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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체류 외국인 100만 시대. 20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한 이주 외국인이 한국 사회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럼에도 이주민을 위한 대책은 요원하다. 정부도 '버지니아텍 총기난사 사건' 이후 국내 이주민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나섰다. '한국판 조승희 사건'을 우려한 탓일까. 

<오마이뉴스>는 지난 16일 발생한 총기사건 이후 한국 사회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할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우리 안의 인종주의'와 '이주민과 함께 살기 위한 정책 대안'을 다룬 기사를 내보낼 예정이다. 이 기사는 대안을 고민하는 마지막 기사이다. <편집자주>
▲ 미국 버지니아주 블랙스버그 소재 버지니아공대(버지니아텍)에서 16일 32명이 숨지는 사상 최악의 교내 총격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전쟁 기념관앞에서 학생들이 모여 사망한 학생들을 추모 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2007년 4월 16일, 무려 32명의 무고한 목숨을 처참히 앗아간 '버지니아텍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크나큰 충격을 주고 있다.

당연히 처음에는 '누가'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나 라는 의문에서 출발, '왜' '어떤 배경에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라는 문제와 관련, 사회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국적도 성품도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처음에는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 하는 식으로 국적이나 민족이 문제의 초점에 있었다. 다른 편으로는 범죄자의 '국적'이 문제가 아니라 반사적으로 그 '개인'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고 그것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개인이 '어디서' 또 '어떻게' 살았는가가 논의의 초점으로 되었다.

바로 여기서 나는 위 사건의 핵심 인물인 조승희의 국적을 가지고 벌이는 논란도, 또 그 개인의 성품을 가지고 벌이는 논란도 문제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본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즉각 국가나 민족으로 귀속시키는 시각은 물론, 오로지 그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시키는 시각도 모두 문제의 진단과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조승희라는 개인이 어떤 경험을 하면서 성장했는가 하는 성장 배경이 중요하고, 그런 면에서 그 개인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회적 배경도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그 개인이 가족과 맺는 관계, 그리고 학교나 사회 일반과 맺는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시각에 설 때 비로소 조승희 사건을 통해 우리는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식의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재발을 막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편협한 민족주의나 순수 혈통주의 신화에 젖은 한국 사회의 경우 얼마든지 그러한 시한폭탄을 많이 생산할 잠재력이 크다고 본다.

'코메리칸 드림'의 파멸적 한풀이

▲ 지난 2005년 달라스 한인타운의 모습(자료사진).
ⓒ 배우근
바로 여기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하나는 한 개인이 그 부모 등 가족과 맺는 관계의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사랑의 관점이 아니라 출세의 관점으로 대한다면 그 결과는 대단히 파멸적일 것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이번 조승희 사건의 경우, '한국인의 아메리칸 드림'(다른 나라 출신 미국 이주민들이 갖는 어메리칸 드림보다 한국인의 그것이 유달리 강박적이고 집착적이라는 점에서 '코메리칸 드림'이라 부르고 싶다)은 유별나게 출세지향적 또는 성공지향적이어서, 자식들은 부모가 가진 한이나 포부를 대신 해결해줄 충실한 '대리인'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모의 소망을 대신 실현해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식에게도 참된 행복을 갖다 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식들이 부모의 '코메리칸 드림'을 대신 실현코자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으나 실패와 좌절을 반복 경험한다면? 상황은 최악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필연적으로 조승희 식의 파괴적 행위로 나타난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여건과 관계들이 그의 고통과 번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조롱하는 상황이라면 정말 벼랑에 몰린 느낌이지 않을까?

특히 부모가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죄다 참아가며 오로지 자식 교육(=계층 상승)을 위해 청춘을 다 바친 상황이라면 그만큼 자식을 통한 '한풀이'라는 부모의 기대는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자녀가 부모의 충실한 효자효녀로 머무르고자 하는 한, 그러한 외적 기대는 내적 압박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내적 압박이 자연스런 과정 속에서 성공적인 외적 성취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당사자는 심대한 좌절감과 패배감을 느낄 수 있다.

이 때 본인이 자신의 내면이나 삶의 방식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도 그 사회적 연관성까지 통찰할 능력이 없다면, 불행히도 '나 아닌 너'에 초점을 맞추거나 '세상 전체'와 같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늘을 찌르는 적개심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승희가 범죄 도중 방송국에 보낸 동영상에 나타나듯, 그러한 '적개심을 통한 응징'을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죄다 해결하는 구세주인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다. 주위 및 자신과 참된 소통이 불가능할 때 우리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함을 알 수 있다.

100만 '외국인'·40만 이주노동자의 한국사회

▲ 전남 구례군 구례공공도서관 주최로 매주 목·금요일 오후에 열리는 한글교실(교사 김성현)은 동남아에서 한글에 대한 교육도 전혀 받지 못한 채 시골총각에게 시집 온 외국인여성들에게 무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사진은 필리핀에서 온 여성이 아이를 안고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 안현주
둘째로는, 바로 이런 일이 비단 미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개인이나 가족의 관계 방식을 결정짓는 사회적 관계가 문제의 핵심인 이상, 한국 사회도 미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배경을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도 아이들은 조승희 이상으로 점수와 성적이 짓누르는 압박 속에 하루하루 허덕거리며 산다. 나아가 한국 사회는 이미 결혼식의 13%(약 8쌍 중 1쌍)가 국제 결혼일 정도로 다양한 국적과 민족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이미 이주노동자는 40만에 이르고, 국내 거주 '외국인'은 100만 명이라고 한다.

