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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목사, 불자인 시민기자가 타 종교 성직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종교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기사를 통해 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기사는 불자인 임윤수 시민기자가 부산노숙자의 대부로 불리는 김홍술 목사의 삶과 신앙적 실천에 대해 취재한 내용입니다. <편집자주>
▲ 부산역 노숙자들은 김홍술 목사를 자신들의 생명줄이라고 말했다.
ⓒ 임윤수
지난 3월 31일 밤 10시가 조금 넘은 부산역 승객대기실. 20여 명이나 되는 노숙인들이 일찌감치 자리잡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노숙인 수는 50~60명쯤으로 늘어났다. 1층 승객대기실에 놓인 24개의 의자는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인 듯 하다.

공안들이 2~3층에 있던 노숙자들을 1층으로 안내한다. 가슴에 안고 있었거나 머리에 베고 있던 가방을 챙긴 그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나 둘 자리를 뜬다. 공안의 입장에선 일상의 업무겠지만 노숙자들의 입장에선 내몰리는 기분이었을 듯 하다.

저녁부터 몇 시간째 그들의 거동을 살폈다. 저녁시간이 되었지만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아주 가끔 검은 비닐에서 소주병을 꺼내더니 한 잔씩 마신다. 드러내놓고 떳떳하게 마시는 게 아니라 의자 뒤에서 눈치 잔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부산역 노숙자들이 말하는 김홍술 목사

빈 자리가 생기는 것을 보고 그들이 있는 의자로 다가갔다. 기자의 출현이 부담스러웠는지 주춤거리듯 말소리가 멈춘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노숙자에게 "혹시 '김홍술 목사'를 아세요?"하고 물었다. 질문을 받은 그는 건너 쪽 다른 의자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그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한다.

지목받은 그에게 다가가 "김홍술 목사를 아느냐?"라고 다시 물으니 "안다"고 한다. "왜 김홍술 목사를 묻느냐?"라고 경계의 눈초리로 답한다. 취재를 위해 찾아왔다는 말과 함께 "그분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하자 그는 대뜸 "김홍술 목사는 우리들의 생명줄"이라고 답한다.

배고프고 춥게 살아야 하는 그들에겐 밥 한 끼야말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길인데, 일주일에 최소 화·목·토요일 세 끼 이상은 김홍술 목사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김 목사야말로 자신들의 생명줄을 반쯤 이상은 연명해 주는 분이라는 설명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고 있으려니 조금 전 질문을 하였을 때 대답을 회피했던 노숙자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작년 11월부터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그는 신세타령 하듯 자신의 처지를 들려준다. 보증선 것이 잘못되어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는 그는 정장차림에 말쑥한 복장이다. 나이는 환갑을 넘겼고 대학교수인 딸이 있다고 했다. 식구들에겐 "시골에서 머리 식히는 중"이라고 했으니 자신의 처지를 알 리 없다면서 노숙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소회를 들려준다.

3월 이전까지만 해도 2층에 셔터가 설치되지 않았기에 바람 덜 들이치는 2~3층에서 밤 동안만이라도 보낼 수 있었지만 셔터를 설치한 뒤로는 찬바람과 시멘트 바닥의 냉기가 올라오는 이곳에서 밤을 보내느라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쓰레기를 보는 듯한 사람들의 야멸친 눈빛이 더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한다.

이런 노숙자들에겐 김홍술 목사는 남다르다. 김 목사가 제공해주는 밥도 밥이지만 그의 보살핌이야말로 마음의 햇빛이 되고 서러운 삶에 의지처가 된다고 한다. 자포자기로 인한 차가워진 마음, 사회적 냉대로 인해 닫힌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온정의 이부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어설픈 불자, 김홍술 목사를 찾아 나서다

▲ 김홍술 목사가 꾸려가고 있는 부활의 집으로 들어가는 흙길이었고, 그 흔한 십자가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임윤수
기껏 서너 번밖에 교회 가본 적이 없는 기자가 부산지역에서 '왕꼬지'로 알려진 김홍술 목사를 만나러 가는 길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부산시 북구 구포2동에 위치한 애빈교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거나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애빈교회엔 그 흔한 십자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 걸려있는 간판이 아니면 공사 중인 허름한 민가로 보일 게 분명하다. 애빈교회는 김 목사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재활의 꿈을 키워나가는 가난공동체이다.

김 목사는 땜질하듯 벽면을 수리하고 있었다. 김 목사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천장은 단열재로 넣은 스티로폼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벽면만 겨우 도배가 되어있는 방은 그 크기가 네댓 평 남짓하다. 작년 7월부터 공사 중이지만 사정이 어렵다 보니 돌탑을 쌓듯 하나하나를 자력으로 해결하느라 이렇듯 더디다고 한다.

