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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건배를 외치는 네 명의 기자. 아니 세 명의 기자. 난 찍사였다.
ⓒ 안소민

사건은 내가 쓴 '묏동전' 관련기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소장환 기자가 기사를 보고 난 뒤 쪽지를 보내주었고, 우리는 언제 날 잡아서 소주나 한 잔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지난 4월 열렸던 지방투어 행사 뒷풀이가 미진했던 탓일까. 그날 행사에 참여했던 4명의 기자(김현·박주현·소장환·안소민)가 바쁜 시간을 틈내어 자리를 함께했다.

때는 7월의 마지막 금요일, 전주의 한 막걸리집에 뭉친 네 명의 기자들은 몇 순배 막걸리 사발이 도는 사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기사 이야기, 취재 뒷이야기 등을 자연스럽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정작 지역투어 행사 때는 낯설고 쑥쓰러워서 상대방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다.

[이야기 하나] 삶의 힘, 우리들의 '행복한' 기사

사건의 발단이 나의 묏동전 기사('묏동'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6월 21일자)였던 만큼 이야기는 그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장환 기자는 2001년 돌아가신 아버지를 산에 묻고 바라본 묏동이 잊혀지지 않는단다.

그리고 몇 년 후 만삭의 아내의 배를 보았을 때 그 반원의 모양과 묏동의 반원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개의 반원을 합치니 비로소 둥그런 하나의 원이 탄생하고 우리의 삶도 그 안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당시 소 기자로부터 이같은 내용의 쪽지를 받았을 때 나는 '와~ 이런 해석도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나서 며칠 후, 취재차 김지연 작가를 다시 만나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 작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크게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면서 굉장히 놀라움을 표했다.

이날 모임에 만나 소 기자에게 김지연 작가의 말을 전했더니 조금은 쑥쓰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동석했던 박 기자, 김 기자도 모두 소 기자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 기자의 설명에 의하면 서양식 묘지와 달리 우리나라의 묏동의 반원 모양은 '부활'을 의미한단다.

역시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는 단순한 지식이나 이론이 아닌 진솔한 삶의 현장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그러한 충고는 좋은 기사를 쓰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이야기 둘] <화려한 휴가> 봤어? 우리 옛날엔

▲ 소장환 기자님(좌측)과 박주현 기자님. 김현 기자님의 얼굴이 궁금하신 분은 김현 기자님의 기사를 읽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 안소민
이야기는 어쩌다 영화로 넘어갔다. 아마 내가 먼저 <화려한 휴가>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다.

소 기자는 며칠 전 대학신문사 기자들이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난 후 많이 울었다는 말을 듣고 그들에게 운 이유에 대해 물었단다. 단순히 "영화가 슬퍼서"였기 때문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소 기자와 나머지 두 기자들은 5·18과 6·27민주항쟁 등 현대사에 관한 지난날의 기억의 편린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세 명의 기자는 학생이거나 군복무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 기자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소 기자의 활약상(?)을 들으며 우리는 당시와 지금의 대학가를 비교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소 기자와 나는 학번상으로는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내가 보기엔). 그러나 학원가의 분위기는 이미 9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급속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도중 재미있는 사실 하나. 소 기자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자신을 담당했던(?) 형사를 최근에 다시 만났다고 한다. 물론 취재차였다. 학생운동 용의자와 담당형사였던 관계가 10여년이 흐른 지금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로 바뀐 것이다. 세상사란 다 그런 것인가 보다.

문득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호(설경구)는 자신이 형사 시절 처음으로 고문했던 운동권 대학생 박명식을 세월이 많이 지난 어느날 음식점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날 영호는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된 박명식에게 묻는다. '아직도 삶은 아름답냐'고. 마치 인생의 해답을 찾듯이.

[이야기 셋] 원고료, 어떻게 하십니까?

소 기자가 최근 <오마이뉴스>에서 모은 원고료로 카메라 한 대를 장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고료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김현 기자는 아직까지 한 번도 원고료 청구를 하지 않은 상태. 조금 더 모아지면 딸아이와 금강산 여행을 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박 기자 역시 지금까지 보관만 해놓은 상태라고 한다. 박 기자 이야기가 재미있다. 처음 박 기자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쓸 무렵, 가족들은 박 기자의 원고료에 별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었더랬다.

그런데 이게 차츰 돈이 모아지고 목돈이 되어가니 태도가 슬슬 변하기 시작하더란다. 요즘 박 기자의 아들은 돈 모아서 중국엘 가자고 조른단다. 부인은 '오마이'를 새겨넣은 목걸이를 하나 해달라고 조르는 중.

