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성은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29번 국도와 30번 국도가 만나는 곳에 있다. 백산성을 기대고 앉은 용계리는 시골 마을치고는 꽤 큰 마을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백산을 올려다본다. 해발 50m도 채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너른 들판 한가운데 평지풍파를 일으키듯 훌쩍 솟아오른 산이다. 산꼭대기를 향해 성큼성큼 올라간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터덕터덕 이 산을 올랐을 동학농민군의 처지를 조그만큼이라도 느껴보고 싶건마는 너무 깔끔한 돌계단들이 사색의 길을 끊어 버린다.
산을 오름에 따라 차츰 전망이 트이기 시작한다. 우측 멀리 신태인읍 화호가 희미하게 바라다보인다. 일본인 농장과 화호병원 등 일제의 흔적들이 아직 잔존해 있는 곳이다. 이 일대는 우리 민족이 간직한 슬픈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앓는 고장이다.
일어나면 백산, 앉으면 죽산
산 정상 가까이 가자, 가장 먼저 길손을 맞는 건 동학혁명 백산창의비이다. 중앙엔 '동학혁명 백산창의비'라 쓰여 있고, 좌측에는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1월 11일,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와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에 넘어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용태는 무고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면서 보복조치를 자행하고 살인과 약탈을 일삼음으로써 또다시 농민들의 분노를 산다.
3월 20일(양력 4월 30일),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닷새 후에는 백산으로 옮겨 진을 친다. 전라도 일대의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고부 농민봉기를 이끌던 전봉준이 2월 20일경 각 읍에 띄운 격문을 보고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로써 백산 봉기는 고부 농민봉기가 지닌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는 계기를 맞는다.
농민군의 수가 점점 불어나 산을 가득 메웠다.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만 보이고, 일어서면 농민군들이 흰옷이 산을 덮었다 하여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한 농민군은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라고 시작되는 격문을 각지로 띄워 전국적 호응을 유도한다.
혁명 지도부는 농민군을 군대 편제로 재편성하고 총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김개남, 손화중을 추대하는 등 본격적인 싸움 준비를 갖춘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마라"로 비롯하는 '4대 명의'를 발표하여 내부 기율을 다잡는다.
동학농민군이 백산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김문현은 농민군을 소탕하려고 전라감영군과 부보상으로 구성된 200∼300여 명의 연합부대를 백산으로 출동시킨다. 전국 조직망을 갖춘 막강한 조직인 부보상은 정부로부터 상권을 보호받는 대신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인력을 제공하는 협력관계였다.
신태인 화호 나룻가에 도착한 토벌군은 거기에 진을 친 다음 백산을 향해 마구 총을 쏘아댔다. 지형의 불리함을 느낀 농민군은 4월 5일 부안 성황산으로 진을 옮겼다가 곧장 고부 천태산을 넘어 6일엔 도교산(황토산)에다 진을 친다.
1988년 동학혁명백산기념사업회에서 건립했다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는 당시의 의기와 함성을 느껴보기엔 턱없이 작고 초라하다. 창의비에서 몇 걸음 떨어진 산 정상엔 동학정이란 정자가 서 있다. 이것은 창의비를 외롭게 하지 않으려는 관의 배려인가.
아! 천지간에 정통성 없는 것들!
황토현은 정읍시 덕천면으로 넘어가는 705번 국도상에 있다. 높이 35m밖에 되지 않는, 재라고 부르기에도 쑥스러울 만큼 야트막한 언덕이다.
1894년, 4월 6일(음력) 밤, 농민군은 3대로 나누어 세 봉우리에 불을 놓고 관군과 대치하였다. 새벽이 되자, 중앙의 봉화만 남기고 양쪽의 불을 끈다. 그러자 농민군이 잠든 것으로 판단한 관군은 농민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매복해있던 농민군들이 일시에 몰려나와 관군을 공격하자 큰 혼란에 빠진 관군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하였다. 이를 뒤쫓아 간 농민군은 마침내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황토재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정부 토벌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현장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층층이 놓인 계단을 올라가자 마루턱에 우뚝 선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기다리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최초의 탑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은 1963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세워졌다.
부족한 정권의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것 역시 쿠데타 아닌 혁명이라는 듯이 갑오동학혁명을 끌어다 쓴 것일 터. 그러기에 정희성 시인은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꼬집는다.
