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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11일 서울 용산 중경고등학교에서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여성농구교실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들. 최근 여성들은 운동모임을 직접 꾸려 팀플레이 스포츠를 즐기는 주체들로 거듭나고 있다.
ⓒ 우먼타임스
[채혜원 기자] 농구대잔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1990년대 초·중반, 수많은 소녀팬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무 책상에 저마다 좋아하는 ‘오빠’의 이름을 새겨 넣고 다이어리를 ‘오빠’들의 사진으로 도배하며 밤을 샌 건 예삿일이었다.

연고전이 있을 때면 40명이 넘는 반 전체가 똘똘 뭉쳐 선생님을 설득하기도 했다.

“선생님, 경기만 보게 해주시면 이번 시험 진짜 잘 볼게요!”

하지만 TV를 10분 이상 본 적은 없다. 반 전체가 꺅꺅 소리 지르는 것도 모자라 연대팀, 고대팀으로 나뉘어 싸움까지 벌였으니 말이다.

농구 코트에 소녀팬들을 몰고 다녔던 주역은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등의 라인으로 구성된 연세대팀과 전희철, 김병철, 현주엽 등으로 구성된 고려대팀. 당시 젊은이들의 승부와 좌절, 사랑을 숨 가쁘게 그려나간 장동건, 심은하 주연의 MBC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1994)가 히트를 치면서 이들은 ‘마지막 승부 세대’라 불리기도 했다.

당시 소녀들은 그저 농구 선수들에게 열광하는 ‘소녀팬’으로만 그려졌다. 공부 안 하고 오빠들만 쫓아다니는 ‘빠순이’들로 비하되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우연히 던져본 농구공에 호기심이 생겨 혼자 농구 연습을 즐겼던 소녀나, 친구들끼리 축구를 해보고 싶어 혼자 축구공만 매만지다 말았던 소녀들은 외로웠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소녀들은 ‘운동 모임’을 스스로 꾸리는 주체로 거듭났다. 지난해 5월부터 서울 홍익대 운동장에서 ‘짝토(짝수 토요일) 야간 축구회’를 이끌고 있는 문구미정씨. 그저 축구가 하고 싶다는 친구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축구 모임을 시작했다. 그는 1년 넘게 모임을 이끌어오면서 “스스로 몸이 변하는 과정을 즐기는 여성들이 많아졌음을 가장 크게 느낀다”고 한다.

“축구 모임에 처음 나오는 여성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얼마나 몸치인지 거듭 설명해요. 실제 그들 가운데는 공을 제대로 차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죠. 하지만 휴식시간에 누군가가 한두 번만 코치해주면 후반전에는 몸을 날리며 축구를 합니다. 그들은 이제 ‘내가 아주 잘해서 놀랐다’고 말합니다.”

축구 규칙도 제대로 모르고 그저 ‘골’ 넣는 것에만 집중했던 모임도 어느새 아마추어지만 축구단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짝토 야간 축구회(http://www.unninet.net/ soccer) 온라인 모임을 만들면서 회원이 더욱 늘어났다. 축구화, 정강이보호대 등 장비를 구입하는 여성들도 증가했다. 그들에게 축구는 특별한 취미가 아니라, 내 몸을 변화시키는 삶의 일부가 된 것이다.

각자 포지션을 정한 11명의 경기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게임을 즐길 뿐만 아니라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센터링 등 전문용어에도 익숙해졌다. 규칙을 지키며 제대로 된 축구를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양수안나 서울 송파여성축구단 코치의 도움이 컸다. 경희대 재학 시절 주전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짝토마다 홍대로 달려온다. 짝토 야간 축구회 회원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농구, 발야구 등 다양한 스포츠까지 함께 즐기는 우리와 양수안나 코치는 서로 구원해주는 관계”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7월부터 두 달간 처음으로 여성농구교실을 연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는 프로그램을 성황리에 마쳤다. ‘운동은 남자에게 어울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넘어 여성에게 자유롭고 신나는 체육 활동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이번 농구교실에는 총 50명이 넘는 여성이 참여했다.

평소 농구를 하고 싶었던 직장여성, 여성들만 대상으로 한 체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었던 학생 등이 모여 아마추어 농구단의 여성 코치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채선화 민우회 건강팀 활동가는 “90년대 초 농구 광팬이었던 20, 30대 여성들이 농구 코트의 주체가 되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많이 얻어갔다”며 “농구교실은 끝났지만 많은 여성 참여자들이 소모임을 꾸려 계속 농구를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 우먼타임스
오는 9월에는 페미니즘 스포츠 축제가 열린다. 토요일마다 모여 축구하던 여성들, 주말마다 자기방어교실에 참가했던 여성들, 일주일에 세 번씩 모여 농구를 즐기는 여성들이 모두 모여 ‘여성운동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축제를 기획하는 김민혜정씨는 “다양한 운동 모임을 꾸리는 여성들이 모여 각 모임의 취지, 변화 과정, 정보를 공유할 예정”이라며 “각자 운동 시간에 배웠던 기량도 뽐내는 즐거운 여성들만의 스포츠 축제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저 ‘팬’이었던 소녀들은 이제 노장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베테랑이 된 오빠들에게 열광하는 대신 부러움의 눈길을 보낸다.

“아, 오빠는 저 기술을 쉽게 해내네. 난 잘 안 되던데. 언니, 나도 오늘 저 기술을 다시 시도해봐야겠어. 오늘도 농구 한 게임 콜?!”

태그:#여성, #우먼, #스포츠, #농구, #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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