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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가와 외가가 모두 경주라 나는 1년에 두 번 쯤은 경주를 방문한다. 그러나 올 추석에는 마침 일본 교토에서 학회가 있어 올해만큼은 ‘일본의 경주’에서 추석을 쇠게 되었다. 일본에 몇 차례 다녀간 적은 있지만 교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간사이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교토역에 처음 내렸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훌륭하고 깨끗한 역사였다. 잠깐 스쳐 지나갔기 때문에 구석들이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경주역은 확실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경주역은 내가 코흘리개 때부터 드나들었던 역이다. 그런데 근 30년이 지나도록 내 기억 속의 경주역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가 않다.

 
교토와 경주의 차이점

오래될수록 좋은 것도 많다지만, 무엇보다 경주역 화장실만큼은 개선이 시급하다고 매번 느끼곤 했다. 최근들어 기차 역사마다 화장실 개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하지만 얼마나 개선됐을지는 미지수다.  기차역과 버스 터미널은 관광객들에게 첫인상을 남기게 마련인데 이 점에서 경주는 분명히 개선이 필요하다.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과 시외버스 터미널 또한 시설이 낙후되기는 마찬가지다. 친가와 외가가 있는 나도 이용하기 싫은데 외국인들에게는 어떨까 차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수많은 관광객들이다. 구체적인 숫자를 인터넷으로 뒤져봤더니 2005년 교토시의 관광객이 무려 470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경주는 98년 약 900만 명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서 지금은 정체기에 있다. 물론 이렇게 단순 비교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국가적인 인지도가 우선 근본적으로 다르고 일본 전체의 인구 또한 남한의 세배가량 되니 말이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 유물의 밀집도와 수준 등은 경주가 월등히 앞선다는 점에서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다.

세 번째로 놀란 것은 수많은 유적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교토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금각사만 하더라도 나는 왜 이것이 세계문화유산인지 솔직히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본이라는 국가브랜드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경주는 최근 5개 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니 이 점에서만큼은 오히려 교토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면에서 일본을 굳이 이겨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교토와 비교해서 더 오래된 역사와 더 많고 더 훌륭한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경주가 왜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하지 않았는지가 갑자기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우선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음에도 아직 안 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 숙박시설, 관광안내 등 흔히 기본적인 관광인프라라고 부르는 것들이 그것이다. 경부고속철도가 원래 노선을 바꿔 경주를 경유하게 된 것이 우리 고향의 높으신 분들이 힘깨나 쓴 덕분이라는데 그 명분이 ‘경주는 한국제일의 관광도시’였다는 말을 듣고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낙후된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에는 평소에 전혀 관심도 없던 분들이 느닷없이 ‘관광경주’를 외치는 모양새가 그리 미더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말 그대로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할 것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어지간한 관광도시에는 그 정도 기본인프라는 구축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그마저도 안 해서 문제이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그게 뭘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국가브랜드가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왔고 또 실제로 그 힘을 느끼고 있다. 국가브랜드는 세계시장에서 자국의 상품 경쟁력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관광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나처럼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 또한 유형무형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절감하는 형편이다. 그래서 태어난 것이 ‘다이나믹 코리아’였다.

 

최근에는 이와 연동시켜서 관광한국을 알리기 위해 ‘스파클링 코리아’라는 슬로건도 생겨났다. 호주하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프랑스 하면 에펠탑 등등 한 나라의 이미지가 하나로 축약된 대표적인 아이콘은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하면서도 오래가는 인상을 남긴다.

그런데, 스파클링 코리아를 보면 가수 비나 비보이 등만 기억에 남을 뿐 "그래서, 뭐?"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미국이든 영국이든 일본이든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야 어떤 형태로든 다들 역사적으로 세계를 한번씩 휘젓고 다닌 나라들이라 그런 나라들의 인지도는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알리는 방식은 그들과는 달라야만 한다. ‘스파클링 코리아’에는 바로 이 점이 빠져 있다.

 

철학이 빠져 있는 관광정책

 

우리의 관광정책에는 이 철학이 빠져 있다. 철학이라고 해서 아주 추상적이거나 엄청나게 고지식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한국이 자랑할만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만 더 세련되게 찾아보면 된다. 그 자랑거리라고 하는 것은 예컨대 훌륭한 건축이나 조각이나 미술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5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어떻게 인류공영에 이바지해 왔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 왔는가, 바로 이것이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진정한 자랑거리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인류최고의 기록문화”를 남긴 것이라고 대답할 작정이다. 그 정점에 한글이 있음은 물론이다. 기록문화에 관한 한, 우리는 ‘세계 최초’를 몇 개씩이나 보유하고 있다. 다라니경이 그러하고 직지심경이 그러하고 한글이 그러하다. 혹자는 ‘변태스럽기까지 하다’고도 하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직지심경과 함께 2001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승정원 일기', 직지심경처럼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 의궤, 팔만대장경 등등 가히 독보적인 유산들이 즐비하게 널려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스파클링 코리아’ 대신 우리의 유구한 기록문화의 역사를 한국관광의 테마로 전면에 내세운다면, 이미 언급한 것들만으로도 경복궁과 강화도와 청주와 불국사와 해인사가 연결된다. 여기에 남도의 창(唱)이라고 하는 무형의 기록문화를 더하면 조선팔도 전체가 하나의 테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관광철학을 세우는 것은 남아있는 유적들에 새로운 ‘스토리’를 입히는 과정이다. 이 스토리야말로 아무 연관 없이 흩어져 있던 과거의 유적들을 깨워 오늘에 살아 함께 유기적으로 숨쉬게 만드는 영혼이다.

 

‘교토에 금각사·은각사가 있다면 경주에는 불국사가 있다’는 식으로는 경주가 교토를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겐 일본에서는 찾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을 앞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있고 독일의 구텐베르크를 앞서는 직지심경이 있고, 그리고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한글이 있다.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이고 이태리가 패션의 나라라면 한국은 ‘한글의 나라’이다. 한국이 만든 최고의 상품은 역시 한글이다. 한국과 직결되는 브랜드 역시 한글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한국=한글과 기록문화’로 충분히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 유구한 기록문화의 역사가 그저 개인의 취미나 안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린 백성이’ ‘수비 니겨 날로 쑤메 편안키 하고져’ 하는 숭고한 뜻을 면면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은 유엔차원에서 문자가 없는 언어권에 보급하고 있는 문자다. 세종대왕의 창제이념이 아직까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 일본 교토에서 한국의 관광정책을 되돌아보며, 어리석은 우리 후손들이 조상님의 그 위대한 정신을 좀먹고 있지는 않은지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다가오는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태그:#교토, #경주, #관광, #스파클링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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