채로 켜켜이 쌓여 있었다.

 

자신의 창작품을 창고 가득 가지고 있노라면 바라보기만 해도 포만감으로 뿌듯할 것인지, 아니면 제조업 종사자의 재고품처럼 애물단지로 보일 것인지가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가니 그 곳이 작업장이었다. 나는 그 미술공장의 탁자에 마주앉자마자 요즘 잘 지내는지, 사는 일이 행복한지부터 캐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그가 이렇게 답했다.


“우리 나이로 쉰 살이 되던 2004년에 동갑내기 정신과 의사에게 늦장가를 들었지요. 뜬구름처럼 혹은 바람처럼 살았던 때보다는 훨씬 더 안정된 셈이지요. 가정의 소중함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세상을 내 맘대로 부유할 때 누리던 자유로움이야 조금은 포기해야 되지만…. 행복하냐고요? 지금 난 행복합니다.”


난 옆구리를 찔러서 겨우 “행복하다”는 답을 얻어내고는 “고맙습니다”, 해버렸다. 엄혹한 시절 그가 겪었던 고초에 대한 동년배로서의 부채감을 떨칠 수 없었는데, 세속적 의미의 생활고로 고통 받고 있다면 바라보기가 얼마나 더 괴로웠을 것인가.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아주는 것이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의 고향과 성장과정을 엿볼 요량으로 그의 작품 ‘어머니의 땅’에서 어머니가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있는 밥 한 그릇을 화두로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밥’론(論 )이 풀려나온다.


“어머니가 항상 하셨던 말씀이 밥은 혼자 먹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에 굶는 사람이 있다면 내 입으로 들어가는 밥숟갈이 살로 가고 뼈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밥은 비단 산 사람끼리만 나누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과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권, 인권 하지만 우리가 밥 먹는 시간에 누군가를 굶게 만들었다면, 그보다 더한 인권 유린은 없을 것입니다. 1966년부터 내리 4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호남지방을 휩쓸었어요. 김지하 시인의 말마따나 밥 한 그릇이 곧 하늘이었습니다. 갈파래를 뜯어다가 보리알 몇 톨 뿌리고 절구에 넣고 찧은 다음 죽을 끓여서 끼니를 대신했는데 배고픔의 고통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홍성담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라는 섬이고, 나는 완도군 생일도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가 흉년에 끼니로 삼았다는 갈파래 죽을 나도 안다. 갈파래는 다른 파래와는 달라서 흡사 비닐장판지처럼 뻣뻣해서 평소에는 먹을 엄두를 내지 않는다. 육지가 흉년이면 이상스럽게 바닷가에도 흉년이 든다.

 

썰물이 되어도 먹을거리 삼을 만한 갯것이 없어 그 뻣센 갈파래를 뜯어다 죽을 끓여 연명했다. 비록 흉년 가난타령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우린 모처럼 갈파래 죽에 얽힌 ‘섬놈’으로서의 추억을 공유하여 한통속이 됐다.

 

 

밥 얘기가 나온 김에 홍성담의 작품 ‘농부’를 화제로 올렸다. 절개된 보리밭 땅 속에 한 명의 주검이 누워 있고, 그 주검 위에 푸른 보리가 자라는 모습이다.


- 저는 그 그림을 보고 신라의 혁거세 신화를 생각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혁거세는 생을 다 하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올라간 지 이레 만에 시체가 다섯 토막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집니다. 서양에도 비슷한 신화가 발견되는데 주검이 토막 나서 떨어짐으로써 땅을 기름지게 하고 그 위에서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그 곡식을 후손이 먹고 번성하게 한다는 일종의 곡령신앙(穀靈信仰)이지요.
“저는 그 그림을 통해서 우주순환의 원리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광주항쟁 때 군부에 저항했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을 일컬어 시민들은 행방불명, 즉 행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속으로 왜 행방불명이냐, 그들의 행방은 명확하다, 이렇게 생각해왔어요.

