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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이제 세상에 나가도 되겠지?"


'넌 이미 세상에 나온 몸! 뭘 새삼스레 세상에 나간다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슨 '득도'라도 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하산'을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 딸아이가 말하는 '세상에 나가도 되겠다'는 말은 그런 거창한 뜻이 담긴 게 아니다.

 

그냥 짬뽕 하나 만들어보고 스스로 대견하여 내뱉은 위풍당당(?) 발언이다. 음식 하나 만든 게 뭐 대수라고 '세상으로 나가도 되겠다'고 떠드는 것일까.

 


"짬뽕 먹고 싶어"
 
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주말, 큰딸이 난데없이 짬뽕이 먹고 싶다고 했다.

 
"자다가 웬 봉창 뜯는 소리? 지금 여기서 짬뽕을 먹겠다고?"
 
내가 사는 이곳 해리슨버그에는 짬뽕, 자장면 파는 식당이 없다. 중국 식당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짬뽕, 자장면은 중국 음식도 아니라고 하잖는가. 당연히 이런 음식을 파는 식당도 없다.

 

혹시 한국 사람이라도 많이 있으면 이런 음식을 파는 곳도 있을 테지만 이곳은 한국인도 별로 없는 곳인지라 짬뽕, 자장면을 파는 '우리나라식' 중국집도 없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한국식당도 없다. 그냥 일본음식인 초밥과 한국음식인 불고기 등이 메뉴에 같이 오르는 어설픈 '한일' 식당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러니 한국에서 먹었던 짬뽕이나 자장면, 냉면, 육개장 등을 먹고 싶으면 방법은 딱 두 가지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거나, 아니면 2시간 정도 차를 몰아 한국사람이 많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가면 한국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없는 게 없다. 먹는 음식도 그렇고 찜질방, 노래방, PC방 등도 다 있다.

 

그런데 지금은 날씨도 흐리고 바람도 많이 불어 나가기도 마뜩찮은 날인데 기껏 짬뽕 하나 먹겠다고 2시간을 운전해 나가자고? 안 될 말이다.


"엄마, 짬뽕 좀 만들어줘."
"얘, 먹고 싶다고 말만 하면 요리가 뚝딱 나오니? 그런 특별한 요리는 '사전 예약제'야. 금방 안 나와. 갑자기 하라고 하면 못하니까, 아니 못할 것도 없겠지만 지금은 어쨌거나 하기 싫어."

 
큰딸은 제 엄마가 요리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을 잘 안다. 그런지라 차라리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짬뽕 만드는 법? 인터넷에 물어봐

 

참 좋은 세상이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만 있으면 세상에 못할 게 없다. 안 되는 게 없다. 큰딸 역시 우리집 요리사인 나 대신 훌륭한 요리 선생님을 인터넷에서 찾기 시작했다. '짬뽕 만드는 법'을 검색창에 치고 들어간 딸이 다시 나를 불렀다.
 
"엄마, 짬뽕 만드는 법은 찾았는데 거기 들어갈 고추 기름은 어떻게 만들어?"
"인터넷에 물어봐."
 
열심히 검색창을 두드리던 딸이 팔을 걷어붙이고 마침내 주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갖가지 해물이 필요한데 집에 있어? 그리고 파, 마늘, 양파… 온갖 야채도?"
"얘, 장도 안 봤는데 집에 뭐가 있다고. 그냥 있는 것만으로 만들어보든가 아니면 나중에 장을 본 뒤 제대로 갖춰서 해보든가."

짬뽕을 먹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큰딸. 그냥 냉장고에 있는 것만으로 해보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결국 냉동실에 있던 오징어와 냉장실에 있던 파, 마늘, 양파 등이 죄다 밖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돗물 소리와 도마 위 칼질 소리.
 
주방이 난리가 났다. 마늘 빻은 것, 고춧가루, 후추가루가 든 양념통이 들썩거려지고 냉장고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더니 오븐에도 불이 두 개씩 들어왔다. 그리고 요란하게 야채 볶는 소리. 나중에는 비명소리까지 들려왔다.

 

"앗, 뜨거워."

 

야채를 볶다가 기름이 튀었다며 내지른 딸의 비명. 마치 불이 난 호떡집처럼 주방이 시끄러웠다. 그렇게 열심히 조리법을 봐가며 혼자서 야무지게 썰고, 볶고, 고추기름을 만들던 딸이 갑자기 식구들에게 물었다.

 

"내가 만든 짬뽕 먹을 거야?"

"맛 한 번 보고(먹을 만하면 계속…). 그런데 언니, 너무 매울 것 같아. 벌써 매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어. 집안이 온통 고추기름 냄새로 가득해." (작은딸)
"
무조건 먹어야지. 엄마도 한 번 안 만들어 본 요리인데. 더구나 네가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먹어줘야 너도 기분이 좋을 거 아냐?" (나)
"상관없어. 안 먹어도 돼." (큰딸)

 
마침내 주방에서 실험적(?)인 짬뽕을 만들던 딸이 완성됐다며 우리를 불렀다.

 

"와, 보기는 그럴싸하다. 맛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카메라 좀 가져와라."
"됐어, 찍지 마."

 

 

딸아이는 제대로 된 짬뽕을 선보이겠다고 했지만 집에는 면발이 가는 소면밖에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짬뽕밥을 먹기로 했다.
 
"어, 너 제법이다. 재료가 이렇게 부실한데도 맛있는 국물을 만들어내다니. 훌륭해. 넌 아빠 닮아서 요리를 잘 하나 보다."
 
맛있다고 칭찬을 해주니 의기양양해진 큰딸의 입에서 거침없는 한 소리가 나온다.
 
"엄마, 나 이제 세상에 나가도 될 것 같지 않아?"

(얘야, 세상이 그렇게 녹록한 줄 아니? 요리 하나 완성했다고 세상에 나가도 될 것 같다는 착각을 하다니.)

 

"응, 그래. 너 당장이라도 시집가도 되겠다."

 

짬뽕 하나 성공했다고 "세상에 나가도 되겠다"고 운운한 딸이 우습긴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독립의 첫 걸음은 제 의식주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큰딸의 짬뽕 성공 건은 일단은 축하해 줄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네 입 하나는 누구 신세 안 지고 해결할 수 있겠다. 독립의 첫 걸음을 당당히 내딛은 너, 세상으로 멀리 나가거라!"


태그:#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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