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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산내 희생자 유가족 회장 김종현(70)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집에 들어서자 책장 빼곡하게 책이 보인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컴퓨터가 있다. 고희의 노인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소한 물건들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앞장서 책을 보고 인터넷을 활용하는 김종현(70)씨는 산내 희생자 유족회 회장이다. 올해로 회장에 부임한지 3년, 전국 유족 협의회 상임대표도 맡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여러 활동을 하면서 힘들지는 않을지, 활동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 힘들은 모두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출발한다.

아버지가 되어서야 '아버지'를 알다

김씨가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재혼을 했고,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러던 중, 1949년 봄에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좌익 활동으로 인해 경찰에 쫓기다 그 해 겨울 끌려갔다.

"당시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죠. 집에서 잡혀가신 것도 아니고 외가에서 숨어계시다 잡혀 가셨으니까요. 아버지가 끌려간 이유는 신탄진 지서 습격 사건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여러 의견이 분분해요. 좌익실록기록을 찾아봐도 없고 이리 저리 알아봐도 답이 없더라고요."

▲ 김종현씨의 아버지 사진.
ⓒ 김영선
잡혀간 아버지는 당시 대전 경찰서로 갔고, 이감되어 대전 형무소에서 있던 중 산내서 돌아가셨다.

"고모부가 교도관이었는데 1950년 음력 5월 20일에 차에 싣고 산내로 갔다는 것을 알려줬어요. 그래서 제사는 음력 5월 19일에 지내죠. 재판도 받지 않은 미결수를 끌고 가서 죽였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합니까."

그렇게 허망하게 잃은 아버지와의 기억은 많지 않다. 할아버지 집으로 가끔 와서 만나기만 했을 뿐, 당시만 해도 철이 없어서 아버지라는 사람이 생소하게 느껴졌던 그다. 하지만 산내를 지나 금산으로 가는 길이면 항상 마음 속으로 '아버지 죄송합니다'를 외쳤다.

"부모님한테 사랑받지 못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랐으니 삐뚤어지기만 했죠. 나 자신만 알고 나 편한 것만 생각하려고 했으니까요. 누가 잘못한 점을 말해줘도 속으로 담아놓기만 했지 받아들이고 풀려고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슬하에 4형제를 둔 그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점이 많았다"고 한다.

"자식 키우면서 보니까 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애들이 잘못해서 혼을 내도 나처럼 담아두지 않고 금방 금방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구나,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었구나'하며 많이 깨달았죠. 그래서 애들한테는 나름껏 노력한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살아오면서 힘들 때마다 '나도 아버지·어머니가 있었더라면'하는 생각이 간절했다는 그다.

"유족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자신과의 싸움"

희생자 유족들을 대표하는 그는 누구보다 유족들의 고충을 잘 아는 듯 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며 유족들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아버지 어디 가서 뭐 때문에 돌아가셨다' 이렇게 얘기하지, 전 같으면 무서워서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어요. 지금도 피해의식 때문에 유족회에 참석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분들의 삶이 오죽했겠습니까."

실제로 산내에서 최대 7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족회원들은 100명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유족들이 있는가 하면 알면서도 무서워서 내색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고아가 되어 빨갱이 소리 듣고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고, 사회적으로 차별당하고 살았으니 유족들에게 힘든 건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 그의 집엔 유난히 과거사에 대한 책이 많았다.
ⓒ 김영선
그는 대전 위령제를 위해서도, 본인을 위해서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국 민간인 학살 위령제는 모두 참석한다.

"전국 유족들 모두 다 같은 마음 아니겠어요, 다니면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여러 자료를 보면서 여러 민간인 학살 사건 경위에 대해서도 공부도 하고요."

그는 진실 규명을 위해 중요한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당시 교도소 재소자 명단만 나오면 사건 해결은 금방 될 텐데, 서류가 안 나오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죠. 희생자 명단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유족들도 나오는 것 아닙니까."

당시 대전 교도소에는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청주나 공주 교도소에서 대전으로 이감되어 있던 사람들도 많아 신원 파악이 어렵다. 한편, 그는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에 고마워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과거사위원회가 출범한지 3년입니다. 하지만 몇십 명의 직원이 전국에 백만이 넘는 희생자들을 어떻게 다 조사합니까. 살인사건 하나에도 형사들이 몇 명이 붙어서 조사하는데. 전폭적인 정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사건해결은 점점 늦어지기만 할 것입니다."

이어 "개인의 한을 풀려면 한도 끝도 없다"며 "전국 백만 유족이 섭섭하지 않게 사건 해결의 틀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시대를 잘못 만난 피해자"

당시 군경, 즉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냐는 질문에 '우리 모두 시대를 잘못 만난 피해자'라고 했다.

"유족들도 피해자지만 가해자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소위·중위·대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상부 지시에만 따랐을 뿐이겠죠. 그 사람들 미워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본인들도 죄책감에 고생했을 겁니다."

그는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 유족들의 명예회복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차 강조했다. 유족의 상처난 마음이 보상해줘서 사라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직도 피해의식에 묻혀 권리를 찾지 못하는 유족 분들, 모두 힘을 합쳐서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년 전 부인이 별세한 후부터 유족회 회장을 맡은 그는 "전에는 집 식구가 '속상하고 신경써가면서 일하냐'는 말에 회장 할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이제껏 회장을 역임한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그는 "유족회원들이 너무 열심히 일해 줘서 오히려 편하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며 미소를 지었다.

태그:#산내학살, #유족회, #김종현, #민간인학살, #대전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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