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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도에 인편으로 전해받은 숙부님 일가의 모습.
ⓒ 정환창
그해 팔월이었다고요? 전쟁났단 소리 무성하더니 얼마 안 있어 생경한 인민군들이 동네로 몰려들어왔다지요.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북으로 끌려가실 적에 모든 사람들이 동네입구 장승배기로 몰려나와서 어떻게 하든 눈치껏 빠져나와야 산다고, 꼭 그리하라고. "그렇게 하지요"하고 떠나고서는 아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무심한 세월은 앞 냇물과 더불어 흐르고 동네 굿판이라도 벌이는 날이면 떠나보낸 아들이 그리워 남아있는 어머니는 쌀, 보리쌀 아끼지 않고 됫박으로 퍼주면서 우리 둘째, 북으로 간 우리 둘째 언제 돌아오겠냐고 무당의 옷소매를 붙잡고 물었다네요.

"걱정 마셔. 머지않아 통일이 되어 어미 옆에 나란히 앉을것이니께."

이 말 한 마디에 어미는 잊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었던 그 아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흐르는 세월에 삭아지는 것이 사람 목숨 아니겠습니까.

1978년이었어요. 칠십 여덟 되시던 해 추석날 저녁, 할머니는 그렇게 눈을 감으셨답니다. 그날 이후로 마나님 산소를 오가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사시던 할아버지께서는 꼭 석삼년 지나서 뒤를 따르시고요. 동짓달 스무 사흗날이었습니다.

숙부님!
엊그제 같은데 그 사이 또 4년이 흘렀습니다. 2003년 2월로 기억합니다.

같이 올라가신 서씨네가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지요. 그 남쪽 동생분이 북쪽 형님으로부터 건네받았다며 가져 온 사진 뒤편에는 손윈지 아랜지 모를 사촌이 적어준 것으로 생각되는 주소가 적혀있었어요.

평북 개천….

지도를 펴봤습니다. '걸어서 하늘까지' 같이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지는 곳. 그 난리통에 어찌 그리 멀리 가셨는지요?

꼭 오십하고도 사년, 스무 세살 젊은이의 모습은 간데없고 하얀 백발에 늙은 군인인 양 가슴에 훈장 여러개 달고 가족들과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으로 숙부님 소식은 우리한테 전해졌습니다.

생전의 아버님한테 들었습니다. 한 집에서 한 명만 가면 된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마'하던 형의 팔을 붙잡고 "형님한티는 형수랑 조카가 있으니께 홀몸인 지가 갈께유"하고 나서던 길.

형님, 곧 저의 아버지를 기억하시는지요? 날로 깊어지는 병환으로 자주 정신이 혼미하시더니 어느 날 불현듯 그러시더라고요.

"이북에 있는 동생이 내려와서 방송국에서 같이 노래를 불렀어."

7·4공동성명이니, 남북적십자 회담이니 하는 소리 들릴 적마다 혹여 바람결에 '이북으로 간 아우' 소식 들을까 귀 기울이다 남몰래 한숨 내쉬며 '내가 갔어야 했는데' 하시면서 눈물을 떨구시더니 병환으로 사경을 헤메실 적 걱정스레 들여다보던 제게 말씀하셨어요. 

"삼촌이 뭐라구 그래던가유?". 짐짓 여쭤보는 제게 '왜 이제서야 왔냐구, 왜 이제서야 왔냐구 그랴…….'

그 말씀을 끝으로 이튿날 새벽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어요.85년 시월 초이레의 일입니다.

숙부님!
보내주신 사진을 가만 들여다봅니다. 아들 형제에 딸 셋, 이렇게 오남매를 두신 모양이지요? 초등학교 다닐 적 우리가 살던 집과 흡사한 슬레이트 지붕, 야트막한 민둥산하며 잎이 다 떨어진 플라타너스 늘어선 길.

다섯 해 전의 사진이니 꼭 다섯 해 만큼 더 늙으셨겠지요. 모든 것이 우리 살던 옛날 그 모습인데, 세월만 57년 앞질러 이렇게 사진 속에서 웃고 계신건지요? 

다가오는 8월 3일, 북으로 가신지 꼭 오십하고도 칠년 되는 날이지요? 숙부님을 기다시던 분들 하나 둘 먼 길 떠나시고, 이제 남은 사람은 당시 나이 어린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 젊은 형수 곧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사진을 받은 그날 이후 이산가족 상봉신청 해놓고 소식 올 때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미호천에서 바라 본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모습.
ⓒ 정환창
숙부님!
사진 보고 계신지요? 고향의 들녘입니다. 바로 앞논이 베락배미 여덟마지기 논자리고요.

저 멀리 보이는 산, 꿈에도 잊지 못하실 음봉산, 동네 뒷산입니다. 고향의 들녘은 저리도 푸르른데 숙부님께서는 여전히 거기, 그렇게 살고 계신건지요?

살아계심에 대한 기쁨과 살아계셔도 만나뵐수 없다는 절망감. 그날 이후 이렇게 절반의 희망으로 살아낸 오늘 하루가 저뭅니다. 기다리시며 오늘날까지 살아내셨듯이 사시는 날까지 기다리셔야지요. 어떻게든 살아 계셔야합니다. 뵈올 수 있는 그날까지 부디 건강하십시오.

- 고향에서 조카 올림

<덧붙이는 말>

시대는, 스무 세살 젊은이를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남겨놓도록 한 채 북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지나간 세월이 57년, 이제 그의 나이 팔십이 되었고 살아있다고 믿으면서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와 맏형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누군가가 그를 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그를 기다리는 형제들과 친지들, 서로 만나서 그의 부모와 형이 잠들어 있는 저 음봉산까지 고추잠자리 어지럽게 나는 들판길을 손잡고 같이 걷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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