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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통엔 김치가 바닥났는데, 이번엔 김치 담그기가 왜 그리 귀찮은지…. 일주일 넘게 김치 없이 지냈습니다. 그랬더니 왠지 냉장고가 텅 빈 것 같고, 누가 한국사람 아니랄까봐 매 끼니 때마다 머리 속에는 뻘건 김치만 동동 떠다녔습니다.

있을 땐 찬밥 신세일 때도 많은 김치가 막상 눈앞에 없으니 왜 그리 먹고 싶던지요. 배추 몇 포기 사다 그냥 겉절이라도 해먹으면 되겠구만, 무슨 심보인지 그냥 버텼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얼마 전 마트에 간 길에 통통한 배추를 7포기 샀습니다.

부엌에서 손질하려고 보니 통통한 배추가 키는 왜 그리 작은지 소금에 절이면 양이 적겠다 싶었습니다. 큼지막한 함박에 배추를 반으로 잘라 소금에 절였습니다.

이곳 광동의 습한 기운을 먹고 자란 배추라 그런지 꽤 오래 소금물에 담갔는데도 여전히 쌩쌩했습니다. 저녁때 담그려고 했는데 제대로 절여지지 않아 '조금 있다 건져놓고 자야지'라고 생각하며 기다리다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 남편이 늦은 밤에 건져놓아 소금에 적당히 간이 되었습니다.
ⓒ 전은화
다음날 아침, 배추 생각이 번뜩 나서 부랴부랴 부엌으로 갔습니다. 어라, 이게 웬일입니까? 흐물흐물해져 못 먹게 생겼을 배추 생각에 심란한 맘으로 부엌에 들어갔는데, 글쎄 잘 절여진 배추가 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지 뭐예요. 출근 준비하던 남편한테 얼른 물었습니다.

"자기~! 자기가 배추 건져놨대?"
"어이구, 기억 안 나?"
"뭔 기억?"
"진짜 기억 안 나? 어제 밤에 눈이 반절 감겨 가지고 나 컴퓨터 볼 때 그랬잖아. 늦게 잘 거면 건져놓고 자라고…, 말 안 들었다간 뼈도 못 추릴까봐 건져놨지."
"내가 시켰다고?"

에휴, 이놈의 건망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서 제가 한 말도 기억을 못하고는 그저 남편이 우렁각시처럼 이쁜짓(?) 해놓은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소태가 될 뻔했던 배추는 남편덕에 제대로 간이 되었습니다.

▲ 준비한 재료를 다 넣고 보니 제법 양념다운 양념이 만들어졌습니다.
ⓒ 전은화
큰딸 소연이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나니 한가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김치 양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파도 다듬고 당근과 무는 채 썰고요. 생강이랑 마늘도 까놓고 양파 조금이랑 시원하게 먹으려고 배도 한 개 깎았습니다.

찹쌀풀을 쑤려고 보니 찹쌀가루를 깜빡하고 사다 놓지 않은 데다가 아침에 밥을 안했더니 찬밥도 없었습니다. 문득 전에 시어머니가 밀가루풀로 김치 담그시던 게 생각나서 이번엔 밀가루풀을 쑤었습니다.

믹서에 마늘이랑 양파, 생강 그리고 배를 넣어 곱게 간 것을 적당한 크기의 유리그릇에 부어놓고 한국에서 친정 엄마가 보내준 매콤한 고춧가루를 넣었습니다. 김치 몇 번 담가먹고 매운 요리 몇 번 해먹었더니 고춧가루가 부족했습니다. 한국식품점에서 미리 사다놓은 고춧가루를 뜯어 더 넣었습니다. 멸치액젓과 쑤어놓은 밀가루 풀도 넣고 골고루 잘 저은 다음 깨소금도 뿌리고 준비해 놓은 양념들을 섞었습니다. 제법 맛있어 보이는 양념이 만들어졌습니다.

물이 다 빠진 배추랑 김치통을 한자리에 준비하고 고무장갑을 꼈습니다. 전에 고춧가루 양념의 매운 맛을 모르고 맨손으로 버무렸다가 밤새 손이 아린 적이 있기에 고무장갑은 필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 고무장갑 끼고 한포기 한포기 버무르다 보니 김치통이 채워졌습니다.
ⓒ 전은화
부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한 포기 한 포기 버무리다 보니 엄마가 김치 담글 때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손이 큰 편이었던 엄마는 김치도 한 번 담글 때 많이 담갔습니다. 엄마가 하시는 걸 보고 있노라면 참 쉽고 간단해 보였는데 막상 직접 해먹게 되니 그제야 엄마의 수고스러움을 새삼 알게 되더군요. 엄마는 아무리 매운 고추 양념을 만져도 손이 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손도 늙어서 감각이 둔해졌는갑다"하시면서요.

지난번 김치 담갔을 때는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 나 이제 김치도 혼자 담근다니까요"하며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시집가서 혼자 김치도 담그니 대견해 하실 줄 알았는데 엄마는 "가까이 있으믄 언능 갔다줄 텐디…"하시며 왜 그리도 안쓰러워하시는지, 괜히 엄마 마음 심란하게 해드린 것 같아 일부러 씩씩하게 이런 저런 얘기 나누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 김치통 가득 채워진 김치. 보기만 해도 흡족했습니다.
ⓒ 전은화
혼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버무리다 보니 금세 7포기의 김치가 빨간 옷을 입고 김치통에 담아졌습니다. 큰 통 한 개와 작은 통 한 개에 김치가 꽉 들어찼습니다. 뭔 큰살림이라도 준비한 마냥 왜 그리 흐뭇하던지요. 타국에 살게 되면서부터 이상하게 김치만 담그면 부자가 부럽지 않고 김치 한 가지만 있어도 다른 반찬이 아쉽지 않습니다.

담근 김치는 하루 반나절 정도 밖에 내놓았습니다. 생김치보다는 약간 새콤하게 발효된 후 먹으면 더 맛있거든요. 김치 담그고 며칠 있다가 이웃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 새댁과 집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새댁은 "저는 얼마 전에 담근 김치가 너무 짜게 담가졌는데… 이 김치는 짜지도 않고 새콤하니 맛이 딱 들었네요. 시원한 게 맛있어요"하며 김치맛에 점수를 올려주었습니다.

새댁이 맛있게 먹으니 안 그래도 김치 담가놓고 부자된 마음이었는데, 기분까지 둥둥 떴습니다. 점심 먹고 얘기 좀 나누다가 가는 새댁에게 콩자반 조금이랑 김치 한 두 포기 나눠 주었습니다.

아직도 냉장고 안 김치통엔 김치가 반절 이상 남아 있습니다. 냉장고 한켠에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것 만 봐도 마음이 참 풍족합니다. 역시 한국 사람은 김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한 것 같고요. 매콤새콤한 김치는 역시 최고의 음식이란 생각이 듭니다.

담그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김치가 올려진 밥상의 넉넉함과 조금이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기쁨을 생각하며 앞으로는 게으름 피우지 말아야겠습니다.

태그:#중국, #김치담그기, #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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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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