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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모노세키조선초중교(왼쪽)와 발표하고 있는 학생들
ⓒ 김레베카

'스톤워크(Stonewalk)'는 전쟁피해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비석을 얹은 수레를 끌면서 걷는 반전평화운동이다. 오는 4월 29일 부산민주공원을 출발해 6월 25일 금강산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캠페인이 전개된다.

1999년 맨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곳은 미국 '피스아비(Peace Abby)'와 '피스풀투머로우즈(Peaceful Tomorrows)'. 이 단체들이 발의하면서 일본인 1500명이 뜻을 모았다.

지난 2005년 7월 '스톤워크 저팬' 행사에서 일본인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참가자들은 나가사키에서 히로시마까지 총 600km를 길이 1.6m, 폭 1m, 중량 1톤가량의 비석을 운반하면서 원폭 희생자를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 행사에 참가한 나가사키, 사가, 후쿠오카, 히로시마현 사람들에 의해 '스톤워크 코리아 일본실행위원회'가 만들어졌다.

2005년 스톤워크 저팬에 참가했던 일본인 대부분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숨져간 아시아인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톤워크의 첫 출발지는 한국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강제동원, 원폭, 일본군 위안부, 전후보상 등 일본 제국주의가 지난 세기 아시아 민중들에게 저지른 여러 가지 죄과를 두고 활동해 온 한일 양국 단체와 개인들이 주축이 되어 올 초 '스톤워크 코리아' 실행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넋을 추모하는 사전 스톤워크로서 '일본 키타큐슈(北九州) 평화순례'를 기획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넋을 추모하는 사전 스톤워크

▲ 조선인 분류창고가 있던 시모노세키항
ⓒ 김레베카
한국 측 참가자 스무 명이 지난 22일 오후 부산항에서 '눈물의 연락선' 부관페리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출발했다.

한국 실행위원회 위원 강제숙씨(평화시민연대 대표)를 비롯해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한국원폭2세환우회, 매암차박물관 관계자와 최근 '탁발순례'를 마친 지리산생명평화결사, 전 '일본군 위안부' 고 정소운 할머니 추모사업회 등 주요 협력단체에서 온 이들이었다.

여정은 시모노세키와 키타큐슈 여러 곳으로 짜여졌다. 혼슈의 왼쪽 끝인 시모노세키는 부산에서 출발한 징용 조선인들을 '하역', 분류하는 장소였다. 시모노세키항을 비롯해서 당시 조선인 부락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부락민으로 살았던 마을 형태가 아직 남아있는 곳이다.

3000㎞가 넘는 해저 간몬터널을 거쳐 서남쪽 규슈로 내려가면 나오는 후쿠오카현의 치쿠호와 키타규슈는 탄광이나 일본제철 등 공업지대가 형성되어 있어 조선인강제연행, 강제노동이 특히 많이 행해진 지역이다.

사전 스톤워크 팀은 치쿠호 탄광으로 강제 연행되었다가 숨진 조선인 100여명의 유골이 안치된 이이츠카시 무궁화당에서 출발했다. 45년 해방직후 귀향선에 올랐다가 와카마츠 앞바다에서 몰살당한 조선인 조난자 위령비가 있는 키타큐슈시의 오다야마 묘지까지의 46㎞를 3월 24일까지 이틀간 걷기로 했다.

일본 실행위원회 쪽에서 손수 제작한 나무 손수레 위에 얹힌 비석에는 영어로 "전쟁으로 숨져간 이름없는 모든 시민들(UNKNOWN CIVILIANS KILLED IN WAR)", 바로 밑에는 우리말과 일어로 "사죄와 우호, 평화를 위하여"라고 쓰여 있었다.

강제동원의 한이 서린 시모노세키 항

▲ 당시 철 생산 공정을 설명하고 있는 배동록씨(왼쪽)와 그의 어머니 고 강금순씨의 야하타 제철소 노무수첩
ⓒ 김레베카
일본에서 처음 생긴 조선민족 학교인 시모노세키조선초중교에서 한국 실행위원들과 참가자들을 안내하고 재워줄 재일 2세 배동록씨('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 대표)와 일본측 실행위원회 관계자들을 만났다.

배씨는 1940년대 초반 시모노세키로 끌려와 갖은 고생해가며 7남매를 길러낸 부모님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십년이 넘도록 조선민족학교뿐만 아니라 일본인 학교들을 다니며 조선인 강제징용의 역사, 한국 문화 등을 가르치고 있다.

