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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 연 조그마한 도서관


서울 군자역 둘레에 ‘어린이책 도서관’ 한 곳이 새로 열었습니다. 동네 건물에 깃든 조그마한 교회 한쪽 벽을 책꽂이로 꾸민 도서관입니다. 도서관 문을 여신 분은, 처음에는 여느 아이 어머니였으나, 아이한테 읽힐 책을 좀더 깊이 마음써서 살펴 나갔고, 나중에는 어린이문학도 해 보았으며, 이제는 이렇게 ‘자기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이들도 즐겁게 찾아와서 책하고 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에까지 땀을 쏟습니다.

 

교회 한쪽 벽을 채운 책인 만큼,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저절로 책이 가득 꽂힌 벽을 바라보게 될 테고, 널찍한 책꽂이를 보면서 책과 좀더 가까워지는 한편, 둘레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손을 잡고 이곳으로 찾아올 수 있겠지요.

 

이 도서관을 연 분이 저한테도 초청장을 보내 주어서 나들이를 나옵니다. 먼저, 도서관에서 가까운 중곡동 <가자헌책방>에 들러서 책을 구경하기로 합니다.

 


<2> 어째서 일본사람이


끌고 온 자전거는 책방 앞 길가에 세워 놓습니다. 가방을 풀고 사진기를 꺼냅니다. 도서관 여는 잔치 시간을 헤아리며 골마루를 슬금슬금 걷습니다. <항일투쟁반세기>(김양 주편, 료녕민족출판사,1995)라는 책이 눈에 뜨입니다. 중국 조선족이 펴낸 ‘항일투쟁’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들 이야기를 담았는가 차례를 죽 훑습니다.


― 의병장령 류인석 / 60년을 항일구국투쟁에 몸바쳐 싸운 윤희순 / 홍범도 장군 / 불굴의 의병장령 전덕원 / 굴할 줄 모르는 항일녀투사 남자현 / 걸출한 애국자 김구 / 항일의병장 리진룡과 그의 부인 우씨 /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 황병길과 그 일가 / 반일운동에 투신한 신규식 / 탁월한 반일애국작가 신채호 / 청산리대첩에서 위훈 떨친 김좌진 장군 / 혹뿔령감 리상관 / 항일명장 량세봉 / …… / 걸출한 리론가 김규광 / 저명한 반일운동조직자 김원봉 / 조선족의 첫 녀공산당원 리추악 / 사냥군 출신 장명도 사령/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 장군/ 일편단심 항일녀투사 리화림 / ……


우리들 남녘사람한테는 낯선 이름이 많이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여성 독립운동가’가 많이 나와요. 그러고 보니, 지금 남녘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립운동가 이야기책’은 몇몇 사람한테만 너무 기울어져 있지 싶어요. 몇몇 사람만 영웅으로 떠받들고, 그 사람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 얼과 넋은 거의 묻혀 버렸지 싶어요. 한두 사람 힘으로 이루어진 독립이 아니요, 남자들만 일어선 운동이 아니었을 텐데, 우리들이 떠올릴 수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류관순 누나(언니)’ 한 사람 아닌가요.

 

<한국사입문>(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이현무 옮김, 백산서당,1985)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일본사람이 쓴 ‘한국사 입문’이라니, 그것도 우리 나라 인문사회과학 출판사에서 기꺼이 옮겨서 낸 책이고. 어떤 책일까 궁금합니다.


