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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120박스를 팔고 두 달 가까이 과외를 해선 번 돈으로 이번 학기 등록금을 냈습니다.
 고추 120박스를 팔고 두 달 가까이 과외를 해선 번 돈으로 이번 학기 등록금을 냈습니다.
ⓒ 최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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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오전 수업이 없는 대학생에겐 '이른 새벽'처럼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잠을 깨우는 멜로디에 알람소리인 줄 알고 몇 차례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습니다. 울리고 또 울리고… 알고 보니 아빠의 전화였습니다.

"등록금 오늘(19일)까지 내야 한다고 했지? 어제 오후에 보냈으니까 확인해보고 일찍 갔다 내."
"얼마 보냈어요?"
"300만원. 너 모아놓은 돈 있지?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 해"
"네? 제가요? 아, 아빠…."
"잊어버리지 말고, 학교가자마자 내.(뚝)"


오늘이 등록금 납부기간 마지막 날입니다. 아빠는 등록금을 늦게 내서 행여 학교를 못다니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아침 일찍 전화를 거셨나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돈'을 내겠다는데 조금 늦었다고 해서 학교가 마다하겠습니까? 마지막 날 내는 게 처음있는 일도 아니고요.

그건 그렇고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 해" 하셨으니, 아르바이트 하면서 벌어 놓은 '많지 않은' 돈을 꺼내쓰게 생겼습니다. 새벽부터 마음이 무겁습니다.

"인턴 하느라 과외를 하나밖에 못 했어요"

지금까지 총 여섯 번 등록금을 냈습니다. 2004년 입학할 당시 320만원이었던 등록금이 지금은 340만원이 넘습니다. 정확하게 342만1000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학교에서 등록금을 가장 적게 내는 학생축에 속합니다. 학교 총장이 "등록금을 더 많이 내야 ○○대를 이기는 것이다"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참, 기막히고 허탈할 뿐입니다.

그동안 매학기 많게는 200만원, 적게는 150만원씩 모아서 등록금에 보탰습니다. 그 정도 돈을 모으려면 학기 중에 과외를 두 개 정도 해야 합니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고3 겨울방학부터 대학 4학년이 된 지금까지 과외를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 얘길 들으면 '학생들 가르치는게 적성에 맞나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휴, 이번 달까지만 한다. 도저히 못 해 먹겠다.'
'공부 안 할거면, 과외는 왜 하는거야?'


과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짐하기만 수십 번. 비싼 과외비를 내고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범대에 다니는 제가 과외를 하면서 교사를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히게 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지난 6월 두 개 하던 과외를 하나로 줄였습니다. 학생을 공부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60일 동안 <오마이뉴스> 인턴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얼마를 보태려나' 바라진 않으셔도 내심 기대는 하고 계셨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나… 방학 때 돈을 벌지 못했으니까요. 오마이뉴스 인턴은 기회비용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그건 '내 사정'입니다. 부모님 사정은 다르지요.

등록금 700만원은 고추 280박스

영수증. 이것으로 7학기 등록을 마쳤습니다. 이제 한 번 남았습니다.
 영수증. 이것으로 7학기 등록을 마쳤습니다. 이제 한 번 남았습니다.
ⓒ 최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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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고추농사를 지으신지 올해가 횟수로 5년 째입니다. 농사를 오래 짓지는 않으셨지만 고추농사 하나는 '1등'이라고 동네에 정평이 나있습니다.

엄마는 별 말이 없으시지만 아빠는 입버릇처럼 "고추농사 올해가 끝이야" 하십니다. 키가 큰 아빠에게는 쪼그려 앉아서 고추를 따는 일이 '중노동'이었던 것입니다.

엄마: "니 아빠 맨날 하는 소리다"
아빠: "진짜야, 이젠 안 해. 내년에는 호박 한 번 심어볼까"


그런 지 벌써 5년째라는 겁니다. '과외 더이상 못 해 먹겠다'고 하면서도 과외를 할 수밖에 없는 저와 매우 비슷합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씩만 하는 과외를 고추농사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적당히 자란 고추를 따는 일이 고추농사의 전부가 아닙니다. 고추를 시장에 내보내려면 낮에는 따고 밤에는 포장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아빠는 '고추를 잘 담아야 좋은 값을 받는다'는 주의이고, 엄마는 '고추가 좋아야지 담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주의입니다. 저는 그 사이에서 난처할 때가 많습니다.

