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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번도 더 물어 봤던 질문이지만 다시 한 번 더 던져보는 질문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건 도대체 어떻게 생겼고 어디서 왔는지가 궁금하다. 몸뚱이가 온 곳은 분명하다. 부모님들 또한 그러하겠지만 내 몸뚱이는 부모님께 잉태되는 연으로 이어 받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피를 나눔으로 하나의 결정체가 태어났으니 그게 내 몸뚱이를 이루는 씨앗이 되었다.

마음이란 게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며 찾아간 봉정암에서 주지인 혜안스님께서는 예기치 못했던 열쇠, 부처님 마음을 일컫는 선이란 글을 주셨다.
 마음이란 게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며 찾아간 봉정암에서 주지인 혜안스님께서는 예기치 못했던 열쇠, 부처님 마음을 일컫는 선이란 글을 주셨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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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몸을 빌려 태어난 몸뚱이지만 결국은 흙에서 왔고, 물에서 왔고, 바람에서 왔고, 불에서 왔다. 그럴싸한 과학적인 용어로야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지만 한 번 생각해 봐라.

비쩍 마른 사람도 매일매일 잘만 먹이면 포동포동하게 살이 찐다. 그렇다면 살은 어디서 왔는가? 그 사람이 포식을 한 게 쇠고기였다면 그 쇠고기는 어디서 왔는가?

소는 풀을 뜯어먹고 사니 소에서 얻은 고기는 구조를 달리한 풀이고, 풀은 흙에서 수분과 양분을 빨아먹으며 자랐으니 풀 또한 구조를 달리한 흙과 수분의 결정체다.

궤변처럼 들리고 말장난 같은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 과정이 복잡하고 다소간의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인간의 몸뚱어리는 결국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형성하는 윤회의 한 과정이다.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 뼈와 살, 피와 땀, 따뜻한 체온과 코끝을 들락거리는 호흡이 어디서 왔는지는 어렵지 않게 어림된다.

생김새도 그렇다. 눈만 뜨면 보이니 고민하지 않아도 생김새는 보인다. 머리가 달린 몸뚱이 하나에 팔과 다리가 달려 있다. 크거니 작거니, 잘 생겼느니 못 생겼느니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두 개의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코는 오뚝하게 솟아 있다. 거울만 보면 그대로 보이는 게 몸뚱이다.

그런데 마음(정신)이란 것은 모르겠다. 있기는 분명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있다 없다를 주장하기도 그렇다. 있는 게 분명하다면 한 번은 보였을 것 같은데 한 번도 보지를 못했으니 있다고 주장하기가 그렇다.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는 게 인간이란 존재다. 답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어둠을 더듬는 답답함에 다시 한 번 장탄식 같은 질문을 봉정암 가는 길에서 마음이 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봉정암으로 가는 여름 길은 청록 빛

계절에도 색깔이 있다. 봄은 야들야들한 연녹색이다. 뾰족뾰족하게 돋아 오르는 새싹들이 거무튀튀한 대지를 엷은 연녹색으로 덧칠해 나가는 연록의 계절이다. 여름 산하는 청록색이다. 해가 길어지고 태양빛이 더해지면서 연녹색에 푸른 기가 더해지는 짙푸른 청록의 계절이다.

봉정암 가는 길은 여름이 머금고 있는 푸른색이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도 많이 제거 되었다.
 봉정암 가는 길은 여름이 머금고 있는 푸른색이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도 많이 제거 되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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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만 색깔을 띠는 게 아니라 가을과 겨울에도 색깔이 있다. 가을은 봄에 마련한 초록색, 여름에 숙성시킨 파란색에 빨간색이 더해지니 색의 삼원소를 완성하며 만 가지 색을 연출하는 총 천연 혼합색이다. 두두물물이 근기와 업보에 따라 초록색과 파란색 그리고 빨간색을 어떻게 혼합하느냐에 따라 무지갯빛 산하를 이룬다.

겨울 색깔은 순백의 눈과 대지의 흑색이 공존하거나 교번하는 흑백의 계절이다. 모든 것을 놓음으로 챙길 것이 없는 무탐, 무색을 이루는 바탕색이다. 겨울은 다 드러낸다. 몰골이 된 앙상한 가지도 드러내고, 거칠고 거무튀튀한 바닥도 드러내는 본심의 계절이다.

저고리에 달린 옷고름처럼 단정하게 보수되는 길

봉정암 가는 길, 백담사를 지나 대청봉으로 오르는 간이역 같은 봉정암을 행해 뚜벅뚜벅 발길을 옮긴다. 봉정암 가는 길은 여름이 머금고 있는 푸른색이다. 줄줄 녹음이 흘러내릴 만큼 울창한 숲길이다. 녹음(綠陰)마저 산그늘에 감춰지는 그런 그늘길이다.
 
