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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배롱나무꽃과 나무밑을 뒤덮은 붉은 꽃잎
ⓒ 이승철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하면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억세게 퍼붓는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8월 8일 전남 순천의 송광사를 찾았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로 승보사찰인 송광사는 거짓말처럼 반짝 난 햇살 아래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비 때문인지 찾아온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지만 거구의 젊은 백인 커플 한 쌍이 그늘에 앉아 흐르는 땀을 닦아 내리기에 바쁜 모습이 오히려 생경하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다리 위에 지은 특이한 모습의 정자 같은 건물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바닥에 붉은 꽃방석을 깐 것처럼 꽃잎을 떨어뜨리고도 아직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붉은 배롱나무 두 그루였다.

▲ 연분홍 배롱나무꽃
ⓒ 이승철

▲ 절집 지붕의 선과 어우러진 배롱나무꽃
ⓒ 이승철
그런데 이 배롱나무는 절 안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었다. 대웅전 앞에도 승보전 처마 밑에도 뒤꼍의 사리탑 옆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이 여간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절 안에 웬 배롱나무 꽃이 이렇게 많지?"

나무들도 대부분 크고 오래된 나무들로 정성들여 가꾸어서인지 꽃을 피운 자태도 유난스레 곱고 화려하다. 배롱나무는 사람들이 보통 목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자미화나 간지럼나무로도 불리는 나무다.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 이라는 조금은 서글픈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나무줄기의 매끄러움 때문에 여인의 나신을 연상 시킨다는 이유로 옛날에는 양반집 안채에서는 금기시되던 나무였다.

▲ 흰색 배롱나무꽃
ⓒ 이승철

▲ 사리탑과 배롱나무꽃
ⓒ 이승철
디딜방아가 남녀 교합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안마당에서 밀려난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 배롱나무지만 절 마당이나 선비들만 기거하는 사랑채의 앞마당에는 많이 심었는데 여름 한철의 기나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고운 꽃을 피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절 마당에 많이 심는 것은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렸듯 승려들 또한 세속을 벗어 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고, 선비들이 거처 앞에 심는 것은 청렴을 상징하는 때문이었다고 한다.

▲ 담쟁이 덩쿨 담장 넘어 배롱나무꽃
ⓒ 이승철

▲ 배롱나무 꽃 밑에서 다정한 모습의 곽영준씨 부부
ⓒ 이승철
그래서였을까? 이 송광사에는 상당히 많은 배롱나무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어서 빗속에 찾은 우리일행들에게 상큼한 미소로 반겨주는 것 같았다. 꽃이 예쁘고 매끄러운 줄기가 아름다워서 그랬는지 일행들 중 독실한 불교신자인 친구부부가 대웅전 앞마당의 커다란 배롱나무 앞에서도 가볍게 합장을 하고 내려온다.

"거참, 꽃이 너무 예뻐서 고운 자태에 취할 것 같구먼."

일행 한 명이 배롱나무 꽃을 바라보며 정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스르르 감는다. 간간이 쏟아지는 폭우와 무더위 속에서 찾은 송광사에서는 곱고 예쁘게 피어난 배롱나무 꽃의 화려한 미소가 사람들을 충분히 취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대웅전 앞 마당가운데의 배롱나무꽃
ⓒ 이승철

▲ 처마 밑의 배롱나무꽃
ⓒ 이승철
배롱나무를 알기 전까지는
많은 나무들 중에 배롱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워놓고는
가녀린 자태로 소리 없이 물러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남모르게 배롱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뒤론 길 떠나면 어디서든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그만 하던 일을 포기하고 싶어
혼자 외딴섬을 찾아가던 날은
보아주는 이도 없는 곳에서 바닷바람 맞으며
혼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꽃은 누구를 위해서 피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듯

늘 다니던 길에 오래 전부터 피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늦게 사 배롱나무를 알게 된 뒤부터
배롱나무에게서 다시 배웁니다.
사랑하면 보인다고
사랑하면 어디에 가 있어도
늘 거기 함께 있는 게 눈에 보인다고

-도종환의 시 <배롱나무> 앞부분과 뒷부분-


▲ 절집 뒤란의 배롱나무꽃
ⓒ 이승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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