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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 가족의 단란한 모습
ⓒ 저자 가족 제공
<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라졌어요>(알마)를 읽고, 저자 김정희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열망'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하다. 하지만 일을 해야 하는 처지인지라 김정희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터. 아쉬운 마음을 전화와 서면으로 달래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이유는 '책' 때문이다. <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라졌어요>에 어떤 내용이 있기에 그러했던가? 첫 번째는 자식을 통해 만족감을 얻으려는 그 삐뚤어진 심리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아이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김정희 또한 그랬다. 많은 부모들이 그렇듯 아이가 높은 점수를 받고, 남들보다 뛰어난 학업능력을 보여주기 바랐다. 그런 시간이 흘러, 아이가 고통을 호소했다. 김정희는 별일이 있겠거니, 하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아이에게 감기약 많이 먹이세요?"라고 묻는다.

김정희는 그런 일이 없던 터라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의사가 "그럼 스트레스성 위염인가 보네! 콩알만한 놈이 뭔 고민이 그리도 많다니!"라며 김정희를 쳐다봤다고 한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늘 아이가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번번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맹목적인 시선으로 아이의 작은 소리를 무시했다는 것에 너무나 맘이 아팠어요. 자책감도 심했고요. 아이의 작은 부분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정작 제가 열 달을 품어 낳고 젖 물리며 키운 내 아이가 어디가 아픈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오랜 시간 저를 용서하기 힘들었어요. 왜 그때는 엄마라는 이름에 전지전능한 신격의미를 겁도 없이 부여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진실한 모성으로 아이에게 다가가기로 한다. 그러자 아이가 친절한 엄마의 모습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한다.

"그동안 사랑이란 열병으로 아이에게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본 순간, 그동안 제가 아이에게 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순간, 제 마음에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참 부모는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랑해야 하는 것이란 걸 마음에 심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개과천선'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맞는 표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그녀가 그때부터 아이를 위해, 순수한 모성으로 다가갔다는 것을 말이다. 다들 알지만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그녀가 실천한 것이다.

텔레비전을 없애자! 그 다음에는?

▲ <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아졌어요> 겉표지
ⓒ 알마
김정희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이유 두 번째. 집에서 텔레비전을 치우고 대신 서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라졌어요>에서 텔레비전이 큰 문제임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가족들이 멍하니 텔레비전만 보는 그 광경, 대화가 없어지고 전자음만 요란한 집안 풍경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의 소소한 분쟁의 원인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죠. 가족을 옮길 수 없는 이상, '폭탄'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잘못하다간 제거요원인 저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날라 갈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시작 전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고 사는 건 힘들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흔들리지 않기로 했고, 그때부터 저는 '전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전사.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라졌어요>를 보면 텔레비전에 대한 가족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여러 번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김정희가 그것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니 가족의 반발이 오죽했을까. 그래도 그녀는 텔레비전의 해악과 같은 자료까지 찾아보는 열성을 갖고 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 노력이 가상했기 때문일까? 그 일은 잘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뜻밖의 복병이 있었다. 텔레비전이 없을 때, 아이들에게 그것을 대신하는 뭔가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복병을 만난 김정희는 어떻게 했을까? 김정희는 "제가 어릴 적에 즐겼던 놀이를 생각해 내며 아이들을 위해 온 몸을 바쳐 함께 놀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작정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김정희는 이때 책을 생각해낸다. 일반 주부가 가족과 함께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은 어딜까? 그것은 도서관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단지마다 돌아다니는 이동도서관을 이용했는데 이게 감질맛 나는 거예요. 그때 지인을 통해 이웃마을에 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차로 가야 하는 꽤 먼 거리에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남편과 아이들, 모두 함께 갔어요. 도서관에서 가족들 모두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도서관은 책대여 뿐만 아니라 영화 상영이나 구연동화 등의 행사도 하잖아요. 하루를 보내기에 그리 지루하지 않은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을 알았어요. 아이들의 태도요. 아이들은 책도 좋지만, 엄마 아빠랑 함께 한다는 것을 더 좋아했거든요."