마구 파헤쳐 몰염치해진 파괴의 길이 아니라 때깔고운 저고리에 매단 단정한 옷고름처럼 필요하고도 조화로운 길이다.
 마구 파헤쳐 몰염치해진 파괴의 길이 아니라 때깔고운 저고리에 매단 단정한 옷고름처럼 필요하고도 조화로운 길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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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짝에서는 줄줄 땀방울이 흘러내려도 눈빛은 시원하다. 여기를 봐도 푸른빛, 저기를 봐도 푸른빛이니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계곡이 참 수다스러워졌다. 흐르는 물이 어찌나 많은지 가는 길 내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시끄러울 만큼 수다를 떤다. 푸른빛이 도는 산길, 청아한 물소리가 끝이지 않는 산길을 따라 뚜벅뚜벅 봉정암을 향해 걷는다.

길이 참 좋아졌다. 계곡을 흐르는 물길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 복병처럼 숨어 있던 위험요소는 제거되었고, 드러내야 할 아름다움은 도드라지게 돋아낸 그런 길이다. 제격이다. 사색을 하며 걷기에 딱 제격이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색이라도 하려면 자칫 미끄러져 발목이라도 접질릴까 조마조마하게 걸어야 했던 길인데, 이제 그 불안함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사색의 길이다. 마구 파헤쳐 몰염치해진 파괴의 길이 아니라 때깔고운 저고리에 단정하게 매단 옷고름처럼 필요하고도 조화로운 길이다.

3시간쯤을 올라가니 봉정암 가는 길은 아직도 작업 중이다. 예정대로라면 이미 끝났어야 했지만 지루한 장마, 유달리 많았던 궂은 날씨에 늦춰졌다고 한다. 21명의 작업자들이 마치 전쟁이라도 하듯 야전막사를 쳐놓고 산중생활을 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궂은 날씨와 싸우고, 공기와 다투는 전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봉정암 가는 길을 복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날씨와 싸우고 공기와 전쟁을 하듯 산중 생활을 하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봉정암 가는 길을 복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날씨와 싸우고 공기와 전쟁을 하듯 산중 생활을 하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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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쯤이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 저 위험도 제거된다고 한다.
 한 달 후쯤이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 저 위험도 제거된다고 한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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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계곡이 빼곡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테니 그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10월이 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룰루랄라 콧노래라도 부르며 만산홍엽의 가을을 안전하게 만끽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전투를 하듯 작업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일을 거칠게 하지는 않는다. 지난 5월엔 무거운 재료일지라도 목도로 운반을 하고 있더니 이번에는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 길을 다듬고 있는 게 보인다, 새로 설치된 다리에 나무 발판을 깔고 있는 모습이 마치 바느질을 하듯 꼼꼼하다.

완성됐거나 공사 중인 길을 지나니 어느덧 깔딱고개다. 발길이 편해서 그런지 마음도 한결 편하다. 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깔딱고개는 더 이상 '깔딱'하고 숨을 몰아 쉬어야 할 힘든 길이 아니고 방생의 길이다.

깔딱고개로 올라서는 길도 푸른빛이 쟁쟁하게 돌고 있다.
 깔딱고개로 올라서는 길도 푸른빛이 쟁쟁하게 돌고 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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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의 기암들이 달리 보인다. 힘이 들어도 끊임없이 쉬지 말고 올라야 한다고 법문을 하는 듯 보였던 바위, 거북바위와 물고기 바위가 마치 전생에 어느 고승이 방생했을지도 모를 그 물고기를 만난 듯 반갑게만 보인다. 힘들어도 참으라고만 하던 바위가 살리는 마음, 모든 것을 살리는 방생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일 만큼 여유로운 마음이다.

엉덩이 살이 허옇게 드러난 줄도 모르고...

푸른빛이 쟁쟁한 봉정암이다. 참배를 올리고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겨 바윗길을 오른다. 봉정암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인트가 그곳이기에 매달리고 몸부림을 치듯 바위엘 올라간다. 바위엘 오르니 속이 후련하다. 훌쩍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눈길이 탁 트인다. 잠시 바위에 좌정을 하고 앉아 막간을 즐긴다. '좋다,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봉정암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엘 올랐다 내려와 미끄러지고 말았다.
 봉정암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엘 올랐다 내려와 미끄러지고 말았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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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머물 수만은 없기에 바윗길을 내려 걷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길이다. 조심해야지 하는 순간 아차 싶다. 발이 미끄러지니 일순간에 몸뚱이가 미끄럼을 탄다.

반사적으로 손길을 뻗어 나무를 잡는다. 매달리듯 미끄럼을 멈춘다. 참 다행이다. 카메라가 조금 상했지만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고맙고 다행한 일이다.

겁먹고 조린 발걸음으로 조심조심 바윗길을 내려와 저녁을 먹고 사리탑으로 오른다. 어쩐지 멋진 운해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예감이 들어맞았다.