... 일본은 이 시점에서도 구미열강에게는 아부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존속하도록 했다. 또한 식민지 하의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합병’이라는 애매한 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변함이 없었다. 이 사이에 일본 국민의 대다수는 지배자의 오만함에 완전히 물들어 버려, 일본이 세계의 1등국이 되었다고 해서 축하행렬을 벌이고, 나라를 잃어 비탄에 잠긴 한국인을 노골적으로 모멸하는 상태에 있었다 … 가장 뛰어난 사상성을 표출했기 때문에 민중으로부터 폭력적으로 격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시가와 다꾸보꾸와 같은 국가질서에서 소외당한 저변으로부터의 냉철한 비판(하이쿠 : 지도 위, 한국을 까맣게 먹칠하면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는다)은 그 당시에는 표면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  〈117쪽〉


글쓴이 가지무라 히데키 님은 한국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일본에서 지내면서 ‘일본말로 옮겨진 한국 역사책’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국사 이야기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정치를 다루는 이야기책 가운데에는 ‘일본사람이 쓴 책을 한국말로 옮긴 판’이 제법 많습니다.

 

어째서 이럴까.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한국사람이 쓴 ‘일본 역사 이야기’라든지 ‘일본 사회 파헤치기’가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출판사에서 옮겨서 펴낼 만하단 말인가? 우리 옛시를 파헤친 첫사람도 일본사람이며, 우리네 보통사람들 살림살이와 문화를 처음으로 깨닫고 다룬 사람도 일본사람입니다. 대학교까지 나오지 않은 여느 사람들이 손쉽게 살펴보며 생각할 수 있는 ‘한국 역사 이야기책’도 일본사람 손으로 이루어져야 할까요.

 

문득, 요즘 쏟아지는 번역 어린이책 가운데 절반쯤은, 또는 1/3 남짓은 일본책임이 떠오릅니다. 생태와 자연과 환경 이야기를 다룬 책은 거의 일본책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와 일본 자연 삶터가 비슷하다는 대목이 크게 영향을 끼치겠지만, 좀 너무하다 싶을 만큼 일본책이 번역됩니다. 한국사람이 창작한 자연 생태 이야기책도 ‘일본 자료와 사진’에 많이 기댑니다. 아는 사람은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가운데, 지금 우리네 문화며 사회며 교육이며 책이며, 온통 일본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을까요.

 


<3> 하나에서 둘로 나아가기란


<한 사상가의 탄생>(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효상 옮김, 삼성출판사)이라는 책을 구경하다가 <영한사전 비판>(이재호, 궁리,2005)이 눈에 띄어서 집어듭니다. 처음 나왔을 때 숱한 언론매체 눈길을 받았던 책입니다. 그때는 미처 살피지 못하고, 이제 와서 뒤늦게 살핍니다. 뭐, 이 책이 훌륭하다면, 나온 지 이태가 지난 이제 와서 읽더라도 마음을 움직이겠지요.


... 사전 편찬에 투자한 돈은 사라지지 않고 엄청난 문화유산으로 탈바꿈하여 오래도록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 <9쪽>


차근차근 돌아보노라면, 우리 사회에서는 ‘돈을 투자’하는 일이 없습니다. ‘더 많은 돈을 뽑을 생각’만 할 뿐입니다. 문화 정책이 아닌 문화 ‘사업’을 하는 우리들입니다. 교육 운동이 아닌 교육 ‘사업’을 합니다. 찻길을 닦는 일부터, 동네를 재개발한다는 일까지, 그 어느 일이 돈벌기나 돈굴리기 아닌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오순도순 어울려 조촐하게 자기 문화를 가꾸어 지낼 수 있는 일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 영한사전의 가장 큰 결함을 꼽으라면 번역어에 순수한 우리 말이 많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1890년에 출간된 최초의 영한사전을 외국인(미국인)이 편찬했고, 해방 이후에도 언제나 일본에서 나온 사전을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21쪽>


‘순수한 우리 말’이 많이 빠졌다는 대목은 옳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우리 말’이라기보다는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며 쓰는 여느 입말’이라고 해야 좀더 올바릅니다. 누구나 흔히 쓰는 말, 학문과 지식이 없이 살아가는 여느 일꾼들 말, 어린아이들부터 늙은이까지 두루 주고받는 말이 ‘영한사전과 국어사전 모두에 제대로 안 실렸’습니다. 그러면서 늘 뇌까리는 이야기가 있지요.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한자말이 54%라느니 70%가 넘느니.