 

총칼에 희생된 그들은 필시 이 땅 어딘가에 묻혔을 것입니다. 그 주검들이 거름이 되어서 과일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는 겁니다. 내가 그 과일과 알곡을 먹음으로써 그들이 항쟁 때 목숨을 내던지며 이루고자 했던 세상의 모습들이 비원이 되어서 내 몸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다시 그들이 원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하고…. 이런 순환의 원리를 표현한 것이죠. 아직까지 그렇게 해석해준 평론가가 없었는데 오늘 엇비슷한 해석을 듣네요.”


홍성담은 가난한 섬마을에서 소년기를 보낸 다음 뭍으로 나와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차 화가가 되겠다는 포부는커녕 그림에는 일점 관심도 없었다. 2년제인데다 학비 부담도 거의 없고 병역도 면제된다는 매력에 끌려 교육대학에 가기로 결심하고 광주교대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말았다. 미술선생이 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한 것이 그림 밥 먹고 사는 길로 들어서게 된 첫발이었다.


이제 홍성담의 인생행로를 가장 큰 각도로 뒤바꿔버린, ‘대동세상의 주먹밥’으로 상징되는 광주항쟁 얘기를 할 차례다. 1955년생이므로 ‘80년 광주’ 때 그의 나이는 만 스물다섯이었다. 홍성담은 당시 전남도청 부근의 한 빌딩 지하에서 미술교육도 하고  공연도 할 수 있는 종합문화센터를 만드는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5월’이 터졌다.


광주항쟁의 전말을 여기서 모두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고, 홍성담과 관련된 얘기만을 거론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진압군의 무차별 폭력에 맞서 시민들이 항쟁을 전개할 당시 홍성담은 광주자유미술인회 회원들과 함께 항쟁지도부의 문화선전대로 활약했다. 포스터 만들고 플래카드 쓰고 대자보 제작하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항쟁이 치열할 때 목숨이 위태로운 적 없었느냐는 질문에 “항쟁 지도부는 물론 시위대의 맨 뒤에서 서 있던 시민들까지도 모두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가 항쟁기간에 맡았다는 일 중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다음, 시민들의 자치체제가 들어섰던 ‘해방광주’ 때의 역할이다.


“당시 모든 시내버스가 멈춰버렸기 때문에 시민들의 이동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대중교통 수단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시민군본부로부터 교통 편제를 새로 하라는 지시가 저에게 떨어진 겁니다.”


홍성담은 ‘자유광주’의 교통부 장관을 맡아 모든 시내버스를 광주공원에 집결해 놓고 페인트로 1번, 2번 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기고, ‘1번 버스는 지원동부터 학동까지…’ 하는 방식으로 노선을 설정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가장 열성을 기울였던 건 대자보 작업. 광주 소식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투사회보’가 있긴 했으나 낡은 등사기로 밀어서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들을 간추려서 게시하는 대자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홍성담은 그 대동세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이 절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면 사람에 대한 소중함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평상시 같으면 지나가다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괜히 노려본다고 시비하고, 어깨가 부딪치면 싸움이 나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시민들끼리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아무나 먼저 인사하고….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고, 만나는 사람을 모두 절실해하고…상상이 되세요? 뿐만 아니라 내 것 네 것 없이 가진 걸 모두 내놨어요. 플래카드나 대자보 만드는 데 필요한 페인트하고 천이 모자라서 가두방송 한 번 하고나자 페인트가 줄줄이 답지하고 포목점에서 옷감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커튼이나 이불보를 내오기도 하고…. 그때 거리에서 나눠 먹던 주먹밥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홍성담은 1980년 광주에 대한 기억만 오롯이 간직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평생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한다.

 

 

이제 홍성담이 광주항쟁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벌였던 민중미술운동과, 그로 인한 박해에 어떻게 맞서왔는지를 탐색해 보자.


