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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10월혁명 4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송경령과 모택동. 송경령 고거 안의 기념관에 걸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첫째는 돈을 사랑하고, 셋째는 권력을 사랑했다. 그리고 둘째는 조국을 사랑했다."

대부호 공상희와 결혼한 첫째 송애령, 장개석(장졔스)과 결혼한 셋째 송미령 그리고 손문(쑨원)과 결혼한 둘째 송경령(쑹칭링)의 세 자매를 두고서 흔히 하는 말이다.

이 중에서 조국을 사랑했다는 송경령(1892~1981년)은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인지 아직도 중국인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베이징시 시청구(區)에 있는 송경령 고거(故居, 꾸쥐)에서 그에 대한 '조국' 중국의 보답을 느낄 수 있다. 7월 28일 오전에 이 송경령 고거를 들러보았다.

▲ 송경령 고거 내의 정원. 직원들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 김종성
서울 지하철 2호선 같은 순환선인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지슈이탄역(驛)에서 내려 택시로 기본요금 10위엔(약 1300원) 정도의 거리를 가면 '호우하이'라는 큰 호수가 나오고 그 연변에 송경령 고거라는 크고 화려한 가옥이 보인다.

이 집은 송경령이 1963년 4월부터 1981년 5월 29일(사망일)까지 살던 곳으로서, 원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아버지인 순친왕 소유의 화원(花園)이었다. 송경령이 사망한 후인 1981년 10월에 중국정부는 이 집에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송경령 동지 고거'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부여했다.

남편 손문은 현행 중국헌법에 그 이름이 나오고 부인 송경령은 중국 명예주석이란 영예를 얻었으니, 20세기 중국에서 이 부부만큼 화려한 삶을 살다 간 커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26세라는 나이 차이도 특이하지만, 이 부부는 그 삶 자체가 그저 특별하기만 하다.

▲ 송경령 고거 안의 연못.
ⓒ 김종성
송경령 고거의 매표소(입장료는 20위엔)를 지나 대문 안에 발을 내딛는 순간, 정말로 대단한 집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크기도 물론 대단하지만, 아름다운 전각에 커다란 호수 그리고 울창한 숲은 이곳이 '작은 낙원'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할 정도다. 중국정부와 모택동이 송경령에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윗줄 왼쪽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송경령이 캐나다 빅토리아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증과 졸업복 ▲손문이 송경령에게 결혼예물로 보낸 권총 ▲손문이 즐겨 사용하던 모자 ▲모택동이 송경령에게 선물한 <모택동 선집 제5권>. 송경령 졸업복은 실제로는 늘씬하지만, 사진 편집과정에서 펑퍼짐하게 나왔다.
ⓒ 김종성
그리고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된 기념관 안에는 송경령 부부의 애장품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송경령이 캐나다 빅토리아대학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증과 졸업복, 손문이 송경령에게 결혼예물로 보낸 권총, 손문이 즐겨 사용하던 모자, 모택동이 송경령에게 선물한 <모택동 선집 제5권> 등등.

또 부분적으로 공개되어 있는 사무실과 응접실 등은 송경령이 말년에 이곳에서 그런 대로 꽤 바쁜 공적인 생활을 보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가 실권도 없이 다소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의 고거라는 화려한 명칭에 걸맞게 이 집은 송경령이 혼자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넓고 화려한 집이었다. 차고의 넓이가 웬만한 아파트 한 동 정도는 되는 것을 보고 이 집의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첫째는 돈을 사랑하고 둘째는 조국을 사랑했다는데, 둘째도 돈을 사랑한 건지 아니면 돈이 둘째를 사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말년에 둘째 송경령과 돈이 함께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응접실의 양쪽 벽면에 서로 마주보며 걸려 있는 모택동과 손문의 사진을 보면서 갑작스레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송경령이 모택동을 사랑했다면…'이라고 말이다. 응접실 소파를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남자'가 마치 연적 관계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 응접실 양쪽 벽면에 걸린 손문 사진과 모택동 사진. 양쪽 벽면을 찍은 사진을 붙여서 편집한 사진이다.
ⓒ 김종성
나이로 보더라도 손문(1866~1925년)보다는 모택동(1893~1976년)이 송경령(1892~1981년)에게 더 잘 어울리는 배우자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손문에 대한 혹은 손문과 송경령에 대한 지나친 모독일까.