시모노세키조선초중교는 원래 1946년 국어강습소로 출발했다. 48년 미국 연합국 사령부와 일본 문부성이 조선인학교 폐교령을 내린 데 맞서 일본 전역에서 일어난 4·24 한신 교육투쟁 와중에 폐쇄되었다가 재일 조선인들이 뜻을 모아 56년 다시 문을 열었다. 학생은 유치원생까지 모두 55명에 불과하지만 우리 말, 우리 얼을 배우는 학생들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지금도 일본 정부가 '각종학교'(정식교육기관이 아닌 요리, 컴퓨터 학원 등과 같은 일반학원으로 취급되는)로 인가할 뿐 정식 학교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세제혜택 및 보조금 지원을 일절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검정고시 등을 통해 다시 편입학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교원 나카무라씨는 "지난 여름부터 평균 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월급마저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학교운영자금은 대부분 등록금과 동포들이 모아 보내오는 성금으로 충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학교 문 닫으라는 협박전화가 오는가 하면 총련계 여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치마저고리도 상황이 너무 위험해서 못 입게 하고 있다"며 "다수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왜 정착하게 되었는지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배동록씨가 입에 달고 다닌 말은 "지금은 정말 좋은 세상이 왔다"는 것이었다. 학교 주변으로 반경 1㎞ 지역이 바로 반세기 전 강제징용 당해 들어온 조선인들이 온갖 짐승 취급을 받아가며 정착해 이룬 '똥꾸르동네(=더러운 동네)', 오오츠보츠쿠였다.

시민회관으로 바꿔 쓰고 있는 당시 형무소, 돼지막, 화장터 등이 몰려있어 일본인은 못사는 동네로 여겨졌던 곳. 지금은 다 쓰러져가는 판자지붕 얹은 낮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이 동네에 당시 한인만 천명이 넘게 살았다고 한다.

배씨는 어렸을 적, 무연고자들을 화장해 묻은 합장비 앞에서 웃통 벗고 앉아 막걸리 마시며 소리를 지르던 조선인 아저씨들의 모습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고 했다.

일행은 이어 시모노세키항 이전 입항 구역으로 갔다. 지금은 빈터인 채 남아있는 곳이 당시에는 수상경찰서가 있던 자리였고, 그 옆으로는 큰 창고가 스무 개 정도가 열 지어 서있었다.

그 곳이 바로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짐승처럼 몰아넣고 노무동원 될 장소로 뿔뿔이 흩어져갈 때까지 가둬놓고 있었던 '축사'였다며 배씨는 상기된 채 말을 이었다. 일행은 배씨가 준비해온 들꽃을 시모노세키항 앞바다에 던지고 '고향의 봄'을 같이 불렀다.

군국주의의 기점지, 야하타 제철소

▲ 야하타 제철소(왼쪽)와 시모노세키 옛 화장터 자리
ⓒ 김레베카
배씨의 울분은 그의 부모님이 젊은 시절 끌려가 고생을 했다는 키타큐슈시 야하타 제철소에 이르렀을 때 절정에 달했다.

설립연도 '1901'년을 용광로 외벽에 크게 새긴, 지금은 관광객들이 간혹 들렀다가곤 하는 장소가 되어버렸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강제로 끌려온 한인 6천명이 펄펄 끓는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등의 가장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강요당했던 지옥 같은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근방 지쿠고 탄광지대로는 약 15만 명의 조선인들이 끌려가 석탄 캐는 일에 동원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전승 배상금으로 세워진 야하타 제철소는 '철은 곧 국가'라는 당시 모토 아래 아시아를 향해 '욱일승천'하던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위해 세워졌다. 이 제철소의 완성은 곧 키타큐슈 공업지대의 시작이었다. 이 곳에 제철소가 세워진 것은 동쪽으로 가까운 치쿠호 지방에 석탄과 석회석 산지가 있고, 당시 철광석 공급지였던 중국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 제철소 외에도 육해군 공창 증강, 철도국유화 등 군비확장을 위하여 정부 주도로 중공업 육성을 추진했고,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의 재벌기업 독점체제를 확립시켰다.

중공업 도시 키타큐슈시에는 또한 야하타 제철소와 후지제철소를 통합해 만든 신일본제철소가 자리잡고 있는데,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 기록> 등에 의하면 그동안 신일본제철소에서 지불되지 않은 강제연행자의 임금은 2만8000여명분 41만엔(현재 물가로 2900억 엔), 군인·군속 사망자 후생연금은 9만 명분 9000만 엔인 것으로 밝혀졌다.

신일본제철소는 현 포스코(POSCO)인 포항제철의 건립과 기술 이전에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현재 일제침략전쟁피해자 240여명이 2006년 6월부터 포스코를 상대로 위자료청구소송을 제기해오고 있다.