보통 하루 작업량은 15박스입니다. 1박스 당 매겨지는 값는 그때그때 다릅니다. 고추가 조금 좋은 날은 3만원, 뚱뚱하고 짧은 고추가 많은 날은 2만원 정도. 시장에 나오는 전체 고추량에 따라 값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평균 2만 5천 정도라 생각하면 될 겁니다.

이렇게 여름내내 고추를 판 돈으로 저의 두 학기 등록금을 내주시는 겁니다. 약 700만원에 해당하는 1년치 등록금을 내기 위해 부모님은 고추 280박스를 팔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번 학기 등록금에 200만원을 보탰다면 부모님은 고추 80박스를 아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가서 일할테니 등록금 내주세요"

여름방학, 오마이뉴스 인턴을 마치고 나니 개강까지 3주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부모님은 인턴이 끝나는 날 바로 전화를 해서 "집에 와서 쉬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빠의 '좀 쉬었다가라'는 말은 '일 좀 도와라'는 말과 같습니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를 못 했으니 집에 가서 일이라도 도와드려야 겠다'

집에 내려간 날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올해 처음 새로운 모종을 심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연 고추모종이 허리 높이까지 자라서 축축 처져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키가 자라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저 지경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고추를 따는 일은 작년에 비해 두 배로 힘들어 졌습니다.

"쉬었다 가라고 하더니, 딸래미 잡겠네."

엄마가 혀를 찰 정도로 3주 동안 정말 '빡세게' 일을 했습니다. 대신 제가 딴 고추를 시장에 보내서 받은 돈은 모두 등록금으로 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일주일 중 5일은 집에서 일을 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서울에 올라와 과외를 했습니다. 다행히 학생과 시간이 맞아 두 가지 일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과 강원도를 일주일 간격으로 왔다 갔다 하니, 나중에는 또 다시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추 딴 만큼 등록금을 내주겠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딱 일주일만 그렇게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등록금 '내는' 일은 점점 쉬워지고 있는데 '버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등록금 '내는' 일은 점점 쉬워지고 있는데 '버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최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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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금 '내기는' 쉬워졌지만...

아빠는 등록금 납부기한이 끝나기 하루 전날, 약속대로 300만원을 제 계좌로 보내셨습니다. 고추 120박스를 팔아야 생길 수 있는 돈입니다. 부모님은 120박스를 따기 위해 수 천 번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셨을 거고, 장갑 낀 손으로 이마가 빨개지도록 땀을 닦아내셨을 겁니다. 그 돈을 찾아서 가방에 잘 챙겨 넣고 등록금 고지서를 출력하러 갔습니다.

"학생은 등록금 전부 다 내네? 장학금 못 받았나봐?"
"네, 그게 어디 쉽나요…."
"에이, 인쇄비 50원 받아야 하는데 학생은 그냥 가."


아. 등록금 고지서에 손을 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50원 받아도 좋으니 그 말씀을 안하셨으면 좋았을 것을. 터벅터벅 학교를 가로질러 은행으로 갔습니다. 이번 학기 수강하는 6과목 값을 치르러 가는 셈입니다. 300만원에 내 돈 42만1000원을 보태서 창구로 갔습니다. 절반으로 줄어든 통장의 잔고를 보니 허무하고 허탈했습니다.

"어머, 이렇게 현금으로 안뽑아 오셔도 되는데…."
"일부러 뽑았어요. 얼마나 많은 돈인지 보고 싶어서."

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그 많은 돈을 은행원은 기계처럼 잘도 세더군요. 그 돈이 부모님이 고추 120박스를 팔고, 내가 두 달 가까이 과외를 하는데 들어간 노동의 대가라는 것을 알 리가 없지요.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요.

은행을 나서자 '등록금은 인터넷 뱅킹, 폰 뱅킹, 현금입출금기에서도 납부 가능'이라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등록금 '내기는' 날로 쉬워지는데, '벌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2월 27일 오전 서울 행당동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에서 열린 입학식장에서 총학생회측 학생들이 높은 등록금에 항의하며 '등록금 비싸요'를 적은 대형 천을 들고 있다.(기사 내용과는 관련없습니다.)
 지난 2월 27일 오전 서울 행당동 한양대 올림픽체육관에서 열린 입학식장에서 총학생회측 학생들이 높은 등록금에 항의하며 '등록금 비싸요'를 적은 대형 천을 들고 있다.(기사 내용과는 관련없습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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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등록금 , #과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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