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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식씨는 SBS 수목드라마 <쩐의 전쟁>에서 금나라(박신양)을 쫒아다니던 사채업자 수표로 드라마에 재미를 더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새벽 3시였다. 그의 핸드폰이 울린 것은. 이 시간에 누구야? 번호를 보니 이원종이었다. 이원종은 영화 <황산벌> <달마야 서울 가자>를 같이 하며 친해진 선배다. 으……. 전화를 받아 말아? 에라 모르겠다. 받았다. 이원종이 특유의 굵은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너 드라마 할래?"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웬 드라마?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인데……."

이렇게 전화를 받은 김광식은 장태유 PD랑 만났다. 그리고 테스트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캐스팅은 이뤄졌다. 다음날 폭탄 맞은 것 같은 파마머리 컨셉이 결정되고, 그 다음날 촬영이 시작됐다.

TV에서 그는 가끔 나오지만 나오면 작렬했다. 사채업계 현역 종사자 한 명을 데려왔나 싶게 그럴싸 했다.

<올드 보이> 최민식 머리 스타일에 스타일리쉬한 사채업자 '수표', 아니 김광식을 8일 대학로에서 만났다. 얼굴은 딱 금나라(박신양)를 따라다니며 돈 내놔라 달달 볶던 악덕 사채업자 수표인데, 말투는 90도쯤 달랐다. 사투리? 전혀 안 썼다.

수표 말투, 그리고 김광식 말투

장태유 PD는 그에게 주문했다. 금나라를 쥐었다 놨다 해야 한다. 강하면서도 너무 강해서도 안 된다. 재밌지만 너무 헐렁하게 웃겨도 안 된다. 아주 매섭게 강하다가도 살살 재밌다가도 어느 순간엔 확 날카로워져야 한다(주문도 어렵다).

PD 주문도 무슨 프랑스 대입 시험문제처럼 어려운데, 난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가 쥐었다 놨다하며 압도해야 하는 인물이 누군가? 대충 얼굴로 묻어가는 스타였으면 누워서 잠자기였을 텐데, 산 넘어 산이라고, 그가 '톰과 제리'의 제리인 양 살살 갖고 놀 '톰'이 바로 박신양이었다. 그가 연기 잘하는 거, 화면 장악력 있는 거, 모르는 사람 있나?

"어렵죠. 하하. 그래도 해야죠. 시키는 대로. 제가 이렇게 살살 웃으면서 연기를 하는 부분들이 내가 봤을 때 나쁘지 않더라구요. 기 안 눌리면서. 솔직히 부담이 없지 않아 있죠. (박신양이) 몇 억짜리 배우고, 스태프 열 명은 데리고 다니는 배우인데……. 그런데 결과적으론 제가 이겨야 해요. 연기적으론 져선 안 되거든요.

언젠가 금나라가 제 사무실에 막 달려들어와서 저한테 '내 동생 내놔' 이러는 장면이었어요. 형(박신양)은 '광식아, 편안하게 하자' 그러는데, 촬영 전에 저는 혼자 '(사투리 섞인 수표 말투로)금나라, 짭다리 풀어'라고 하는 거예요. 신양이형이 '뭐?' 그러면 '신경쓰지 마세요' 하고서는 주문을 외는 거죠. 박신양한테. 큐 들어가기 전에요.

기운을 이겨야 되니까. 자꾸 그렇게 속으로 심어주는 거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찍힌 장면을 보니까, 뭐 어쨌든 나쁘지 않더라구요. 사람들도 '좋다' 그러고. 흥분한 박신양에게 돈을 갖고 오라고 약 살살 올리면서 말하는 게……. 그 기운에 안 눌리려고요."

박신양을 이기는 그의 주문

ⓒ 오마이뉴스 김정훈
안 눌리다 뿐인가? 신기했다. 잠깐 나오는데도, 그에게 눈이 갔다. 화면에 생기가 돌았다. 단역은 단역인데, 연기는 대충 묻어가는 단역 연기가 아니었다. 막말로 내공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TV 드라마는 처음이지만, 그가 배우 생활한 지 어언 13년째다. 연극 무대는 그의 힘이었다.

