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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오세영의 만화 <토지>(박경리 원작)가 원작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만화가 이두호는 십수 년 전 그려낸 <임꺽정>(홍명희 원작)을 최근 프랑스에서 출간했다. 문학의 오묘한 기운을 껴안고, 만화의 찬란함을 입고 이들 수작 만화가 주목받고 있다.

"만화가 애들만 보는 것이라고?" -<토지> 1부 출간한 오세영

▲ 만화 <토지>
ⓒ 오세영
"풀 컬러의 미려하고 아름다운 장면 장면과 옛 고향을 보는 듯한, 손에 닿을 듯한 전원풍경과 뛰어난 인물묘사와 사실적인 소품묘사는 원작 소설에서 만났던 모습들을 100%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한국 만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것입니다."(momikuk, 마로니에북스 홈페이지)

600명도 넘는 캐릭터를 벽에 붙여 놓고 밤이고 낮이고 들여다봤다. '토지' 속 겨울을 살 때쯤이면 어느새 돌아온 창밖의 여름 풍광이 생소하기도 했다. 새삼 야윈 모습을 하고 오세영이 <토지>(전 16권, 마로니에북스) 1부(7권)를 내놓았다.

오세영표 만화 <토지>를 만난 독자들의 반응은 컸다. 단숨에 1부(전 7권)를 읽어낸 그들은 16권이 아니라 25권이나 30권으로까지 시리즈가 이어졌으면 하는 주문까지 하고 있다. 지난달 출간된 책은 벌써 2쇄에 돌입했다.

이렇게 뜨거울 줄 예상했을까. 오세영은 뜻밖이라는 듯 부끄러워한다. 칭찬과 비난에 모두 인색한 박경리 작가마저도 그의 데생과 각색에 반해버렸다. 지난달 그림 출간 후 선생을 뵈러 갔을 때 선생은 두 손을 뜨겁게 맞잡으며 "애썼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안 만나는 게 좋은데, 사실 '토지' 작업이 다 끝나면 만나려고 했어요. 선생님의 몇 마디가 내가 작업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어요.(웃음) 내 뜻대로 각색을 하거나 연출할 수 없으니까요."

만화가가 되기도 전인 이십대 때부터 그는 언젠가 <토지>를 만화로 옮기겠노라 결심했었다. 문학에서 만화로-'장르 옮김'을 통해 만화가 갖는 장르의 매력을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원작의 고유한 맛을 망가뜨린 TV와 영화들을 보면서 그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리고 눈과 손은 바빠졌다. 사계절 풍경, 인물의 심리, 우리 정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컷마다 살아있는 생생한 고증의 힘이야말로 오세영판 <토지>의 진짜 매력. 오세영은 소장하고 있는 조선 말기 사진집을 기초자료로 당시의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반닫이, 옷고름 하나도 지역별로, 신분별로, 시대별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고민은 더욱 컸다. 쪽을 찐 어머니와 잠뱅이 입으신 아버지가 소 끌고 쟁기질하던 풍경, 가을에 초가집 이엉을 걷어내면 나던 냄새들, 심지어 밭에 뿌려진 똥 냄새까지.

▲ 만화가 오세영
ⓒ 홍지연
사실 '오세영'이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산업화 이전의 농촌 사회에 대한 예민한 시각적 감수성과 기억력을 갖춘 그는 고건물에 대한 일가견까지 있어 웬만한 자료 없이 무난히 당시의 건물들을 척척 그려낸다.

오세영이 이렇듯 유난히 구한말과 해방 전후의 시대에 천착해온 것은 그것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만화를 통해 후세에 전해줘야 할 의무가 있어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토지>는 그 총천연 실험의 장이 될 것이다. 보는 만화가 아니라 읽는 만화,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만화다.

"그림은 외형만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 냄새, 느낌, 감정들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지금 만화 그리는 사람들 전부 외형만 그리고 있어 안타깝죠."

대부분 사람들이 아직도 만화를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선입관에도 그는 화가 난다. <토지>의 몇 장면에 대해서도 "애들 보는 것인데 왜 이리 야하냐" 했던 주변의 말에 그는 단박에 "만약 이게 문제가 되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냥 가라"고 했다고.

"소설은 설혹 '그런' 장면이 나와도 아이들에게 권하면서 왜 만화에만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만화가 아이들의 전유물도 아닌데 말이죠. (정말 더 잘 그리고, 더 노력해서) 그런 관념들을 깨뜨리고 싶어요. 지적인 감동을 줄 수 있는, 만화를 보고 자랐지만 이젠 보지 않는 어른들도 다시 눈을 돌릴 만한 만화를 그려야겠죠."

1부 7권에 이어 2부가 3권, 4부와 5부가 각 2권씩 나오게 될 <토지>는 전체 5부 16권으로 완성될 예정이다. 프랑스 카스터만사도 오세영의 <토지>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 <부자의 그림일기>나 <오세영-한국단편소설과의 만남> 등에 이어 <토지> 역시 곧 해외 판매가 기대되고 있다.

이제 막 2부 각색 작업에 돌입한 오세영은 '한 컷이 갖는 힘'에 더욱 열중하기 위해 2년 전 도시생활도 접고 안성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상에 올릴 푸성귀를 가꾸는 것 외에 나머지 시간은 온통 만화에 힘을 쏟고 있다. 오세영이 일궈낼 거대한 '토지'가 새삼 기다려진다.