- 팸플릿에 올라 있는 연보를 보면 1980년 7월 5일 나주에서 야외 전시회를 가진 것으로 돼 있다. 광주항쟁이 진압군의 총탄에 제압된 직후인데 이런 행사가 가능했었나요?
 “전시회라기보다는 광주 영령들에 대한 위령제 성격의 퍼포먼스였습니다. 본래  1980년 7월쯤 광주자유민술인회 회원들이 전시회를 갖기로 했었는데, 광주항쟁으로 계획이 무산되자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나주 벌판에 미술작품을 살치하고 광주영령들을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 그 무렵 판화작업에 몰두한 것으로 아는데 왜 판화를 선택했습니까?
“목판화를 주로 해왔는데 목판화는 칼로 깎고 파고 다듬기 때문에 뭐랄까, 손맛이 살아 있지요. 광주항쟁 끝나고 나서 항쟁의 진실을 세계인권단체 등에 알릴 수단을 찾다가 5월 연작판화 작품 50점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저를 판화가 홍성담, 그러는데 저는 판화가가 아니고 서양화가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1980년대 민중미술의 마지막 백미라면 당시 유행했던 걸개그림일 것이다. 홍성담으로 하여금 콩밥, 아니 ‘개밥’을 먹게 만든 작품이 바로 대형 걸개그림이었던  공동창작품 ‘민족해방운동사’였다.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통일운동까지의 운동사를 민중화가 70여 명이 달라붙어 11개 섹터로 나눠서 몇 달 동안 진행했던 대형작업이었습니다. 작품 하나의 크기가 높이 2.4m, 길이 7m에 이르렀는데 그런 작품이 11편이었으니 전체 길이가 77m나 되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민족해방운동사’는 전국 순회전시를 하는 한편으로 슬라이드로 제작하여 미국 교포에게 보내졌다. 당시 평양축전에 참가할 재미교포 대표단은 그 슬라이드를 대형 사진으로 현상해 북한에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들은 홍성담 등 작가들이 북녘의 청년 학생화가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 메시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민족해방운동사 그림은 남쪽 청년학생들이 그린 반쪽의 근현대사다. 따라서 너희들의 관점에 따라 나머지 짝을 맞춘다면 작업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북쪽 청년화가들은 세 작품을 더해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완성했고, 북녘 4대도시를 돌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래, 그러니까 1989년 7월 31일, 홍성담은 광주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체포, 연행됐다. 당시 홍성담을 비롯하여 민족해방운동사 작업을 함께 했던 젊은 화가들은 민족민중미술운동 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 건준위’)를 구성하여 활동했는데 안기부는 이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했던 것이다. 당시 홍성담을 변호하기 위해 민변의 김선수 변호사가 선임되었는데 김 변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홍성담씨가 서울구치소로 송치된 뒤인 8월 24일에야 접견할 수 있었는데 사태가 몹시 심각하다고 느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홍씨에게 북한에 다녀왔다는 자백을 강요하면서 구둣발로 정강이를 차고 주먹으로 얼굴과 머리를 무수히 구타하고 야전침대로 손바닥을 때려 손이 새파랗게 멍들었으며….”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물고문이었다. 홍성담은 훗날(1999년) 가나아트센터에서 탈옥(脫獄)이라는 제목의 기획전을 열었는데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라는 작품을 통해 물고문을 고발하고 있다. 검은 손들이 그의 머리를 물이 담긴 욕조에 넣고 짓누르는데, 대책 없이 욕조에 얼굴을 처박은 채 먼 고향의 바다 속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형기를 다 채운 뒤 석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본안 사건과는 별개로 고문수사관의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고문 증거보전신청을 냈는데 서울대병원의 감정소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진행된 고문수사관에 대한 고소사건이었다.


