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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그날> 사진집을 들고 설명하는 김녕만씨
ⓒ 최재인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 13일 만인 지난 7일 관객 수 38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 현대사를 다루어서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많은 편에 속한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오는 관객들의 눈은 모두 촉촉이 젖어있었다. 젊은 관객들은 '영화가 슬퍼서' 보다 '저런 끔찍한 일이 불과 27년 전에 우리나라에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울었다. 하지만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현장에 있었던 광주시민들은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실제로는 대검으로 사람을 찔러 죽였다'며 제작사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어린 아이였거나 태어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 상황을 영화나 사진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현장 취재를 갔던 사진작가 김녕만(현 월간 사진예술 대표)씨. 김씨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

김씨는 취재를 해도 보도되지 못할 것을 안 다른 기자들이 철수한 현장에 남아 끝까지 취재하면서 광주의 슬픔을 사진에 생생하게 담았다. 그리고 1994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보도되지 못했던 사진들을 모아 선배기자인 황종건씨와 함께 '광주, 그날'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했다.

김녕만씨는 1949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2001년 '올해의 사진기자상' 등을 수상한 사진기자이자 사진작가이다. 김씨를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 당시 광주의 참혹했던 상황과 기자로서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던 심정에 대해 들어보았다.

- 어떻게 사진기자가 되셨는지?
"대학시절부터 내 꿈은 <동아일보> 사진기자였다. <동아일보>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당시 <동아일보>가 민족지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사건 같이 사진 한 장 때문에 <동아일보>가 폐간도 되었다. 나는 1977년과 1978년 동아일보 사진동우회원전에서 2회 연속 최고상을 받아 입사할 수 있었다. 시험 봐서 들어가라고 했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 <광주, 그날>에 실린 김녕만씨의 사진
ⓒ 김녕만
-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셨는데 집안 내력이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되려는데 영향을 미쳤나?
"그런 것보다 '관심'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나는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 광주 민주화 항쟁이 터졌을 당시 신문사 입사 2년차였는데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게 되었나?
"그 당시 황종건 선배가 큰 사건인 줄 모르고 내려가 있었는데 통신도 안 되고 해서 비상이 걸렸다. 그러다 사회부 기자가 어떻게 광주에서 빠져나와 신문사로 돌아왔다. 좋게 말하면 빨리 보고하려고 온 거고 나쁘게 말하면 상황이 무서우니까 도망쳐 온 것이다. 그 기자가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광주에서 경상도 사투리 쓰면 큰 코 다친다'고 해서 누구를 보낼까 하다가 전라도 사투리 할 수 있는 김녕만씨가 가야겠다 해서 내가 가게 됐다."

-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무섭지 않았나
"당시에는 가고 싶었다. 두려움이야 다 있다. 하지만 주어진 일이 있으면 힘이 생긴다. 큰 일이라면 내가 희생해서라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보도 사진기자들에게 큰 사건은 행운이기도 하다. 내가 위험한 일을 해냄으로서 사회에 기여도를 높일 수 있으니까.

내려가기 전에 서울에서 임응식 교수님을 만났는데 '너 여기서 뭐하고 있냐. 신문기자가 광주에 안가고 왜 여기에서 돌아다니는가? 사진기자가 사건 현장에 있지 않고 뭘 하는 있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부장이 보내줘야 갈 수 있었다.

광주로 들어가는 길에 고향인 전북 고창을 지나가게 되어 어머니를 만났다. 그때는 마음속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같이 자는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어머니는 '신문기자 그만두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형님이 택시로 송정리까지 데려다 주었다."

- 그 당시 광주로 가는 길을 다 막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들어 갔나?
"당시 시내는 시민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건너편에는 시민군들이 통나무로 막았다. 휴전선처럼 대치 상태가 되어 시민들은 그 사이를 비무장지대처럼 왔다갔다 했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동아일보> 신광연 선배기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에 들렀다가 카메라를 분리해서 봉투에, 렌즈는 호주머니에 넣고 몰래 시내로 들어갔다. 계엄군은 계엄군대로, 시민군은 시민군대로 기자를 배척하여 기자들이 설 곳이 없었다."

"한국 기자들은 악의 축처럼 대우 받아"

- 외신 기자들의 상황은 어땠나?
"외신 기자들은 자신들이 쓴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왔다. 미국과 일본, 독일 기자들이 많이 왔다. 시민군들에게 그것을 보여주면 외신 기자들을 대우해줬다. 외신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좋은 대우를 받는데 굳이 한국 기자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한국 기자들은 악의 축처럼 대우 받았다. 학생들이 외국 신문을 벽에 붙여놓으면 학생들이 그것을 보면서 번역을 해줬다. 그리고 '한국 기자들을 타도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 기자로서 심정이 어땠나?
"당시 기자로서 가장 큰 자괴감을 느꼈다. 알려야 할 것을 못 알렸을 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못 말할 때 참담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보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는데 이런 나를 선배 기자들이 '무슨 영화를 찍느냐'고 야유하기도 했다."

▲ 앳된 모습이 역력한 고등학생에게 총을 겨눈 계엄군들.
광주민주항쟁에는 대학생만 아니라 고교생들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1980.5.27
ⓒ 김녕만

"시민을 '폭도'로 쓸 바에야 사진을 싣지 않겠다"

- 그렇다면 취재한 사진은 전혀 쓰지 못했나?
"계엄 시대라 신문에 나가려면 계엄사령부에서 보도통제를 했다. '가(可)', '불가(不可)' 표시로 검열을 했다. 불가 판정을 받은 사진이나 기사가 빈칸으로 나가면 독자들이 의아해 할까봐 광주민주화 항쟁 때의 계엄당국은 빈칸이 없이 대신 뭐라도 채워서 신문을 내보내도록 했다.