배씨의 어머니 고 강금순씨는 합천서 살다가 1940년 야하타제철소로 강제징용 된 남편 배봉곤씨(1903년 생, 1981년 작고)를 찾아 42년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당시 네 아이의 어머니였던 그의 어머니는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 관부연락선을 탔고, 결국 뜨거운 탄광 안에서 "소금물 먹어가며" 하루 12시간을 일당 단 1엔(그것도 '나라를 위한 저축'이라고 해서 도로 빼앗겼다고 한다)에 개돼지 취급을 받아가며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제철소 건물 2층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물론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들이었다.

전쟁으로 숨져간 이름 없는 모든 시민들에게 바쳐진 꽃

▲ 빗속에서 출발하는 스톤워크 참가자들
ⓒ 김레베카
사전 스톤워크 첫째 날인 24일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총 50여명의 일행은 후쿠오카현 이이츠카시의 무궁화당에서 출발식을 하고 문제의 비석을 끌면서 미야와카, 노가타를 거쳐 키타큐슈시 야하타 서구에 있는 고야노세(나가사키항에서 고쿠라까지 잇는 쇄국시대 일본의 유일한 서양문화·기술 전달로였던 '나가사키 가도'를 따라 있던 25개 역참 중 하나)까지 약 20km를 행진했는데, 비 탓인지 길에서 시민을 만나기 어려웠다.

무궁화당은 지쿠호 탄광 조선인 사망자들 유골 106주를 모신 곳으로, 90년대 중반부터 재일 지쿠호한인강제연행희생자납골식추도비건립실행위원회(2004년 민단·총련계 한인 조직 17개가 뭉쳐 국제교류광장무궁화당우호친선회가 됐고, 안에 조선인 강제동원진상조사규명지쿠호위원회를 두었다)가 이이츠카시에 적극 제안해서 지난 2000년 12월 완공됐다.

뒤에서 큰 역할을 한 옛 지쿠호 탄광 노역자 출신 배래선씨(친선회 이사장)가 이날 순례 뒤에 일행이 들른 나카마시 부락해방회관으로 찾아왔다. 배씨 또한 1943년 지쿠호 탄광지대로 징용 왔다가 일이 너무 힘들어 두 달 만에 도망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둘째 날은 다행히 날이 개었고, 일행은 나카마에서 미즈마키(수권), 치요시다이(일길대)를 거쳐 와카마츠 오다야마 묘지까지 다시 20㎞ 정도를 걸었다. 나카마 동네 안으로 수레가 들어갔을 때는 일본 시민들이 집 밖으로 나와 반겨주기도 했다. 공사장 인부와 개를 산책시키던 주부 등 일반 시민들이 잠시 합류하기도 했고, 와카마츠평화헌법9조를지키는회 등 연대 단체의 지원 행진자가 합류하기도 했다.

일행은 오다야마 묘지 안의 조선인조난자위령비에서 도착식을 갖고, 일본 실행위원 중 하나인 슈게 스님이 있는 벳부 니뽄산묘호지로 이동했다.

조선인조난자위령비는 해방 직후 불과 60톤가량의 목선을 타고 귀환 길에 올랐다가 불어 닥친 마쿠라자키 태풍으로 참변을 당한 조선인 80여명의 넋을 기리자는 한인들의 뜻을 모아 기타큐슈 시청이 1990년 12월 건립했다.

채영국(국민대·한국학연구)씨의 글 '귀환하는 한인들-일본지역'에 따르면 한인 귀환은 45년 11월 이후에는 연합국 군최고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일본 정부는 연합국 군최고사령부의 묵인 아래 '사회불안'을 내세워 군인과 군속, 강제연행 된 한인들을 우선 귀환시키고, 일본의 경제복구에 필요한 탄광 노무자 등은 가능한 한 귀환을 연기시켰다.