이 겨울 갑오농민전쟁의 전적지를 찾아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더듬으며 나는 이 시대의 기묘한 대조법을 본다 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일본군 장교출신 박정희가 세웠고 황토현 녹두장군 기념관은 전두환이 세웠으니 광주항쟁 시민군 위령탑은 또 어떤 자가 세울 것인가- 정희성 시 '황토현에서 곰나루까지' 일부 탑 전면에는 전서체로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 쓰여 있다. 좌측 보조석물에는 김상기 박사가 쓴 비문이, 우측 보조석물엔 농민군 부조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뒤쪽에 농민군 민요인 '새야 새야'와 '가보세'를 새겼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는 글씨를 굳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 읽기 힘든 전서체로 써야만 했을까. 명색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위령탑이기도 할진대, 그 옛날 까막눈이었던 농민군이 살아 돌아온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이 글자를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저 글씨체 하나만으로도 저 탑은 반민중적 산물이 틀림없으리라.
황토재 고갯마루를 내려와 동남쪽 기슭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간다. 2004년에 개관한 국내 최대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보존처리된 나무 한 그루다.
이것이 바로 1894년 고부 봉기 당시 이평 말목장터에 서 있던 감나무다. 이 나무 아래 농민들이 모여 봉기를 결의했다고 한다. 수령 180년으로 수명을 다한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보존 처리한 것이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으로 이뤄져 있다. 1층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닭을 키우는 우리의 일종인 장태다. 어렸을 적에 장태를 본 이후로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 전투 당시 농민군은 이것을 수십 개 만들어 굴리면서 관군의 총탄을 막으며 전진했다고 한다. 이 장태가 특히 위력을 발한 것은 장성 황룡강 전투와 전주성 전투였다.
2층 전시실에는 동학혁명이 끝난 뒤, 관측이 참가자와 불참자를 구분하기 위해 만든 '유회성책'이라는 문서와 동학에 참여치 않았다는 확인서 격인 '물침첩', 그리고 빛이 바래고 종이에 좀이 슨 '전봉준 판결문' 등이 눈길을 끈다.
육신의 죽음을 넘어 불멸의 역사 속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맞은 편 산자락으로 간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있는 산기슭을 향해 간다. 전봉준 장군 동상과 사당, 기념관, 광장, 주차장 등이 있는 곳이다. 조감도에 '구 기념관'이라 돼 있는 곳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이곳은 '총체적 부실'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으로 들어서서 왼쪽을 바라면 화강암으로 만든 황토현전적지정화기념비가 있다. 한자 투성이인 비문도 볼썽사납지만 뒷면에 둥근 오석을 붙이고 써 넣은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로 전적지를 정화했다"는 말이 가소롭다. 정화라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파시스트들에겐 한결같이 불순물을 싫어하는 결벽증이 있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이곳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다. 상투를 튼 채 압송당하는 사진 속에서 따온 듯한 머리 부분과 왼손에는 든 격문을 들고 오른팔은 높이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부조화스럽게 느껴진다.
동상 아래 벽에 부조된 농민군상 역시 마찬가지다. 이게 동학군을 형상화한다고 한 건가? 딴 곳을 쳐다보며 해찰하는 사람, 죽창을 어깨에 들러멘 사람 등등 생사를 건 싸움을 하러 가는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비장함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졸속으로 만든 '독재자가 세운 동상'은 가치가 없으며 아무런 애정도 존경심도 느끼지 못한다. 과정마다 국민이 참여해야 애착을 느끼고 비로소 '우리의 동상'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역시 절차와 과정의 정치가 아닌가.
'구 기념관' 지역을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우리 시대에 와서 독재에 항거하는 죽창 같은 시를 쓰며 마치 전봉준 장군처럼 살다간 김남주 시인과 그의 시 '녹두장군'을 떠올린다.
무엇 때문일까
백년 전에 죽은 그가 아니 죽고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은
내 가슴에 내 핏속에 살아 숨쉬고
맥박처럼 뛰는 것은 그도 내 아버지의 아버지처럼
서너 마지기 논배미로 평생을 살았던 가난한 농부였기 때문일까
나와 같이 그 사람도 한때는
글 줄이나 읽었던 서생이었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일까
천석꾼 만석꾼 큰부자도 아녔던 그가
가난한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구척장신 불세출의 영웅호걸도 아녔던 그가
녹두꽃이라 녹두장군이라 인구에 회자한것은
백년 동안 민중의 가슴 속에 남아
답답할 때면 노래되어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캄캄한 밤이면 별이 되어 그들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본다
들것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그의 얼굴에서
두 개의 눈을 본다
양반과 부호들에 대한 증오의 눈과
가난한 민중에 대한 사랑의 눈을. - 김남주 시 '녹두장군' 전문 내가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선생님한테서가 아니라 일자무식인 우리 할아버지에게서였다. "새야 새야" 노래를 가르쳐주신 것도.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까. "서너 마지기 논배미로 평생을 살았던 가난한 농부였"던 우리 할아버지에게도 녹두장군은 평생 가슴 속에 간직했던 영웅이었던가. 육신은 땅에 묻힌 지 오래지만 민중의 가슴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