 


... 영한사전 편찬의 역사는, 일본 <영화사전(英和辭典)> 편찬의 역사와 비교해 보면, 전문분야 협력자들의 참여가 거의 없는 외면당한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한사전을 찾다가 미흡하다고 느끼는 점은 문맥에 맞는 적절한 번역어를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 <36쪽>


우리들 생활말이 빠진 사전인 한편으로, 전문 학자들 손길이 제대로 닿지 못하는 사전.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사전으로 여태껏 우리 말 공부며 미국말 공부며…… 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


... 서양 외국어사전 편찬의 필요성은 우리가 서양을 알아야 할 필요성에 연유했다기보다는 서양인이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그들이 그러한 사전을 더욱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 <209쪽>


따지고 보면, 국어사전이나 영한사전이나 일한사전 같은 책들은, 나라에서 뒷배를 해서 제대로 엮어내도록 애써야 합니다. 나랏돈으로, 아니 우리들이 낸 세금으로 만들어야지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들한테 영향을 끼치는 일이며, 우리 삶인 걸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말 배우는 한국사람들은 미국말을 가장 올바르고 깨끗하고 또렷하게 익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밑바탕은, 개인 힘으로 이룰 수 없어요.


... 한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글로만 적힌 단어를 읽고 이런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한국어 단어들은 한자(漢字) 두 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고 동음이의어도 자주 생겨난다. 그래서 한글로 표기하면 무슨 뜻인지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91쪽>


<영한사전 비판>을 읽으며 몇 가지 아쉬운 대목을 봅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우리 말 빛깔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글쓴이 생각. “한국어 단어들은 한자 두 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지식인들이 이런 한자말을 즐겨쓸 뿐입니다. “우리 토박이말도 두 글자짜리가 가장 많”아요. 다음으로 세 글자짜리 토박이말이 많습니다. 다음으로 네 글자, 다음으로 한 글자. 이런 우리 말 빛깔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이 나라 영어 교육과 정책이 엉터리로 되어 있음을 밝혀내고 비판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속깊은 대목에서는 엇나갈 수 있습니다. 저으기 걱정스러워요. “한글로 표기하면 무슨 뜻인지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이 탓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잘못을 뿌리뽑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4> 욕심과 책읽기


책을 보면 욕심이 자꾸 생깁니다. 이 책도 살피고 싶고 저 책도 둘러보고 싶습니다. 저한테 주어진 시간은 딱 어느 만큼만이기 때문에, 눈길이 가는 책과 손길이 닿는 책은 많아도 모두모두 읽어낼 수는 없어요. 어쩌면, 제 깜냥대로 이 책 저 책 살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하지는 않으니까요. 우리가 스치거나 만나는 책을 손에 쥘 때에는, 우리한테 마음에 와닿는 대목을 받아들이면 되기도 하니까요.

 

우리 눈에 비치는 모습을 모두 머리에 담을 수 없고,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을 모두 사진으로 담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골라서 담고 우리 나름대로 추려서 찍습니다. 사랑스런 사람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토씨 하나까지 다 새겨 놓지 못하잖아요. 알맹이만 새기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책을 다 살 까닭이 없는 한편으로, 모든 책을 속속들이 다 읽을 까닭이 없고, 모든 책을 어떤 주어진 틀에 따라서 읽어내고 나서 ‘느낌글(독후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더 구경하고픈 책이 있었으나, ‘참자. 내 주머니를 생각하자’고 생각하며 눈을 감습니다. 더 보면 더 사고 싶으니 그만 보자고 다짐합니다. 책값을 셈합니다. 고른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가자헌책방> 아저씨한테 꾸벅 절을 하고 자전거에 오릅니다.

 

덧붙이는 글 |  - 중곡동 〈가자헌책방〉 /  02) 456-6002 . 019-592-6002
 http://gajagajabook.co.kr


태그:#헌책방, #가자헌책방, #서울, #중곡동, #가지무라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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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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