가족이 함께 도서관에 가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 김정희는 도서관에 가는 것과 별도로 집 안에 서재를 만들기로 한다.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에 책을 두기로 한 것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거실을 서재로!'를 직접 실천하려고 한 것이다.

"처음부터 거실을 서재로 꾸민다는 거창한 계획은 없었어요. 어느 날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아줌마 특유의 저돌적 용기에 힘입어 그냥 한나절 만에 작은 서재를 만들게 되었어요. 대단한 걸로 시작한 건 아닙니다. 아이들 방에 있던 책상 책꽂이와 전집류 살 때 친절한 방판 직원의 서비스로 얻은 책장으로 꾸렸어요. 그리고 틈틈이 재활용 분리 하는 장소에서 이웃들이 버리고 간 작은 책장들을 주워 다가 벽돌 붙이듯 이어 갔습니다.

당연히 사이즈며 높이, 색깔과 재질이 달라 들쑥날쑥 하지만 그것이 주는 편안함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랍니다. 너무 고가의 책장 때문에 아이들이 담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보이지 않게 있거든요. 모든 일에 그렇듯 누구나 본전 생각을 하게 되고 그 본전 생각은 아이들에게 잔소리로 드러나게 되니까요!"

그녀의 거실 풍경을 그려본다. 들쑥날쑥한 책장들로 가득한 그곳. "저희 집 책장에는 분리수거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게 많아요"라는 말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그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거실을 서재로 만들고 싶다면...

'거실을 서재로!'라는 운동이 유행이다. 이것은 꽤나 듣기 좋은 말이지만,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실을 서재로 만들려다가 아이들이 도와주지 않아 실패했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그녀는 해냈다. 비결은 무엇인가?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가? 그녀는 평소에 그런 질문을 들으면 한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들려줬다.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가정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거실 한가운데 두고 '컴퓨터 하지 마라!', 'TV 좀 그만 봐라!' 라고 하는 건 한창 놀이에 재미를 붙일 나이의 어린 아이를 보기만 해도 발을 담그고 싶은 갯벌 한 가운데 아이를 풀어 놓고 '발에 흙 묻히지 말고 놀아야 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정에 도서관을 만들고 가족의 정다운 대화를 회복하는 것은 아이들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닮아가며 자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문제가 있어 보이나요? 부모 자신의 문제가 아닐지 생각해보세요.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저자 김정희는?

1969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산업대에 들어갔지만 전공인 재료공학이 재미없어 중도에 그만두고 사설기관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유아교육을 공부했다. 틈틈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같은 일간지와 <사람과 책> 등의 잡지나 방송에 글도 썼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는 보통 엄마로 충남 아산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김정희의 말에 거실을 서재로 만들자는 운동을 생각해본다. 어른들은 무엇 때문에 거실을 서재로 만드는가? 아이들이 책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독서 감상문 잘 써서 대회에서 수상하도록 하기 위해? 또는 어려서부터 논술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이유로 서재를 만들려 한다면, 그건 아이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는 것에 불과하다. 아이를 아프게 하는 또 하나의 고통에 불과하다. 김정희의 말에 그것을 새삼 생각해본다.

그녀는 스스로 '시골 촌부'라며 자신의 말을 "객관성이 전혀 없고 검증되지도 않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다. 객관성, 검증. 어차피 그런 것이 가족끼리의 대화를 풍성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삭막한 경쟁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로해주는 건 아니니까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내가 따지고 싶은 것은 하나. 때로는 '시골 촌부'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주부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예컨대 텔레비전 보면서 아이에게 "들어가서 공부해!"라고 외치는 부모나 그 밑에서 아파하는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지금,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누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웠는가

이링 페처 지음, 철학과현실사(2005)


태그:#김정희, #서재, #텔레비전, #교육,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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