소 기자는 원고료가 더 모아지면 렌즈를 하나 장만할 계획이라고 한다. 처음엔 취재차 쓸 용도로 구입한 카메라였지만 지금은 24개월된 딸아이 찍어주는 재미가 더 크다고 한다. 나는? 더 좋은 양질의 기사를 쓰기 위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해두자.

큰 돈을 벌기 위해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는 시민기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고료가 주는 이러한 뜻하지 않는 톡톡튀는 사건사고(?)는 기사쓰기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도 한다.

[이야기 넷] 내가 쓴 기사가 생나무?... 솔직히 황당했다

▲ 안주는 푸짐했다. 기본적인 막걸리 안주에 사는이야기, 취재이야기, 기사이야기 등으로 상다리는 부러지기 일보직전.
ⓒ 안소민
자기가 쓴 기사가 생나무 되어본 적 있나요? 대답은 '있다'였다. 의외였다.

특히 현직 언론인으로 있는 박주현 기자나 소장환 기자의 경우, 자신들의 기사가 생나무였을 때 창피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한 조금은 미묘한 감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어쨌든 기사로 '먹고사는' 그들이 아닌가. 그것은 나나 김현 기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러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에서 원하는 기사가 어떤 색깔의 어떤 형태의 기사인지 감을 잡게 되었다고 했다. 그 뒤 생나무 신세가 되는 일은 없었지만, 가끔은 너무 일정한 틀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고. 그 말에는 모두들 동감을 표했다. 박주현 기자는 지금도 생나무 시절의 기사를 가끔 보곤 한단다.

생나무 기사에 대한 관심은 의외로 높았다. 사실 나는 생나무 기사는 거의 보지 않는편이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세 기자는 모두 생나무 기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몇몇 기자의 생나무 기사는 애독할 만큼 꼭 챙겨본다고.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있는 박주현 기자의 말에 의하면 생나무 기사는 언론사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텍스트로 삼아야할 교본이란다. 생나무 기사를 보면 좋은 기사가 보인다는 것. 그것은 소장환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들에게 기사를 쓰고 난후에는 일단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려보라고 충고한단다.

[이야기 다섯]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사쓰기

박주현 기자는 얼마 전 강준만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만드는 '선샤인뉴스('쨍하고 떴습니다'·7월 7일자)'를 다룬 기사를 올렸다. 그리고 히트를 쳤다. 지역언론별곡을 수년째 연재하고 있는 박주현 기자, 도대체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이번 '선샤인뉴스'는 지역언론별곡 200회째를 장식한 기사다.

처음에 연재를 시작할 때는 자신도 이렇게 길게 쓰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 기사는 언제 올라오냐며 기사를 독촉하더라는 것이다. 그 뒤부터 책임감을 갖고 쓰게 되었다.

이번 선샤인뉴스 건도 제자들이 <오마이뉴스>에 실어달라고 특별히 부탁해서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참고로 박주현 기자는 전북대학교 신방과에서 강의를 맡고 있으며 지역언론별곡은 2005년 2월 2일자로 연재를 시작했다). 이제 지역언론별곡은 박주현 기자의 중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 직업기자가 갖지 못하는 시민기자만의 자유로움과 독창성이 좋다는 소장환 기자가 퇴근 후 집에 와서도 또 다시 기사를 작성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

서평 기사를 주로 쓰는 김현 기자나 나도 그렇다. 서평을 쓰는 일이 때로는 책읽는 즐거움마저 빼앗아가는 고되고 지친 작업일지라도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이미 내 삶의 일부이자 전부가 되어버린 글쓰기.

"저만 그런가요? 모두들 다 그렇지않습니까?"라는 박주현 기자의 질문에 우린 대답 대신 건배를 청했다.

▲ 막걸리집 벽면에 빼곡히 적힌 낙서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이야기꾼이 된다.
ⓒ 안소민
막걸리의 기운에 취한 것인지, 다섯 시간의 이야기 속에 취한 것인지 막걸리집을 나설 때는 약간은 조금씩 취해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주 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시민기자들이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삶의 현장이자 취재의 현장인 '일상속으로….

덧붙이는 글 | 당초, 기사 작성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얼굴 한 번 보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것도 좋은 기사거리가 될 수 있다는 일종의 직업병(?)이 발동, 나머지 세 분에게 양해를 구한 뒤 기사 작성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야기를 녹취한 것도 아니고 수첩에 일일이 메모를 한 것이 아니어서 내용이 엉성하고 중언부언한 것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장치가 더해졌더라면 기사는 실했을지 모르나, 모임의 분위기는 경직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녹취를 했다 하더라도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막걸리집 분위기 탓에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으리라.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소재는 풍부했다. 여기에 다 싣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기억나는 대로, 인상적이었던 대화들을 위주로 기사를 작성해보았다.


태그:#시민기자, #지방투어, #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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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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