송경령이 여자로서보다는 정치가로서 손문이라는 또 다른 '정치적 동지'를 선택한 점을 고려할 때에, 그가 모택동 같은 혁명가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딘가 '심정적 변화'를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국 수립(1949년) 이후에는 결국 송경령이 모택동의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도 전혀 비현실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송경령이 손문의 부인으로서 산 기간(1914~1925년)은 불과 11년밖에 안 되지만, 송경령이 모택동의 정치적 동지로서 산 기간(1949~1976년)은 무려 27년이나 된다. 송경령이 한 여자로서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점을 볼 때에, 모택동도 손문 못지않게 송경령에게 중요한 동지였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남자 모두 자기 조국을 특별히 사랑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송경령처럼 중국을 남달리 사랑한 여자에게는 두 사람 다 매력 있는 남자로 비칠 만했을 것이다.

모택동과 손문이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

▲ 1958년 상하이를 방문한 김일성 북한 주석과 함께 건배를 하고 있는 송경령. 기념관에 걸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그런데 모택동과 손문 두 사람 다 중국을 특별히 사랑했다지만, 두 사람의 중국 사랑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본질적 차이점이 있다.

첫째, 어떤 경제체제를 추구했는가에 있어서 두 사람은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모택동은 공산주의 시스템을 중국에 도입한 데 반해, 손문은 서구식 자본주의 시스템을 중국에 도입하려 했다.

우리가 이미 겪어본 바와 같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간에 어느 체제도 결코 완전한 시스템은 아니므로, 두 사람이 각각 어떤 체제를 선호했든 간에 그 점을 놓고서 가치평가를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체제문제는 중국을 사랑하는 방식상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가치평가는 이어지는 두 번째 차이점에서 논의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있어서 두 사람은 역시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모택동은 중국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혁명을 달성한 데 반해, 손문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외세의 힘을 빌려 혁명을 달성하려 했다.

손문의 경우 1911년 무창봉기 당시 영국·프랑스의 차관을 빌리려다가 이 나라들의 외면을 받은 적이 있고, 이후에는 러시아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외세 의존적 한계를 보였다는 것이 오늘날 중국 학자들의 평가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시스템의 선택문제보다도, 두 사람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방식의 차이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모택동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고, 손문은 남의 힘을 빌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성공 여부가 갈렸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황이 급할 때에는 남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런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 문제해결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람은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모택동도 러시아의 도움을 빌리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 중국 민중의 역량을 바탕으로 혁명을 성사시킨 인물이라는 점에서 손문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 송경령이 상해에 거주할 당시인 1961년 5월 11일 송경령의 집을 방문한 모택동. 기념관에 걸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 김종성
어떤 사람들은 "미약한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강대국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강대국을 밀어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강대국이 도움을 제공할 때에는 처음부터 뭔가 계산이 있기 마련이다.

강대국은 자국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도움을 제공하고, 무창봉기 당시의 경우처럼 자국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손문을 버리듯이 가차 없이 상대국을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설사 강대국의 도움을 빌려 문제를 해결했다고 치더라도, 그런 경우 강대국은 그 성과물을 독식하려고 할 것이다.

사실, 약자가 강자를 이용하여 뭔가 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순진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바보가 아닌 이상 약자에게 이용당할 강자가 과연 존재할까.

손문이 그런 외세의 속성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어쨌든 간에 행동으로는 강대국 의존적 경향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는 손문의 내면에 자기 자신(손문 자신과 중국)에 대한 끈질기고 확고한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은 급할 때에 남이 빌려주는 돈에 '독'이 묻어 있다고 판단되면, 당장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남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하고 스스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경향이 있다. 모택동은 바로 그 점에서 손문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모택동과 손문의 이러한 본질적 차이점 때문에, 송경령 고거의 응접실에 걸린 두 남자의 사진을 보면서 '차라리 송경령이 손문 대신 모택동을 사랑했더라면 어땠을까'는 생각이 든 것이다. '보다 더 철저하고 유능한 혁명가인 모택동이 송경령 같은 걸출한 인물과 동지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걸'이라는 그런 아쉬움이었다. 손문에게는 너무 미안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란 송경령에게는 나이를 떠나서 손문 같은 귀족적인 남자가 더 편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서민적인 모택동은 송경령에게 별다른 매력을 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 어찌 생각해 보면, 송경령 같은 적극적인 여자에게는 모택동 같은 자기 충족적 남자보다는 손문 같은 외부 의존적 인물이 더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모택동처럼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람에게는 송경령 같은 여자가 '모성본능'을 별로 못 느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A녀와 B남이 드라마 속의 커플이 되기를 바라지만 당사자인 A녀는 C남을 배우자로 선택할 수 있듯이, 송경령이 정치적으로 누구와 더 잘 어울리더라도 결국에는 그가 손문을 선택하고 말았다는 엄연한 사실의 힘을 느끼면서 송경령 고거를 빠져나왔다.

태그:#송경령, #손문, #모택동,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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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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