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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이번엔 작정하고 '내' 이야기들을 좀 써보았습니다.

-324쪽, '작가의 말' 중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문학동네


보통 국내 작가가 작정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고 했을 때 우린 재미없는 소설일 거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재미없다고 소문난 한국 소설 아닌가. 일본 소설과 서양 소설에 빠져있는 젊은 세대에게는 단점만 보인다. 소위 좀 읽는다는, 생각깨나 한다는 젊은 지식인조차 한국 소설에는 부정적인 경향을 보일 때가 많다.

21세기의 젊은 독자들은 당당하다. 일본 소설만 좋아하지 말고 한국 작품에도 관심가져 달라, 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국 문학의 문제점과 일본 및 외국 문학의 장점을 줄줄 읊으며 말 한 마디 꺼낸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 이기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문학동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 말만 들은 그들의 표정이 예상된다. 난 표정을 보다가 한 권의 책을 꺼낼 것이다. 이기호의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이하 <갈팡질팡>). 이기호의 새로운 소설집은 '작가의 문학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성석제, 김종광, 박민규를 능가하는 능청스러움과 파격, 그리고 재미.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 맛을 보여줬던 그는 이번 두 번째 책에서 더욱 견고해진 완성도를 갖춰 우리 앞에 섰다.

여럿 읽을 필요도 없다. 맨 앞에 있는 '나쁜 소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능청스러움과 유머가 어느 정도인지. '자, 좋습니다. 이 소설은 저 위 부제처럼 누군가 누군가에게 직접 소리내어 읽어주도록 씌어진 소설입니다.' 작가는 도입부부터 작품 전면에 등장해 독자에게 지시한다.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면 MP3에 녹음해 들으라고까지 한다.

말 잘하는 옆집 형의 말에 따라 소설 속에 들어가면 어느새 주인공은 독자 자신이 된다. "당신"이 화자인 2인칭 소설로 바뀐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읽어주도록 쓰인 이 소설을 들고 "누군가"를 찾는다. 대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굴욕 끝에 '당신'은 결국 여관방에서 콜걸을 불러 소설을 읽어준다. 작가는 "당신"을 이야기 밖으로 꺼내 말한다. '당신은 혼자가 됩니다.…… 당신 주위엔 마음 편히 소설을 읽어줄 만한,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거군요. 불쌍한 사람, 내 한 걸음에 달려가 소설을 읽어주고픈, 당신. 쓸쓸한.'

이 소설의 심판대에 오른 건 소설 한 편 누군가에게 읽어주지 못하는 현실이다. 현실이 더 픽션 같아 소설은 그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 "당신"은 갈팡질팡 갈 길을 알지 못한다. '수인(囚人)'의 주인공은 자신의 소설을 증명하지 못한다. 책 속의 작가와 소설은 현실에 짓눌려 산다. 낙오자가 된 그들은 그리하여 대부분이 잘 모르는 흙 맛을 위해 땅 밑으로 내려가기도 하고('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국기게양대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국기게양대 로맨스'). 신나게 얻어터져도 알아주는 사람 한 명 없고('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계획한 범죄도 수포로 돌아간다('당신이 잠든 밤에').

주인공 대부분은 현실에 적응치 못하는 아웃사이더 타입이다. 배운 것도 없고, 잘나지도 못한. 작가 이기호는 이 우울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그것이 <갈팡질팡…>의 장점이다. 독자와 서술자를 같은 위치에 놓아두기도 하고, 할머니나 허세만 부리는 옆집 형이 들려주는 웃기는 이야기로 둔갑하기도 한다. 독자는 그 덕에 웃으면서 접할 수 있다. 시종일관 웃다가 책을 덮으면 '아!'하는 감탄사와 함께 우울해지는 것. 작가가 노린 것은 그런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위트 있는 문체, 정겹게 뿌려진 이야기에 비해 주제 자체가 평이하다는 지적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 대부분은 전 세대 작가 대부분이 했던 것들이다. 재미는 특별나지만 소설 자체는 진부하다, 는 말은 용인될 수 있다.

하나, 최근 젊은 작가 중에서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라. 소설 형식적인 면에서는 박민규, 성석제도 울고 가는 파격을 보여주고 재미도 그에 못지않다. 그는 독자에게 친절하다. 읽는 대부분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고매하신 순수 문학 전문가는 다르겠지만) 재미, 그걸 정직하게 실천하는 작가다. 첫 번째 소설집에서는 성경의 어투를 패러디해 바바리맨의 이야기를 그린 적도 있으니(<최순덕 성령충만기>)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고 책 끝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그렇다. 이 책은 원주에서 자라나 작가가 돼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의 고민, 이야기를 다뤘다. 옆에서 들려주듯 말이다. 말발, 글발 좋은 형이 들려주는 무용담은 흥겹다. 그리고 소설에서처럼 책을 덮고 나면 쓸쓸해지지만, 괜찮다. 쓸쓸한 당신을 바라보는 책이 있으니까. 책 속의 무용담은 언제까지나 당신을 위한 것이다.

작가 이기호가 만들어낸 당신만의 네버랜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문학동네(2006)


태그:#이기호,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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