국제 결혼 가정까지 포함하면 이제 한국 사회도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로 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미 한국도 먼 옛날부터 이런 저런 피(오늘날의 중국·몽고·일본·유럽·미국 등지)가 섞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렇게 현실은 쏜살같이 변해 '다문화 가정'이 급증함에도, 통상적 한국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단일 민족' 신화나 '순수 혈통' 신화에 젖어 있어, 많은 사회 갈등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례로, 보건복지부에서 행한 '결혼이주자 실태조사'에선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가운데 17.6%가 집단따돌림(왕따)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결혼이주자 가정은 가구 소득이 최저 생계비 이하인 가구가 50%를 넘을 정도로 사회경제적 형편은 낮은 편이라, 대부분 학원 보충이나 과외를 시키기도 어렵다.

또 설동훈 전북대 교수의 '국제결혼여성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미취학 자녀를 둔 국제결혼가정 중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는 비율은 14.5%로, 우리나라 미취학 자녀의 보육시설 이용률(56.8%)에 비해 현저히 낮다. 다문화 가정의 부모조차 한국어가 서툰 경우, 아이들은 더욱 갑갑하다.

이런 현실에서 다문화 가정의 부모와 자녀 사이에 원활한 소통과 교감이 이뤄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국제결혼 자녀들, 흔히 '혼혈아'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세계적 '교육열'을 자랑하는 한국의 각급 학교에서 점수따기 경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을 거듭하는 경우, 제2, 제3의 조승희가 연이어 나오지 말란 법이 있을까?

한복입히기, 사물놀이 가르치기, 음식축제...

바로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한편으로는 자녀들을 그 부모의 미실현 꿈을 대신 실현해줄 대리인으로 보는 시각을 당장 중단하고, 자녀와 부모가 모두 참 행복을 찾는 삶의 주체로 서도록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편으로는 말로만 '다문화 가정의 정착 필요성'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국제결혼을 통한 다문화 가정이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정책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특히 각 지자체 등에서 하는, '외국인'에게 한복 입히기나 사물놀이 가르치기, 또는 외국인 나라별 '음식 축제'나 '노래자랑' 등과 같은 일회성 이벤트가 정책의 핵심이 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이 때 이상적인 것은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앞장서서 주도하고, 정부 당국은 그 자율성을 침해 않는 범위에서 측면 지원하는, '보조성' 원리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가 취할 구체적 대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이주민들을 단순한 '노동력'으로 보기 보다는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생활인'으로 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이 해외로 가면 흔히 우리는 차별을 받을까봐, 인종주의적 편견에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막상 우리 사회 안의 이주민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노동력 이상의 시각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 지구촌에서 '모두가 주인이자 모두가 손님'이라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둘째, 이주민들도 인간답게 일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의 주체로 대우해야 한다. 따라서 영주권이나 노동권 보장을 위한 개방적 논의를 해나가야 한다. 이주민들이 한국을 침식한다는 식으로 편협하게 볼 것이 아니라, 그들도 삶의 주체로 살면서 잘못된 제도와 문화를 함께 고쳐나가는 주체라는 개방적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이주민들은 '노동력'이 아니다, 사람이다

▲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지난 2월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앞에서 이주노동자들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셋째, 정부는 이주자 가정들이 실질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이런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고 시행할 수 있도록 사회적 자원의 배분을 적절히 해야 한다.

넷째, 이주자 가정이 한국어나 한국 문화를 잘 학습할 수 있도록 다양한 학습 공간을 만들고, 한국인과 이주민들이 건강하게 교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기존 공교육 체제의 각 급 학교는 이주민 자녀들과 한국 아이들이 함께 자랄 수 있도록 각별한 신경을 써나가야 한다.

다섯째, 노동조합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자 삶의 질을 드높이기 위한 운동을 공동 전개해야 한다. 자본은 세계화라는데 노동은 민족주의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백전백패다. 자본보다 더 철저한 세계화를 하고 연대를 구축해야 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 운동이다.

여섯째, 다문화 사회를 능동적이고 창의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의 구상과 구현 과정에는, 지금까지 이주노동자 인권이나 이주민들 삶에 구체적인 관심을 기울여 온 각종 NGO들이 두루 참여하여 개방적 소통과 연대를 통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편협한 '선교' 내지 '포교'의 시각(자기 조직원 늘리기)은 지양되어야 하지만.

나날이 미국을 닮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가 조승희식 자살 테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이런 진정어린 제안에 모든 구성원들이 선입견 없이 귀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태그:#조승희, #다문화사회, #혈통주의, #민족주의,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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