돌 하나가 생기면 돌 하나를 얹어 놓고, 시멘트 한 포대에 모래 한 리어카가 생기면 그 생긴 것만큼씩 지어가다 보니 더딜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누더기처럼 조각조각 보이던 그 벽면과 문틀 하나하나가 여기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알곡을 낳듯 쌓아올리고 석탑을 다듬듯 손질한 결과물이며 흔적이다.

애초부터 가족 수 20명을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현재의 가족 수도 10여 명 남짓이라고 한다. 자칫 허명에 들뜨거나 욕심을 내어 20명을 넘기게 되면 인간미가 결여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공동체 생활에 틈새가 생기면 가족들에게 갈등이나 생채기가 될 수도 있기에 20명 이하를 고집한다고 한다.

넓지 않은 방 하나이지만 김 목사와 그 가족들에겐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은 기도의 공간이자 식당이며, 두 다리를 펴고 잠자는 숙소가 되기도 한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이 재활의지와 꿈을 실현해 나가는 보금자리인 그곳은 희망의 터전이며 삶의 텃밭이다.

성 프란시스를 닮고 싶은 운수행각의 목회자

▲ 김홍술 목사는 노숙자 혹은 거지들의 왕초가 아니라 반려자 또는 그들의 수하라고 부르는 게 맞는 듯 하다.
ⓒ 임윤수
김 목사의 방황하고 떠돌던 삶과 예수의 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비우며 사는 삶을 듣다보니 스님들의 '운수행각(구름처럼 물처럼 속세를 누비며 공부하는 수행방법)'과 '무주무애(머물지 않고 거침없는 수행자세로 '무소유'를 뜻함)'의 수행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김홍술 목사를 일컬어 '왕꼬지' 또는 '거지왕초'라고 한다. 그러나 불자의 눈에 김 목사는 노숙자 또는 거지들에게 군림하는 '왕'이나 '왕초'가 아니라 그들의 동반자 혹은 그들의 '꼬붕(부하)' 정도일 만큼 진솔하고 겸손한 삶을 사는 실천적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김홍술 목사와 나눈 일문일답.

-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교회도 사회에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한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한 얘기다. 교회도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십일조 뿐 아니라 한때 거론되었던 세금도 분담해야 한다. 헌금이란 제물이며, 제물에는 사회를 위한 기본 정신이 들어있다."

- 개신교는 부모에 대한 제사(절)를 금기시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십계명 중 1계명과 2계명을 들어 절을 못하게 하는데, 근본주의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근본주의는 이거 아니면 이거다'라는 식으로 흑백논리에 강하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이다. 기독교에서도 제사와 같은 의미의 추도가 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다고 본다."

- 김 목사의 행적을 보면 스님들의 운수행각에 버금가는 방황과 떠돌이가 있었는데 그때 무엇을 깨달았고 결심하였는가.
"기득권을 행사하는 목회자들의 이기적 모습에 실망하고 갈등하다 전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면서 큰 바위 얼굴로 성 프란시스를 그리며 그와 닮은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고 그 길을 걸으려 노력했다."

- 그렇게 거침없이 생활할 수 있는 뚝심은 무엇인가?
"성경에 나와있듯 소유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반기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고, 그곳에서 싫어하면 언제든 떠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

"진혼제 파동도 있었는데, 고사축문 정도는 문제도 안 된다"

- 홈페이지에 고사축문이 실려 있던데 그로 인해 다른 목회자들에게 비난을 받은 일은 없었나?
"(크게 웃으며) 한번 크게 찍혀서 그깟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002년 부산역 광장에서 만천하가 보는 앞에 흰 재를 뿌려가며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를 크게 지낸 적이 있다. 그랬더니 기독교 신문에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이단'이라는 기사를 냈다. 그런 큰일로 메가톤급 시비가 있었으니 이만한 일들을 가지곤 시비하지 않는다."

- 현재하고 있는 사업(가난공동체)을 내생에도 다시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내생에는 진짜 노숙자나 거지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지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도우려 노력하지만 진짜 거지나 노숙자가 아니니 진정 그들의 입장이나 마음이 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지금처럼 무늬만 거지가 아닌 진정한 거지가 되어 그들의 영혼 속으로 녹아들아 함께 부활을 꿈꾸고 싶다."

- 기독교 신자가 불자가 되고, 불자가 기독교 신자가 되는 등 개종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개종을 하므로 가족 간에 우의가 돈독해 지고 평화를 찾을 수 있다면 기꺼운 일이다. 그러나 개종을 하면서 가족 간에 반목이 형성되거나 갈등이 생길 수 있다면 그건 생각해 봐야 한다. 신앙이나 종교는 다음도 중요하지만 당장의 평화가 더 중요하다."

