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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지식은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방향타 구실을 한다. 우리를 세상의 길에서 쓸데없이 헤매지 않게 한다. 그렇다면 지식을 늘리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인가?

 

어쩌면 지식이 가진 함정은 알면 알수록 피곤해진다는 데 있는지 모른다. 세상엔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을 뻔한 일이 얼마나 많으며, 알지 못해도 사는 데 하등 지장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지식의 통로가 되어준 책은 '읽는 즐거움'과 '아는 괴로움'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엔 눈만 뜨면 TV나 인터넷, 라디오 등 각종 미디어가 앞다투어 코앞에다 '앵기는' 지식이 얼마나 많은 시대인가. 

 

너무나 많은 지식이 도리어 사람을 메마르게 한다는 건 일종의 난센스다. 그래도 책은 사람이 생을 사는 데 필요악 같은 것이라면 어떤 책을 골라 읽어야 할까. 나는 현란한 지식으로 가득한 책보다는 읽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책, 죽어 있는 감성을 두들겨 깨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을 선호한다. 지금 나는 사람 냄새가 그리운 시절을 지나가고 있는 셈이다.

 

사진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며칠 전에 읽은 <이 한 장의 사진(샘터 출판사)>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 속에서 이호철·박완서·이청준  등 우리 시대의 문인 스물아홉 명이 서랍 깊숙이 넣어둔 사진첩 갈피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거기에 담긴 추억을 소곤소곤 들려준다. 그 가운데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추억도 있고 덩달아 가슴이 환해지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빛바랜 사진이지 그들의 글이 아니다. 사진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으니 글은 어디까지나 사족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책은 '그리운 유년, 그리고 학창시절,' '성장의 고통, 그리고 나의 가족,' '내 곁에 왔던 사람과 풍경들' 등 3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첫 번째 장에서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은 사람은 공선옥·김별아·안도현·윤대녕·윤후명·이만교·이혜경·정길연·채호기·하성란 등이다. 

 

맨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소설가 공선옥이다. 그가 꺼낸 사진은 농토가 없어 객지를 전전하던 아버지가 1969년 청계천 복개공사에서 일해 번 돈으로 사준 반코트를 입고 찍은 사진이다.

 

그는 "아버지가 돈 많이 벌어 언젠가 웃음 웃고 살 그 날을 기다리며 사진 속에서처럼 그렇게 1969년의 겨울을 견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그 시절을 추억한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결국 견디는 것인가,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이라고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글을 맺는다.

 

김별아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안도현 시인이다. 그의 글 첫머리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건 그의 누드. 고추를 덜렁 드러낸 채로 세 발 자전거를 탄 아이의 사진이다.

 

"어머니는 내 동생이 결혼을 하기 전에 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야 괜찮겠지만 나중에 니 제수될 사람이 보면 뭐라 카겠노? 어디에따가 잘 놔둬라. 잘 놓아두라는 말은 보관을 잘 하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사진첩 속에 그대로 붙여놓지 말고 제수씨 눈에 띄지 않게 딴 곳에다 치워두라는 말이라는 것을." -30쪽

 

소설가 윤후명이 간직한 사진은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석굴암 앞에 서 있는 사진이다.

 

5·16 쿠데타 이후 혁명검찰부 검사로 쿠데타 세력의 주구가 된 그의 아버지는 결국 토사구팽으로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통한 속에서 생을 마친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법을 공부할 것을 요구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문학이라는 병을 앓았다. 이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는 종종 끝간 데 모를 회한에 사로잡히기도 하리라.

 

이 밖에도 윤대녕은 삼류극장가와 '독일 빵집'에서 죽치던 기억을, 하성란은 유독 선명하게 기억나는 초등학교 입학식날 사진을 보여준다.

 

성장의 고통, 그리고 나의 가족

 

두 번째 장에서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놓은 사람은 박범신·박완서·박철·박형준·신현림·오수연·이명랑·조은·최인호 등이다.

 

박범신의 사진은 그가 중학생 때부터 살았던 강경집의 수돗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의 그는 반팔 셔츠의 단추를 푼 20대 중반의 모습이다. 어머니 아버지와 누님 둘과 함께였다. 그는 이 사진을 근거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펼쳐 나간다. 누님들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등등.

 

"키는 좀 작지만 깎은 밤처럼 단단하고 날렵해 뵈는 셋째매형의 낭랑한 목소리도 환히 들린다. 그런데 큰누님과 둘째누님은 어디 있을까. 유복자까지 포함해 어린 것 셋을 혼자 길러낸 둘째누님은 서울에서 내려오지 못한 게 틀림없다. 큰누님도 사는 게 바빠 내려오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게 아니면 셋째누님과 혹시 언쟁이라도 하고 속이 뒤집혀 사진을 안 찍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수도 있다. 셋째누님의 표정이 뭔가 짜증과 울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아 불현듯 그런 상상이 든다." -94쪽

 

그러나 무엇보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 겨울, 제사 끝에 남겨진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대목이다. 그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마당의 불을 끄고 나서 신혼의 아내를 위해 함께 설거지를 해준다.

 

박완서 선생이 꺼낸 것은 어린 손주와 동화책을 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사진이다. 선생은 손녀에게 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는 일화를 털어 놓는다.

 

시인 박형준이 꺼내놓은 건 고향집의 해당화 옆에서 찍은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세 번째 장인 '내 곁에 왔던 사람과 풍경들' 에는 구효서·권지예·김경미·김도연·김용택·박상우·이승하·이청준·이호철·천양희 등의 글이 실려 있다.

 

김용택 시인이 꺼낸 것은 학교와 집 사이에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사진이고, 소설가 박상우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찍은 백야 사진을, 천양희 시인은 담양 소쇄원에서 문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놓는다.

 

빛바랜 사진 한 장에서 받는 삶의 위안

 

우리는 지금 가족 해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개인이 우선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뜻이다. 여럿이 함께 산다는 건 혼자사는 것보다 여러 모로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정이라는 건 불편을 참고 견디는 인내라는, 조개가 빚어내는 진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 해체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어느 새 가족 간에 쌓인 끈끈한 정을 잃어버렸다. 추억을 공유할 자매도 없고, 형제도 없다. 삶이 견딜 수 없이 쓸쓸하다고 느끼는 날에 문득 한 가닥 위안처럼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추억, 그런 사진 한 장 없는 생이란 얼마나 허망하고 결핍된 것인가.  

 

책 속에 나오는 사진들은 몇몇을 빼고는 거의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에 찍은 것들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엔 사진기가 얼마나 흔한가.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하는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사진들을 찍어댄다. 좀 과장되게 말하면 사진 쓰레기들로 넘쳐나는 게 사이버 세상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겐 정작 마음에 간직할 사진 한 장이 없다. 이 풍요 속의 빈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엇이 부족하기에 디지털 카메라 사진에선 도무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순간의 진실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순간의 따스함이 없기 때문일까.


추억은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기억 속에 따뜻함이 스며 있지 않으면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시간은 흘러가서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되돌아온다. 슬픔도 힘이 될 때가 있지만 추억도 사는 데 힘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은 글을 쓴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이 따스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한 장의 사진/ 박완서. 이호철 외27인/샘터/ 9800원


이 한 장의 사진 - 내 마음속 사진첩에서 꺼낸

박완서 외 지음, 샘터사(2004)


태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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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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