<동아일보>에 사진을 쓰려면 폭도라는 표현을 써야했다. 그럴 바에는 쓰지 말자고 생각해 사진이 나가지 않은 날도 있었다. <동아일보>에 사진이 안 나가니까 집에서는 내가 죽었나 살았나 걱정했다고 한다."

- 진실을 알리지 않는 보도를 한 언론에 분노해 시민들이 광주 MBC에 불을 질렀다고 들었다. 진실을 위해서 사직서를 내거나 보도를 고집한 기자들은 없었나.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것에 반발해 사직서를 내버리기는 쉽다. 하지만 기자 한 명이 그만둔다고 사안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나.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꼭 살아남아서 이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김훈씨는 80년대에 자신이 전두환 전 대통령 기사를 많이 썼다고 한다.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럽다고 여겨 90년이 다가오기 전인 89년 12월에 사표를 냈다. 하지만 김훈씨는 다른 기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 기사를 쓰기 싫어해 자신이 도맡아 해 더 많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왜 기사 다 써놓고 사직서 내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 진압 작전 과정에서 검거된 시민군들이 전남 도청 마당에 엎드려 있다 1980.5.27
ⓒ 김녕만
- 도청이 진압되었을 당시 한국 사진 기자 중 유일하게 도청 안에서 취재를 할 수 있었다는데?
"다른 기자들은 도청에 못 들어간다고 판단해서 먼저 갔다. 하지만 나는 당시 기자 초년생이었으므로 '혹시나 들어갈 수 있나'하고 도청 앞에 앉아 기다렸다. 문을 지키는 군인들은 권한이 없으므로 포기하고 대령이 지나가자 한번 찍자 했다. 대령은 나름대로 진압이 끝나서 안심하고 있었으므로 들여보내 주었다.

들어가서 계속 찍었다. 내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군인들이 도청 앞에 넙죽 엎드려 있는 시민군들에게 폼으로 총부리를 들이대기도 했다. 내가 '끔찍하니 총 치우라'고 말하고 사진 찍었다. 그러다 나중에 대위가 '이거 뭐야? 어떻게 들어와서 사진을 찍는 거야'하고 고함을 질러서 끌려나왔다. 대령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 군인들은 상황을 정말 잘못 알고 있었나?
"기자들도 잘 모르는데 군인들은 오죽했겠나. 진압 군인들을 많이 만났었다. 명령을 따르는 게 군인이라 명령에 따라서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가 저장된 정보만 알고 있는 것처럼 명령만 따르는 이들은 외부 상황을 잘 몰랐다. 시민을 폭도로밖에 볼 수 없었던 상황은 위정자들에게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지역의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역사의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진압 군인들도 이해해줘야 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힘들었다. 역사라는 것이 쉽게 말하기가 어렵다."

- 혼란 속에서 약탈이 없었다는 것이 신기하다.
"시민들이 결합했기 때문에 약탈은 없었다. 월드컵 때처럼 사람이 뭉쳐지면 무섭다."

▲ 딸 박금희양(전남여상 3)의 관을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박금희 양은 5월 22일 광주 기독병원에서 부상자를 위해 헌혈하고 오다가 공수부대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1980.5.29
ⓒ 김녕만
- 유족들의 사진을 찍을 때 어려움은 없었나?
"당연히 찍히는 걸 싫어했다. 기자들을 벌레 보듯 했다. 이후에 찾아가는 것도 싫어했다. 하지만 기자는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 나한테 나쁘게 대했다고 나쁘게 보도해서는 안 된다. 기자는 객관적인 잣대로 사실을 봐야한다."

-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이후에도 몇 년 간 5월 18일이면 광주에 취재를 다녀왔는데 다시 가본 광주는 어땠나?
"역사라는 게 평가내리기가 참 어렵다. 그동안 너무 지엽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광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다. 이 때문에 일부러 광주 사진집을 늦게 만들었다. 1994년에 13년만에 책을 만들었다. 노태우 정부까지는 힘든 상황이라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만들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여서 김영삼 대통령과 수석들에게 책을 주었다. 수석들이 책을 받아들고 '세상 좋아졌다. 청와대에서 이런 책 들고 다니다니'라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 책이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말만 하는 것보다 사진 한 장의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보면 슬픔이 여성들에게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 사진집 출판 당시 '전사모(전두환 전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의 반대는 없었는지?
"그때는 없었다. 없는 사진을 꾸며낸 것이 아니고 본 한도 내에서 정리한 것이니까. 하지만 군인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려 일부러 잘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군인들도 국민이다. 그 당시에는 장발이 유행이었지만 지금 시각에서는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하나의 시각으로 역사를 평가하기 힘들다.

나는 사진기자로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진집을 만들었다. 불에 덴 사람이 불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면 다시 화상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역사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불행한 역사는 또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같은 민족끼리 슬픈 일이다."

- 마지막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에 무관심한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광주를 지역의 아픔으로만 치우쳐 보지 말고 국가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 역사를 한 쪽에 처박아 두지 말고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통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키스신 하나 없는 영화 중 성공한 건 이 영화가 처음일 것이다(웃음)."

덧붙이는 글 | 차예지, 최재인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김녕만, #화려한 휴가,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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