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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암 가는 길은 더디고 팍팍하고 숨이 차다. 지금쯤 직지사는 제 품에 들었던 나그네의 행로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저 만치 아래 능여계곡에 발을 담근 채 자신을 찾아오는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오는 사람 말리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이 절집의 풍습이라 하니 그런 절집을 두고 야속하다 탓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이윽고 절집 앞에 당도하자 제일 먼저 길손을 맞는 것은 바알간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 한 그루와 족히 20-30년은 되었음직한 호두나무 한 그루다. 오느라 수고했다고, 여기가 바로 구름도 쉬어간다는 운수봉 아니냐고 나그네를 다독인다.
 
17세기 선비 정시한이 하룻밤 묵었던 운수암
 
 
운수암은 전각이라고 해야 극락보전과 요사 한 채뿐으로 아주 단출하다. 그러나 운수암이 보잘것없는 곳이라고 지레짐작해서는 안된다. 극락 보전 위로 운수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봉우리  위로는 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간다. 절집을 장식하는 온갖 장엄 중에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구름보다 더 현란하고 숭고한 장엄이 어디 있겠는가.
 
운수암 건물들은 근래에 이르러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우담 정시한(1625∼1707)이 쓴 <산중일기>는 300여 년 전인 1686년 이전부터 이곳에 운수암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침에 승려 국청과 함께 사찰(직지사)을 둘러 보니, 규모가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그곳에 거처하는 승려도 많았다. 그러나 팔상전  이층 누각을 짓느라고 산내의 승도들이 분주하게 역사를 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승려 여상이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아침 식사 후에 갑자기 승려를 보내 서전의 팔부도를 보았다.  부도암에 올라가서 학조(대사)의 부도를 보고  명적암에 이르렀다가 또 능여암에 도착하여 덕륜이란 승려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운수암에 이르러 수영대사를 만났는데 수영은 곧 도영을 개호한 것이다. 만나서 매우 반가웠다. 다과를 준비하여 대접해 주었다. 거처하는 것이 정결하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노마(奴馬)를 본사로 돌려보내고 혼자 그곳에 남아 밤이 깊도록 대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숙하였다. 산행한 거리는 대략 10여리쯤 되었다." - 정시한의 <산중일기> 1686년 3월 28일치 (가로 안은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필자가 임의로 삽입한 것임)
 
17세기 조선의 선비 정시한은 62세라는 노구를 이끌고 운수암까지 올라온 것이다. "산행한 거리는 대략 10여리쯤 되었다"라고 거의 정확하게 서술한 것을 보면 거리 감각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가만히 귀대고 들으면 말을 타고 예까지 올라온 그의 밭은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경내는 발자국 소리조차 내기 조심스러울 만큼 적막하다. 발소리를 죽여 극락전 계단을 올라가서 불전 안으로 들어간다. 불단 중앙엔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사시(오전 9-11시)에 올린 마지 공양은 다 드셨는지 불단 앞은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다. 불전 바닥엔 선풍기 두 대가 놓여 있다. 불전 바닥엔 선풍기 두 대가 놓여 있다. 이렇게 더운 날엔 바람 이상의 공양이 어디 있으랴.
 
아미타불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마치 몰려드는 수마를 쫓느라 애쓰는 듯하다. 오른쪽에 호위하고 있던 백의관음보살이 말을 건넨다. "부처님, 정 졸리거든 지가 재미난 옛날이야기라도 한 자리 들려드릴까요? 아니면 신작 비디오라도 한 편 빌려다 올릴까유?" "여보시요! 백의관음보살님, 시방 제가 몹시 졸립걸랑요. 한 십 분만 이대로 졸게 놔두면 안 될까?"
 
어쩌다 두 분 부처의 귓속말을 엿들은 나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극락보전 뒤꼍에 있는 산왕각으로 올라간다.
 
 
극락보전 뒤 축대로 쌓은 언덕엔 산왕각이 있다. 전통불교가 토착신앙과 접목됐음을 보여주는 산신각은 한때는 중국에 없는 것이라 하여 헐리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산신각 혹은 산왕각은 절집 가장 후미진 곳에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숨어 있다.
 
옛적에 지어진 양반집에 가면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 가묘(사당)가 자리하고 있다. 아낙네들은 그곳에다 정한수 한 그릇 떠 놓고 조상에게 자식들의 발복을 비는 치성을 드린다. 치성을 받아먹은 조상신들은 산천의 정기와 함께 복을 나눠준다. 절집에서 산천 정기가 집약된 자리가 바로 산신각이다. 산신각이라 하지 않고 굳이 산왕각이라 했을 때 받아들이는 어감은 무엇이 다를까. 호국적 성격을 더 강조한 것일까.
 
산왕각으로 오르는 계단엔  수국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수국은 범의귓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이다. 높은 산자락이라서 그런지 늦게 피었나 보다. 수국은 무성화이다. 암술이 퇴화하여 종자를 만들 수 없는 꽃이다. 혹 저 수국은 전생에 아들 못 낳는 죄로 쫓겨난 이력이 있는지 모른다. 산신께 빌어 어떻게든 이번 생에선 씨를 받아보자는 일념으로 저기 버티고 있는 것인지 누가 알랴.
 
내 안에 쌓인 적막이 두려워 길을 나선다
 
 
 
산왕각 층계를 내려서다 말고 먼산을 바라본다. 풍경은 수행자에게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열심히 도를 닦으라는 경책의 의미가 있는 사물이다. 그러나 시방 극락보전 추녀 끝에 걸린 풍경은 소리를 여의고 있다.
 
파적, 적막을 깨트리는 댕그랑거리는 청아한 풍경 소리를 기다리는 나그네의 마음을 철저히 배반한다. 풍경은 결코 제가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수평 상태를 허물어뜨릴 의사가 없는  것이다.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노라니 내 마음도 덩달아 적막해진다. 적막을 느낀다는 것은 내 마음이 지금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수평이라는 뜻이리라.
 
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마당 가로 간다. 마당 가에 피어난 부용 꽃이 탐스럽다. 부용은 아욱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이다. 허난설헌의 시 '몽유광상산'에도 나오고 고은 시인의 시 '문의 마을에 가서'에도 등장하는 꽃이다. 허난설헌의 시가 죽음을 예감하고 쓴 시라면 고은의 시는 죽음을 목격하고 쓴 시라고나 할까.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 은 시 '문의 마을에 가서'  2연 일부
 
어쩌면 한평생 적막과 싸워야만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혹 아이가 태어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제가 당면한 가슴 속 적막이 무서워서가 아닐까. 산다는 일의 덧없음 속에 켜켜이 쌓인 적막. 어쩌면 인간의 한 평생은 내 안에 쌓인 적막과 싸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끝내 삶에 패배하고 죽음이라는 적막 속으로 돌아간다. 석가모니는 삶에 패배하지 않으려고, 그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출가를 결심한 사람이다. 내가 떄때로 길을 나서는 것은 삶에 쌓인 적막이 무겁고 두렵기 때문이다. 운수암을 나선다. 이곳의 적막이 너무 무겁구나.

태그:#운수암, #산왕각, #극락보전, #직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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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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