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토피카의 캔자스 주의사당
 토피카의 캔자스 주의사당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월요일 아침 8시 반. 캔자스(Kansas) 주의 주도 토피카(Topeka). 주도라고는 하지만 작은 시골 마을이다. 주의사당을 비롯한 관공서들이 모여 있는 다운타운이고 게다가 월요일 아침 출근시간인데도 어찌나 고요하고 한적하던지, 우리 가족을 제외한 사람은 딱 다섯 명쯤 본 것 같다. 더구나 그 중 두 명은 주의사당의 안내원.

주의사당 앞 대로변에 동전 주차기들이 나란히 서 있다.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아 아주 수월하게 좋은 자리를 잡았다. 1시간에 70센트. 여행 내내 무수히 많은 도시에서 무수히 많은 동전 주차를 했지만, 이처럼 저렴한 주차는 이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낯선 도시의 이른 아침 거리는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특별한 느낌을 준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작은 선물 중 하나다. 관광지로 이름난 도시라면야 아침이든 저녁이든 항상 사람들이 북적대게 마련이고, 잠시 들른 이방인들끼리 모여 만들어 내는 들뜬 설렘으로 구석구석 들썩이게 마련이다. 그 또한 여행의 맛이기도 한데, 오늘처럼, 뭔가를 즐겨보겠다고 이 도시를 들를 만한 사람이 웬만해서는 없을 이런 작고 조용한 도시일 경우, 그 아침 거리를 거니는 느낌은 특별히 더 매력적이다.

아무도 없는 곳, 나와 관련된 거라곤 단 하나도 없는 그런 곳, 빌딩들이 서 있고 사람들이 있고 자동차들이 지나다니고, 다들 어디론가 가고 뭔가를 하고 있지만, 내가 속한 곳은 단 한 구석도 없는 그런 곳. 해야 할 일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고, 그저 이렇게 거닐다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인 그런 곳. 그들에겐 ‘일상’이고 내겐 ‘일탈’인 곳.

도대체 이 링컨 아저씨는 미국 땅 가는 곳마다 없는 곳이 없네

출근길인 듯한, 정장 차림의 남자 여자 몇몇이 지나가는 걸 구경하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주의사당 마당으로 들어갔다. 넓은 잔디밭 한복판에 링컨이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턱을 괴고 앉아 있다. 도대체 이 링컨 아저씨는 미국 땅 가는 곳마다 없는 곳 없이 아무데나 이렇게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바람에 때마다 특별한 연관성을 찾아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다. 하긴 미국땅 전체가 어찌 그와 관련이 없을 수 있겠는가마는.

주의사당으로 들어가 볼 요량으로 계단을 올랐지만 문이 잠겨있다. 이상하다. 분명히 일반인에게 개방을 하고 가이드 투어까지 한다고 했는데…. 때마침 안내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지나가기에 “Excuse me~”하고 불렀더니만 질문이 나가기도 전에 바로 뒤쪽의 다른 입구를 알려 준다. 이 동네에서 나올만한 질문은 그것 말고는 전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고맙다는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괜찮다는 말까지 날리고 지나가는 그이를 보고 있자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제대로 다시 찾은 입구로 들어가니 제복 입은 검문요원과 함께 검문대도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다. 하지만 검문은 생략. 우리가 특별히 별탈 없어 보여서가 아니라 의례 그래 왔던 것처럼 당연해 보인다. 입구 유리문엔 권총소지 금지 표지가 무시무시하게 나붙어 있는데 아무래도 여기 권총까지 들고 들어올 만한 사람은 정말 없어 보인다.

올려다 본 돔의 모습
 올려다 본 돔의 모습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안에서 올려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돔이 제법 멋지다. 적어도 다음날, 덴버에서 콜로라도 주의사당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돔 전체가 황금을 뒤집어쓰고 있는 의기양양한 콜로라도 주의사당의 돔을 보고 난 뒤에는, 이곳 토피카의 캔자스 주의사당은 착하고 다소곳하기가 이를 데 없는 시골 처녀의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원형 모양을 한 중앙 홀에는 몇 가지 전시물들이 둘러 진열되어 있는데 그 중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Brown v. Board 50th Anniversary’라는 제목의 전시물이 눈에 들어온다.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에 관한 당시 보도 자료들이다.