설악의 남쪽에 두둥실 운해가 뜬다. 지난 번 가을에 보았던 그 운해처럼 깔끔하진 않지만 충분히 감탄을 자아낼 만큼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여름 설악의 푸른빛, 봉정암을 휘감고 있는 백색 운해에 취해 있는데 '처사님 지갑 빠져요'하는 경상도 말소리가 들린다. 대수롭지 않은 듯 뒷주머니로 손을 뻗으니 반쯤은 빠져나왔을 듯 지갑이 만져지고 맨살이 손에 닿는다.

'어! 이게 뭐야?' 바지를 입었는데 왜 엉덩이 살이 만져지는 거야 하고 뒤돌아보니, 아뿔사! 엉덩이 살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질 않은가.

순간 얼마나 당황 되던지…. 얼른 뒤돌아서긴 했지만 묘책이 없다. 일단 사람들을 피해 나무 옆으로 붙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보니 등산용 수건이 만져진다. 수건을 꺼내 앞치마를 두르듯 엉덩이에 두르는 것으로 응급조치를 한다.

바윗길에서 미끄러질 때 엉덩이가 허옇게 드러날 만큼 바지가 헤졌음에도 그걸 모르고 지금껏 돌아다녔다는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뒤에서만 키득거리지 말고 진즉 말 좀 해주지 하는 푸념이 절로 생긴다.

운해를 배경으로 두른 사리탑이 더 경이롭다.
 운해를 배경으로 두른 사리탑이 더 경이롭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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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이상은 밝은 대낮이 아니라는 거다. 투덜거리는 발걸음으로 사리탑을 내려와 배정 된 숙소로 행하지만 여벌의 바지를 챙겨 온 것도 아니니 당장보다도 내려갈 길에 스쳐야 하는 사람들 눈길이 더 걱정이다.

선답처럼 건네 준 혜안스님의 붓글, 부처님 마음 '禪'

봉정암 주지인 혜안스님께서는  봉정암 가는 길로 접어들면서 가졌던 내 마음, 마음을 찾아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고, 예기치 않은 미끄럼으로 엉덩이를 드러내고 다닌 우스꽝스런 모습을 알고 있었다는 듯 봉투 하나를 건네주신다.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니 선(禪)이라는 글자를 쓴 붓글씨다. 달랑 선이라는 글자 한자지만 힘이 넘친다. 굵직하면서도 날렵하고, 날렵함에도 구비치는 힘이 있다. 스님께서 붓글씨를 쓰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다.

봉정암이 구름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듯 보인다.
 봉정암이 구름바다에 두둥실 떠있는 듯 보인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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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말하길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계(戒)와 계율(律)은 부처님의 삶이자 법이며,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였다. '마음'이란 게 뭔가를 궁금해 하며 산길을 올라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스님게서는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선을 글로 주셨다.

마음이 어떤 것인지가 궁금하면 공부 많이 해 부처님의 생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알면 된다는 선답을 주신 듯하다. 스님께서 주신 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고 여쭈니 그냥 있는 그대로, 고승 선사들이 참선하며 많이 쓰시던 글이니 그렇게 해석하라고 말씀하신다.

동해바다에 바늘하나를 던져놓고 그 바늘을 찾아보라는 말씀보다도 더 어려울 것 같은 숙제를 던져주시며 돌아가신다.

산승 구암스님으로 부터 바지를 물려받다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을 먹고 잠시 구암스님께 들리니 엉덩이에 왜 수건을 달고 다니느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덜렁거리는 손수건이 눈에 거슬렸나보다. 바위에서 미끄러졌고, 그때 바지가 헤져 구멍이나 그걸 가리느라고 수건을 둘렀다고 하니 마침 당신께 바지 하나가 있으니 그걸로 갈아입으라며 바지를 내주신다. 질이 꽤 괜찮은 거니 잘 입으라고 한다.

허옇게 엉덩이 살이 드러난 줄도 모르고 구름바다와 노을에 취하는 시간이었다.
 허옇게 엉덩이 살이 드러난 줄도 모르고 구름바다와 노을에 취하는 시간이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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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인연인가?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엔 은사스님이 제자스님에게 법통을 전수한다는 징표로 가사를 전했다고 하는데 졸지에 스님으로부터 바지를 전해 받는 게 아닌가.

출가를 하였을 때라면 구암스님의 법통을 이어받는 후계자라는 징표지만 승속을 달리하니 그건 아니다. 더더구나 가사나 법복이 아닌 등산바지를 건네받았으니 속세인으로 사람답게 살라는 산승과의 인연쯤으로 생각한다.

마음이 뭔가를 찾을 수 있는 열쇠 하나, 부처님 마음이 뭔가를 공부하면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선가의 열쇠 하나를 얻었고, 산승의 속세 인연을 이어받았으니 봉정암으로 가는 여름길이 더 푸르고 맑게만 보인다.

덧붙이는 글 | 봉정암엔 9월 1일 내려 왔습니다.



태그:#봉정암, #선, #부처님 마음, #혜안스님, #구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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