만화(Manhwa) 가진 '멋' 안고 나아가자 -프랑스서 <임꺽정> 출간한 이두호

"이두호는 전통 한복과 당시의 엄격한 계급사회에 대한 엄청난 자료조사에 많은 공을 들였으며 그 결과 정확한 의복과 장식을 재현해낼 수 있었다. 따라서 교육적인 요소도 있는가 하면 유머러스한 부분 또한 이 역동적인 영웅담의 매력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한다."
-프랑스 만화 전문 사이트 '뚜떵베데' 중 만화 <임꺽정>을 소개하는 말


▲ 이두호는 유럽 3개국에서 <임꺽정> 프랑스 출간 기념 사인회를 했다.
ⓒ 오렌지에이전시
'이두호'라는 이름 하나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사인 대기용 번호표'를 쥐어 든 그들과 함께 이두호는 하루 4~5시간에 달하는 '사인회 강행군'을 벌였다.

만화 <임꺽정>(이두호 작, 전 32권)이 지난 4월 중순 파케출판사를 통해 스위스에서 정식 출간됐다. 현지 제목은 우리나라 말로 '의적'이라는 뜻이다. 이두호가 10년 전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만화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번 사인회는 출간기념으로 4월 말에서 5월 초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등 유럽 주요 국가에서 열린 것.

그의 붓펜 끝에서 대나뭇잎이 쳐질 때, 댕기 단 처자가 치맛자락을 날릴 때, 노송이 굽어보는 언덕이 펼쳐질 때면 독자들은 물론 서점 주인이나 현지 작가들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사람당 20분 정도씩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져 저 역시 감사했죠. 이제 '만화'와 '망가'도 잘 구분해내는 모습이 고맙고 뿌듯하기도 하고요."

1997년 한국만화가협회장 자격으로 처음 프랑스 앙굴렘을 찾은 이후로 이제는 때때로 드나들고 있지만 이번 방문은 더욱 특별했다. <임꺽정>이 그의 이름을 단독으로 내건 작품으로는 최초이기 때문이다.

▲ 프랑스에서 출판된 만화 <임꺽정>
ⓒ 이두호
<임꺽정>은 1991년에서 1996년까지 만 5년 3개월간 스포츠조선에 연재된 이두호의 대표작이다. 오래전부터 이두호는 금서였던 홍명희의 <임꺽정> 전6권 중 2권을 수중에 넣고, 정통적인 그것이 막연하게나마 만화로 그리고 싶었다. 벽초의 것 이후로 수많은 '임꺽정'이 나왔지만 대개 '에로소설' 같았던 터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자들에게 보다 현실감 있는 '임꺽정'을 보여주고 싶어 그는 참 끔찍하게도 자료조사를 했다. '임꺽정'이 붙은 책이라면 소설, 만화, 동화, 연구서, 야사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고 연구했던 것.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서에 심취하는 것은 물론 단어 하나 고증 하나에 열중했다. 고우영, 방학기 등 다른 만화가들이 기존에 그려낸 작품들 역시 모두 읽었다.

하지만 아는 게 병이라고 했나. 기존 '임꺽정'과는 분명 다른 것, 이두호의 색을 내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했다. "마치 지뢰밭과도 같았죠. 굳이 따지자면 벽초 것 30%, 실록이나 기타 등등은 20%, 완전창작이 50%라고 대답해요. 벽초 <임꺽정>에 없던 최후도 그려 넣었죠. 야사를 많이 참조했어요."

▲ 만화가 이두호
ⓒ 홍지연
그 어느 작품에도 없는, 오로지 '이두호 판'에만 있는 것은 임꺽정이 자신을 '의적'이라 정의 내리는 장면이다. 임꺽정이 스스로 부하들에게 "우리는 의적이다"라며 의로운 도적임을 스스로 말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분명하게 깨닫는 장면. 그것은 이두호 마음 속에 자리한 영웅 '임꺽정'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 결과 이두호 만의 '임꺽정'이 나왔다. 재기 발랄한 고우영의 것과는 다른, 활극이 넘치는 방학기의 것과도 다른 이두호 <임꺽정>은 뚝심있는 연출과 풍부한 이야기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과장된 영웅담과는 거리가 먼, 역사의 질곡 속에서 가족을 위해, 이웃의 고통을 묵과할 수 없어 필연적으로 태어난 영웅.

가히 가장 한국적인 리얼리즘으로 빚어진 이 영웅은 10년 만에 프랑스 땅을 밟았다.

이두호는 새삼 처음 유럽땅을 밟았던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십 년 전 우리 만화를 알리기 위해 프랑스에 갔던 그는 '한국 만화'의 정체성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금방 대답하지 못해 머뭇거렸었다. 만화가인 자신도 정의내리기 힘들었던 한국의 '만화'(Manhwa). 그때의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지난 세월 그를 괴롭히는 화두가 됐다.

그러나 10년간 세계 속 한국만화도 눈에 띄게 성장했고, '만화'와 '망가'를 구별해내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그 역시 우리 만화만의 멋과 힘에 대해 여느 때보다 분명하게 믿게 된다고.

"<임꺽정>이 만화와 소설로 동시에 번역돼 나갔다 해도 대중들은 우선 만화에 손이 갈 겁니다. 내용 전달력이 빠르고 소화도 금방 되는 만화의 힘이란 그런 것이죠. 이렇게 몇 사람이 만화를 알리고, 물꼬를 튼 가운데 앞으로 정말로 재미있는 만화, 많이 팔릴 수 있는 만화를 그려야 할 겁니다. 그것은 젊은 후배 만화가들의 몫이 되겠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두호, #오세영,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토지, #임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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