흑인과 백인이 다른 식당, 다른 화장실 써야 했던 시기가 겨우 50년 전이라니...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에 관한 전시 자료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에 관한 전시 자료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1950년대 초 미국은 학교, 병원, 공원, 교통수단 등 공공시설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이 당연하던 때였다. ‘분리는 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한 시설물을 이용하게만 한다면 그건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교육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교육구 내의 모든 학교가 평등한 조건으로 운영되도록 정해져 있다고는 하나, 흑인은 백인과 같은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던 것.

당시 이곳 캔자스의 토피카에 린다 브라운이라는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살고 있었다. 이 흑인 여자 아이는 자기 집에서 7블록 거리에 있는 가까운 초등학교를 놔두고 위험한 철길까지 건너가며 1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흑인들이 다니는 학교를 걸어다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백인들이 다니던 학교로 옮기려고 시도했으나 교장이 거절한다.

이 사건은 결국 연방 대법원에까지 올라가게 되고, 1954년 대법원이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누르고 브라운 측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3년 만에 마무리되게 된다. 아무리 평등한 환경과 시설을 누리게 한다 해도,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평등이며 따라서 ‘법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을 위반한 처사라는 것이다.

‘브라운 판결’은 공교육 부문에만 한정된 것이어서, 학교 이외의 공공장소나 공공시설의 인종분리주의까지 폐지시키지는 못했지만, 인종차별 철폐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기념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남부 아칸소 주의 리틀락에 거주하는 흑인 고교생 9명의 등교를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대를 출동시켰던 역사적인 사건도 이 브라운 판결 직후인 1957년의 일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던 시기가 바로 얼마 전인 경우가 참 많다. 흑인과 백인이 다른 식당을 가고 다른 화장실을 써야 했던 시기가 겨우 50년 전이라니…. 역으로, 지금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 중 몇십 년, 아니 단 몇 년 지난 후에라도 낡은 관념으로 치부되어 버릴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주지사 집무실로 들어가는 관람객
 주지사 집무실로 들어가는 관람객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주의사당 내의 도서관.
 주의사당 내의 도서관.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착한 안내원의 열변에도 허름한 벽면들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착하게 생긴 청년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주의사당 투어 가이드란다. 그는 공손한 인사와 자기소개를 마친 후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자세하고 성실한 설명을 늘어 놓기 시작한다. 일행은 우리 말고 미주리 주에서 왔다는, 친구로 보이는 중년 여성 둘이 더 있다.

1층부터 시작해 돔 쪽으로 올라가며 투어를 시작한다. 주지사 집무실을 비롯해 도서관, 주의원실 등 각 방마다 자리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지키는 이들이 있는데 가만 보니 모두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이다. 미국이야 워낙 노인들의 자원봉사 문화가 발달한 곳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긴 하다.

관광객이라고는 달랑 우리 가족과 미주리에서 온 여자 둘 뿐인데 어찌나 성실하게 설명을 하는지 딴 짓도 못하겠다. 캔자스 출신 화가의 벽화와 캔자스 출신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동상 등을 보여줄 땐 특히 목소리에 힘을 싣는 듯하다. 캔자스는 주지사와 대법원장이 모두 여자란다.

주지사 집무실을 견학할 때는 구석구석 놓여 있는 가구들마다 유서 깊은 역사를 설명하는데, 착한 안내원의 열변에도 곳곳에 벗겨진 페인트 사이로 보이는 허름한 벽면들만 괜스레 자꾸 신경이 쓰였다. 유난히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 캔자스 토피카에서 만난 유일한 청년, 이른 아침 수줍은 얼굴로 조근조근 열심히 설명하며 우리를 안내하던 착한 청년의 모습이 다소 애처롭다는 느낌이 든 건 왜일까.

인터스테이트 70 서쪽 방향, 우리가 가야 할 길.
 인터스테이트 70 서쪽 방향, 우리가 가야 할 길.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조촐한 투어를 마치고 주의사당을 나왔다. 돔 위에 올라가 토피카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코스가 남아 있긴 했지만, 미국 여행 중엔 ‘올라가서 내려다보기’ 코스가 하도 많아 이 정도 높이의 돔은 별로 끌리지 않았고, 1시간이나 더 기다려 그 위를 올라가 특별히 내려다볼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지 않기도 했고, 무엇보다 갈 길이 바빴다.

다시 I 70 West로 올라선다. 인터스테이트 70번을 타기 시작한 게 벌써 3일째다. 이제 530마일만(?) 더 달리면 캔자스 주를 가로질러 콜로라도 덴버에 닿는다. 도무지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대평원을 가로질러….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대평원을 가로질러...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대평원을 가로질러...
ⓒ 김윤주

관련사진보기



태그:#미국횡단, #캔자스, #토피카, #주의사당, #미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