“고문한 수사관을 고소하려면 그 대상을 특정해야 하는데 저한테 고문을 가했던 안기부 수사관의 이름을 알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고문수사관 두 명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니까 몽타주를 그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재판부에서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공모전에 입상경력이 있는 사람의 그림이라면 인정할 수 있으나 홍성담 같은 ‘재야 민중화가’의 그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민중화가 홍성담이 국전 따위에 응모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성담이 김선수 변호사에게 획기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변호사님, 원래 대학생은 국전에 응모할 수 없었는데 제가 대학 3학년 때 학생신분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국전에 응모하여 입선한 경력이 있습니다. 1976년도 국전이니까 문화부에 가서 자료 찾아서 첨부하세요.”


홍성담은 그 동안 국전에 입선했다는 것이 민중 미술판에서는 전혀 자랑이 아니라서 감춰왔는데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더라’며 웃었다. 그는 변호사 접견 시 몽당 4B연필과 지우개 하나를 건네받아 팬티 속에 감추고 감방으로 돌아가서 책 표지 안쪽의 백지를 뜯어낸 다음 담요를 뒤집어쓰고 고문 수사관 두 명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홍성담은 ‘평생을 통틀어 가장 진지하고도 열심히 그렸던 그림이 바로 그 캐리캐처였다’고 술회한다. 그렇다면 홍성담의 그 몽타주 그림은 성공적이었을까? 그림은 몰래 반출돼서 복사본이 <한겨레신문> 등에 공개되기도 했는데, 얼마 뒤 노동운동을 하던 한 서울대생이  안기부를 거쳐 서울구치소로 송치돼 홍성담을 만났다. 그와 홍성담이 나눈 대화가 이랬다.


- 홍 선배님, 안기부에서 그놈 봤습니다. 선배님 고문했던 그놈 말입니다.
- 그걸 어떻게 알았나?
- <한겨레신문>에서 본 얼굴하고 똑같이 생긴 놈이 있기에 제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수사관이 ‘홍성담, 그 놈이 내 얼굴을 그려가지고…’ 어쩌고 하면서 투덜대더라구요.


그러나 홍성담의 탁월한 얼굴묘사에도 안기부가 “그렇게 생긴 수사관은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고문 수사관 고소 사건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물고문을 할 때, 그들은 기술적으로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에 꺼내줍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칼날보다 더 얇아요. 그 지경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게 됩니다. 고문하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보이고 심지어 오늘만이라도 안 맞고 물고문 안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비굴하게 아양을 떨게 됩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석방된 뒤에도 계속되는 물에 대한 공포감이었습니다.”


마실 물 한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엄습하는 물고문의 공포에 떨기도 하고, 더군다나 섬에서 자란 그에게 삶의 터전이었고 꿈이었던 바다가, ‘바다’라는 원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공포의 대상’으로 연상될 때의 배반감은 치떨리는 기억이었다고 얘기한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이제 민중미술에 대한 시각 또한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유독 홍성담, 그에게는 ‘민중미술의 기수’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렇게 규정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에는 거부감이 많았지요. 난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그냥 화가인데 왜 한 편에 가둬버리려 하는가, 그런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운명이려니 여깁니다. 제가 해마다 서너 차례 해외에서 작품을 전시하는데 한국미술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한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해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현대미술은 민중미술밖에 없다. 1980년대의 소중한 경험과 정신을 한반도에만 가둬두지 말고 인류애를 확장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요즘 그가 하는 작업에 눈길이 간다. 그의 작업실에는 일본의 야스쿠니를 형상화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한국, 대만,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로 엮여진 ‘안티 야스쿠니 연대’가 주축이 돼서 오는 11월 5일 유엔본부 앞에서 집회를 열 예정인데 그때를 맞춰서 홍성담의 야스쿠니 연작도 대만 일본 미국 유럽 등지를 돌며 전시될 예정이다. 이제 한국을 넘어 야스쿠니와 한 판 붙겠다는 것이 민중화가 홍성담의 야무진 결의다.

덧붙이는 글 | 이상락 님은 소설가로 <난지도의 딸> <동냥치 별> <누더기 시인의 사람> 등의 작품을 펴냈다.


태그:#국가인권위원회, #홍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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