그렇다고 연극만 했나? 영화도 했다. <라디오 스타>에서 최곤(박중훈)에게 자장면 배달하던 중국집 배달부가 그였다. 또 있다. 독립영화 <맨 손으로 죽여라>에서, 그는 맨 손으로 사람 죽이던 주인공 킬러였다. 배우 생활 13년차에 연기 인생 2막을 펼치려 한달까? 지금은 그가 연극 <라이어 2>와 <쩐의 전쟁>만 하고 있지만, 다른 영화를 준비중이라고 했다.

사실 누구보다 먼저 그의 진가를 알아본 건 이준익 감독이었다. <씨네21>에서 감독들에게 기대되는 배우 하나씩 추천해달라 했을 때, 이준익 감독이 추천한 배우가 그였다. 그리고 이준익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연기를 하면 아무도 그게 연기인 줄 모른다. 백제 병사든 중국집 배달부든 그냥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 시나리오를 철저히 읽고 디테일을 끌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고양이에 홀린 연극 인생

이게 다 고2때 본 고양이들, 뮤지컬 <캣츠>때문이었다. 그때껏 '연극 한 편 안 본 놈'이던 그가, 그저 형이 갔으니까 나도 경영학과나 가야지 하던 그가, 어느 날 친구따라 뮤지컬을 보러간 게 화근이었다.

"야. 세상에 저런 게 있구나. 조명도 이상하고, 뭔 고양이가 막 춤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심장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그때 그랬어요. 정말 저거 해야 한다고. 그 때만 해도 덩치가 작았는데, 그때부터 춤 배우러 다닌 거예요. 성악 레슨 받으러 다니고."

집에선 당연히 '미친 놈'이라고 그랬다. 고3이 정신 못 차리고 갑자기 배우하겠다고 날뛰니, 어느 부모가 잘 한다 그러겠나? 꿈은 원대했지만, 현실은 기대 이하였다. 삼수해서 명지대 사회교육원 연극영화과엘 갔다. 가서 또 놀랐다.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막걸리 먹으면서 스타니슬라프스키를 논하고 괴테를 논하는 게 아닌가?

"야. 이거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정말 충격이었어요. 저야 문외한이었으니까. 그 때부터 미친 듯이 팠죠."

ⓒ 오마이뉴스 김정훈
그렇게 졸업하고 신시뮤지컬 컴퍼니엘 들어갔다. 열심히 활동했다. 그래서 그는 배우가 돼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인생은 백설공주가 먹다 떨군 사과마냥 그렇게 떼굴떼굴 굴러가지 않는다.

그렇게 4~5년쯤 흘렀을 때였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주인공 토니가 마리아와 부르는 노래 '투나잇'을 연습할 때였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토니를 못 할 거야.' 연습이야 주인공 토니를 했지만, 사실 계속 코러스였다. 문득 거울을 보는데 그런 생각이 엄습했다.

"<팬텀 오브 오페라>에서 '팬텀'을 못할 것 같더라구요. 내가 갖고 있는 (얼굴을 가리키며) 요거 갖고는. 하하하하. 그래서 대학로 와서 연극을 한 거죠. 정극을."

그렇다면 연극은 주연 배우 외모를 안 본단 말인가? 아닌데? 연극도 외모 보는데?

"물론이죠. 그건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고. 그때 갈등이 뭐냐면, 정말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하고 싶었어요. 그냥 연기에 대한 갈증 때문에 대학로로 와서 정극을 하게 된 거죠."

너무너무 좋아서, 너무너무 아팠다

그 때 처음 만난 연극이 <라이어>였다. 이문식, 안내상이 한창 <라이어>로 날릴 때였다. 그도 함께 했다. 그리고 <라이어>를 하면서 그는 박살이 났다. 그렇게 박살날 수가 없었다.

<라이어>는 그냥 대충 할 수 있는 연극이 아니었다. 배역에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 가운데서도, 기존 연기의 틀을 다 무너뜨린다는 메소드 연기를 하는 연극이었다.