강제노동 피해 한인들은 미지급 임금도 못 받았을 뿐 아니라 1000엔 이상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조치에 따라 맨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기에 해방 전후 일본에 있던 잔류 한인 65여만 명 가운데 80%인 52만 명이 귀환을 희망했어도 실제로 귀향길에 오른 한인은 10% 뿐이었다. 그나마도 태풍 아니면 지뢰에 의한 격침사고에 의해 떼로 몰살당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 시민단체의 예상을 초월한 환대와 연대

▲ 운반되는 오다야마 묘지에 도착한 비석
ⓒ 김레베카
▲ 연도에서 일행을 환영해주는 일본 시민들
ⓒ 김레베카
일본 실행위원회측이 보여준 환대와 연대의식은 예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10여 년 전부터 일제 과거사청산 관련 문제들을 아시아 시민연대 평화운동으로 이어가고 있는 강제숙씨는 "일본 시민사회는 우리나라처럼 큰 담론이나 공동행동을 생산해내진 못하더라도 20~30년 전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작지만 구체적인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첫째 날 점심을 먹은 곳은 일본 상지대 사회경제연구소 부설 시모노세키노동교육센터였다. 카톨릭 신자인 일본 여성 세 분이 손수 밥과 국을 지어 내왔다. 원폭피해자와 산업재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곳은 아직 여력이 없어 외국인노동자 문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둘째 날 저녁을 먹은 나카마시 부락해방회관 또한 인상적인 곳이었다. 지금도 300여만 명이나 되는 일본사회의 천민 '부락민'은 취직, 결혼 등에서 비공식적인 차별대우를 당한다. 1920년대 수평사 운동에서 출발한 부락해방동맹을 비롯한 일본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80년경부터 부락해방인권확립요구실행위원회를 만들어 국가인권위 설립을 일본정부에 촉구하는 운동을 벌여왔다. 나카마시 부락해방회관도 이 같은 소수자 운동 한가운데에서 '조선부락'민 문제인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을 적극 알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한국 측 참가자들의 잠자리가 되어준 곳은 키타큐슈 쥬고쿠서점 옆 숙소였다. 우리나라 80년대 사회과학서점 운동과 비슷하게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을 꾸준히 지원, 확산해온 이 쥬고쿠서점을 37년째 운영하고 있는 이토 간지씨는 지난 1월 25일 <아사히신문> 여론조사를 예로 들어 일본인의 85%는 제2차 대전 중 저지른 죄과에 대해 아시아인들에게 사죄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거듭 밝히면서, "(우경화를 부추기는 일부 정치인들을 비롯한)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들과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시모노세키 시민의 모임, 강제징용을 생각하는 모임, 오다야마묘지 추도집회 실행위원회, 나가사키 증언의 모임, 원폭청년을녀의 모임, 오카모토 비폭력평화연구소, 후쿠오카 신일본제철 전 징용문제를 추궁하는 모임, 사진모임 파토로네 등이 연대해 있는 일본측 실행위원들은 '스톤워크 저팬'이 그 시발점이 되어준 지난 2년 동안의 경험과 특히 이번 '사전 스톤워크 코리아'를 준비하는 지난 몇 달 동안의 고민을 모두 담아 "사죄"가 우호, 그리고 평화 앞에 와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시 전쟁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지금의 오해와 적대가 끝나야하고, 그러자면 과거 자신들의 국가가 아시아 민중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도저히 무릎 꿇고 사죄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깊디깊은 고통과 한의 역사, 그리고 아시아가 앞으로 그 역사에서 반드시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될 교훈의 너비를 보아버린 것이다.

그 불씨가 한국으로 옮겨 붙는 데 큰 역할을 한 강제숙씨는 '스톤워크 코리아'를 통해 일본 시민들이 남한 전역에 쏟아낼 사죄 다음엔, 한국이 베트남 땅에 가서 마찬가지로 쏟아내야 할 사죄가 있으리라고 말했다. 그 사죄의 통한이 연대의 샘이 되어 그 다음 장소로 옮겨 흐르면서 아시아 전역에 전쟁을 도모한 가해자들이 써온 역사 아닌 전쟁의 피해자 민중이 길바닥 위에서 친구가 되어 같이 써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해국인 일본의 양심적인 소수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사는 지역의 한인 피해자들에게 매일 '사죄'하면서 그들과 굳게 연대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어렸을 때 강제로 끌려와 사역 당하던 조선인들의 피맺힌 울음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고, 일부는 반세기 전의 원폭투하, 또는 일본 대기업의 환경파괴로 인해 평생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도 우리도 피해자였고, 그들도 우리도 평화라는 똑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글-사진 = 김레베카(성공회대 민주주의와사회운동연구소 연구원)

'스톤워크 코리아 2007'은 4월 29일 부산민주공원을 출발해 광주, 하동, 평택, 서울을 거쳐 6월 15일 판문점(이후엔 비석은 놔두고 금강산 순례)에 닿게 됩니다. 행사에 관심 있는 분은 준비사무국 웹사이트(http://kr.blog.yahoo.co.kr)에 찾아오시면 되며, 더 궁금한 사항은 peacewalkkorea@yahoo.co.kr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태그:#스톤워크, #반전, #일본, #태평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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