- 불교에서는 누구나 성불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아무리 절실한 신자가 되어도 예수가 될 수는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의 삶과 가치를 닮으려 노력하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면 누구든 예수가 될 수 있다. 예수가 나고 내가 예수가 될 수 있다."

- 가족들은 김 목사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크게 웃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걸 궁금해 한다. 초등학생이 몸빼이를 입은 엄마가 학교로 찾아오면 외면하듯이 식구들도 그런 면이 있다. 부끄럽거나 싫어서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조금씩 밖으로 알려지면서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

- 가정경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교사인 아내가 월급을 타면 전부 나에게 맡긴다. 그걸 가지고 내가 지출하며 살림을 꾸려나간다. 일반 가정에서 남편이 월급을 타면 아내에게 맡기듯 우리 집에선 아내가 월급을 타서 내게 맡긴다."

"다음 세상에는 진짜 거지가 되고 싶다"

-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함께 생활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다. 함께 생활하던 사람이 이 곳을 떠나 생활하다 죽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연락이 온다. 가족들에게 연락하지만 외면할 때가 많다. 그럴 때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다. 마지막 가는 길조차 가족에게 외면 받는 분들이 그냥 떠나는 게 아니라 어떤 에너지(사명감)를 주고 떠나는 것 같다."

-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물질적인 도움보다는 마음적인 도움이 더 절실하다. 누구든 조건 없는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 10만 원짜리 수표가 천원 보다는 큰돈이지만 주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마음이 들어 있지 않는 돈은 자칫 독이 될 수도 있다. 커도 좋지만 작더라도 진정성이 들어있는 그런 후원이 필요하다.

안정권(정부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제도적 후원)에 들어가면 초심이 흐려지기 때문에 그러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 집을 완성하는데 사심 없는 도움이 있었으면 좋겠다."

▲ 살림살이에선 가난이 뚝뚝 묻어나지만 그의 얼굴엔 여유가 있었고 맑음이 있었다.
ⓒ 임윤수

예수의 고난주간 노숙수행을 떠나며
9년째 노숙수행 하는 김 목사의 심경

김홍술 목사는 IMF 이후 9년째 부산역 노숙자들과 일주일간 동거 동락한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부활한 기간에 해당하는 고난주간(올해는 4월 2일부터 8일까지)에 노숙수행을 한다.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맨바닥의 냉기와 그 냉기보다 더 차가운 사회적 멸시를 감당하면서 예수의 고난을 체험하고 신앙의 각오를 다짐하기 위함이다.

다음은 김 목사가 올해 노숙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심경을 밝힌 글이다.

고난주간 노숙수행을 떠나며...

벌써 9년째인가 보다. 1998년 IMF 여파로 거대한 노숙행렬이 부산에도 밀어닥칠 때 그때까지 이런 저런 모양으로 고난의 주간을 금식수행으로서 1년간의 청소기간으로 삼아왔었다. 마음의 청소뿐 아니라 몸까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밀려오는 노숙형제들의 삶을 보면서 나만의 깊고 은밀한 곳을 찾는다는 게 좀 그랬다. '영성의 수행' 그 자체도 '사치'(?)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냥 절망적 삶의 나락에 함께 거하고 싶어졌다.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고 도울 것인가?'가 아니라, 그저 형제들의 아픔과 괴로움에 작은 몸짓으로나마 마음의 동행을 하고픈 거였다.

사실, 그동안 9년의 고난주간 노숙수행이 시늉만 낸 것이지 정말 형제들의 고통과 같은 고통으로 참여했던가?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자신도 없고… 그러나, 다만 그저 내 마음도 몸도 그렇게나마 던져야 하는, 견디지 못하는 그런 심정으로 나마. 어떤 이는 그건 다만 자신의 빈곳을 채우기 위한 '자위행위'라고….

상관없다. 사람들의 멸시와 오해의 시선으로부터 존재가 '부랑인' 이요, '노숙인'이 아니던가.
곱든 곱지 않던, 나의 삶 나의 길은 나의 선택이요 나의 뜻일 뿐이다. 어떤 시각도 해석도 연연치 않고 그저 가야 할 걸음이 아닌가.

7일 간의 다사다난한 경험들과 마음의 반응이 설레인다. 역사와 세계의 무거운 짐은 어차피 바닥의 민중과 걸인의 몫이 아닌가? 그 십자가는 자의 던 타의 던 져야하는 것이요, 그 영광도 하나일터….

덧붙이는 글 | 자력으로 부활의 집을 짓고 있는 김 목사에게 혹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니 '돌멩이 하나 시멘트 한 포대일지언정 조건 없는 사랑과 관심'을 부탁하였다.김 목사가 운영하고 있는 가난공동체에 관한 소식은 가난공동체(www. homeless. name)에서 볼 수 있다.


태그:#부산역, #노숙자,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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