"그게 처음엔 접해보지 않은 연습이어서 처음엔 다들 힘들어해요. 그런데 나중에 정확하게 입력이 되면, 연기가 굉장히 점프하는 맛을 느껴요. 그게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기론인데 (박)신양이 형도 러시아에서 그걸 공부해온 사람이고, 이문식이 형도 그런 메소드로 하는 거예요. 그 메소드가 접목이 잘 되면 굉장히 연기를 잘 하더라구요. 정말 잘 놀 줄 알고 편안하게 할 줄 알고."

하지만 그건 또 치명적이었다. 맡은 배역에 몰입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배역이 됐다. 그러자 사단은 났다. 배우 노릇, 누가 쉽다고 했나?

작년에 연극 <애니깽>을 할 때였다. <애니깽>은 100년 전 멕시코로 간 한인 이민 노동자를 그린 연극이었다. 너무 좋은 작품이라 했는데, 몸은 너무 좋지 않았다. 배역에 몰입하면 할수록 아팠다. 너무너무 아팠다.

날마다 무대에 서면, 그는 고통을 받다 미쳐 죽었다. 연극이 끝나면 살아나 터벅터벅 집에 오지만, 다음날 또 무대에서 미쳐 죽었다. 연극이 원래 너무 아픈 이야기였다. 내용이 그랬다. 그가 맡은 역이 그랬다. 할 짓이 아니었다. 몸도 아프고 가슴도 아프고. 뭔지 모르게 너무 아팠다.

"그런데 옛날에 김갑수 선생님도 그 공연을 했는데요. 거기에 이렇게 써넣으셨더라구요. '내가 옛날에 이 공연을 하면서 아팠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옛날에 그렇게 아팠었다.' 그걸 보고, 아. 내가 그렇게 후지게 하고 있는 건 아니구나. 그런 위안이 서더라구요. 결과적으로.

제가 그 상황에 안 가면 보는 사람도 그 상황에 안 가요. 제가 가짜로 하면 보는 사람도 가짜인 줄 알잖아요. 제가 진심으로 안 하는데 보는 사람이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죠."


너한테 연기는 뭐야? 생명이야!

연기가 뭐길래? 그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 듯 했다. "미쳐야 미친다"더니, 그가 딱 그랬다. "나이 서른일곱, 제대로 미쳤다!"고 해야 하나? 연기에?

ⓒ 오마이뉴스 김정훈
"하하하. 이렇게 생긴 놈이, 이런 조건에 잘 한단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는 거예요. 실력으로 당당한 거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미친 듯이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내가 가끔 후배들에게 하는 얘기가 '연기만 잘 할 수 있다면 거세도 할 수 있다.' 하하하하. 아니 뭐 옛날에 영화 <파리넬리> 보면, 정말 노래 잘하고 싶으니까 거세하잖아요? 연기도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진짜론 못하겠지만. 정말 그 정도 마음이다. 왜냐면 난 이거 아니면 딴 거 할 수 없다고요. 이제 딴 거 들어서기도 늦었고."

당최 연기가 뭐길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정말 모르겠어요. 예전에 술 처먹고 숱하게 논쟁하고, 너한테 연기는 뭐냐? 그게 모르겠어요. 옛날에 문식이 형이 술 먹으면서 '너한테 연기는 뭐야?' 묻길래 '나에겐 직업이다' 그랬다가 귓방망이 한 대 맞을 뻔 했거든요.

'아따. 형한텐 뭔데?' 했더니 문식이 형이 '나한텐 생명이야, 이 새끼야'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웃기고 있네!' 그랬어요. 하하하하. '괜히 말장난들 하고 말야, 무슨 생명이야, 생명은?' 제가 그랬어요. 정말로. 그런데……."


그런데?

"지금 저한테 물어보면, '생명이야'라고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만큼 간절해진 거 같아요. 그냥 직업 정도는 아닌 거 같아요. 분명하게!"

하마터면 그에게 말할 뻔 했다. '우이씨, 울리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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