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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 당수.
ⓒ 연합=AP
지난 2002년 대선 1차전 다음날인 4월 22일, 프랑스 국립인쇄소는 난데없는 종이 폭격에 노출됐다. 무려 1000톤에 달하는 헌 종이들이 인쇄소를 가득 메운 것.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강력한 맞수였던 리오넬 조스팽 사회당(PS) 전 총리의 이름이 새겨진 투표용지들이었다.

선거전 초반부터 터져나온 각종 여론조사에 따라 시라크와 조스팽의 2차전 맞대결을 예상한 국립인쇄소는 일찌감치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2차전용 투표용지를 인쇄해놨던 것이다.

예상은 빗나갔다. 극우당 국민전선(FN)의 장-마리 르펜(16.86%)이 조스팽(16.18%)을 제치고 시라크(19.88%)와 나란히 2차전에 오른 것. 정치 대지진이었다. 극우당 후보가 대선 2차전에 오른 것은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었다.

조스팽은 즉시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프랑스의 극좌파 노동자투쟁당(LO)의 아를레트 라기예(65) 후보를 제외한 각 정당은 좌우를 막론하고 시라크에게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라기예는 시라크 대통령 만들기 전선을 '정치적 매춘'이라 규정했다.

대선 1차전 직후 반 르펜 전선을 형성한 시위대는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고 프랑스의 언론 또한 공공연하게 시라크 편에 섰다. 이어진 5월 1일 노동절에는 파리에서만 50만의 시위대가 집결했고 지방 대도시에서도 80만이 거리를 행진했다.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 되면 프랑스를 뜨겠다!"

결과는 시라크의 승리.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득표율(82.21%)로 재선을 탈환한 것이다.

"대선 1차전 저녁 뜻밖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것"

4.21 정치 대지진의 주인공 르펜(78)이 돌아왔다. 지난 주 초까지만 해도 대선 1차전 도전 가능성이 회의적이었던 르펜. 프랑스의 대선은 출사표를 던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조건이 따르기때문이다.

상원과 하원 의원을 비롯해 유럽의회 의원, 지방의회 의원, 시장 등 전국의 선출직 공무원 500인 이상으로부터 지지서명을 받아야 하는 것. 이것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보들을 1차 걸러내는 여과장치다. 이달 초까지도 지지서명 400~450선을 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르펜이 지난 14일 535건의 지지서명을 확보,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그리고 르펜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선 1차전 저녁 뜻밖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 극우파 후보 르펜이 지난달 25일 프랑스 북부도시 릴에서 열린 집회에서 프랑스 국가를 부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제2의 4.21 정치 대지진을 준비하라는 암시. 지난 1월 8일 신년인사를 겸한 기자회견에서 '십중팔구' 대선 1차전 통과를 자신한 르펜은 또한 2차전은 '십중팔구'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53)과 겨룰 것을 호언해왔다.

이민과 치안, 애국심에 호소하는 집권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52)의 '강권적인' 연설이 오히려 르펜의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사르코지를 견제하기 위해 자크 시라크(74) 프랑스 대통령이 3선을 노림으로써 우파의 분열을 장담했던 까닭이다. 시라크는 그러나 지난 11일 TV와 라디오를 통한 담화에서 대선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최근까지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는 르펜의 기대에 부응해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02년 같은 시기의 여론조사와 비교해 올해는 가히 극우당 역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10~15%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것. 사르코지와 루아얄의 격한 2파전이 르펜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르펜이 대선 1차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선출직 공무원 500인의 지지서명.

대선 운동 초반부터 지지서명을 확보한 집권 대중운동연합의 사르코지, 사회당의 루아얄, 프랑스민주동맹(UDF)의 프랑수아 바이루(55), 프랑스공산당(PCF)의 마리-조르주 뷔페(56)를 제외하면 노동자투쟁당의 라기예만이 지난 1월 간신히 500인의 지지서명을 받아낸 상태였다.

지지서명 경매에 부치고 낙찰받아 찢어버리고

@BRI@전국 4만 7289명에 달하는 선출직 공무원들은 지지서명을 꺼려왔다. 총 16명의 후보가 난립해 정치 대지진을 유발한 지난 2002년의 재연을 염려한 까닭이다. 군소정당에 표가 분산될 것을 우려한 거대 정당들은 각 정당 소속 시장들에게 지지서명을 남발하지 말 것을 '엄격하게'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대중운동연합은 은밀하게, 사회당은 공개적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때문에 지지서명을 얻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군소정당은 이것이 '힘 없는 시장들에 대한 탄압'이라 비난하기에 이른다. 중앙의 명령을 어길 경우 내년으로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시장들이 지지서명에 난색을 표명해온 것.

뿐만 아니라 지난 2002년 '정치 대지진'의 기억은 지방 소도시 시장들을 더욱 위축시켰다. 르펜에 지지서명을 전달한 시장들은 반 르펜 전선의 한가운데서 비난의 표적이 됐던 것이다. 일례로 지난 1일 프랑스의 공영TV 채널 <프랑스 2텔레비전>은 저녁뉴스 시간에 프랑스 북서부의 작은 도시 망쉬의 경우를 소개한 일이 있다.

▲ 노롱-라-포트리의 시장 앙드레 가렉(왼쪽)과 이것을 1500유로에 낙찰받아 현장에서 찢어버린 라시드 네카즈(오른쪽)의 모습. 각자의 입장을 설명하고(맨위) 지지서명서와 수표를 교환한 다음(가운데) 지지서명서를 찢어버리고 있다.(맨 아래)
ⓒ LCI-TV
로베르 슈발리에 망쉬 시장은 2002년 르펜 측으로부터 750유로와 지지서명을 맞바꾼 시장 중의 하나. 750유로는 망쉬 시의 시민단체를 위해 썼다해도 면죄부가 되지는 못했다. 한동안 비난에 시달린 슈발리에는 '두 번 다시 골치 아픈 일을 겪기 싫다'면서 올해 르펜 측이 제시한 1000유로를 거절했다.

지난 12일에도 지지서명에 얽힌 웃지 못 할 사건이 일어났다. 수많은 군소정당의 서명 요청에 시달린 끝에 주민 300명의 작은 도시 노롱-라-포트리의 시장 앙드레 가렉은 수익금을 시민단체에 기부하겠다며 지지서명을 아예 경매에 부친 것이다. 가렉에 따르면 르펜 측은 1000유로를 제시했으나 1500유로를 제안한 비정치적 후보 라시드 네카즈에 낙찰됐다.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는 지지서명 경매 사건은 프랑스의 정보 전문 TV 채널 <엘세이>(LCI)를 통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탔다. 약속한 금액에 50유로를 더해 1550유로의 수표를 전달한 네카즈는 그러나 지지서명서를 건네받자 마자 현장에서 찢어버렸다. 12일 현재 450여 지지서명을 모은 네카즈에게 이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공산품이 아니"라고 항의하고 싶었다고.

이같은 분위기는 물론 르펜을 피해가지 못 했다. 2002년에 비해 지지서명 확보가 '특히' 힘 들었다는 르펜은 자신이 극우당을 겨냥한 방해공작의 희생자라 했다. 국가권력이 소수 정치가에 귀속되는 '과두정치의 음모'가 지지서명 동결 사태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사르코지의 '르펜 일병 구하기'?

뿐만 아니라 르펜은 프랑스의 또 다른 극우당 프랑스운동(MPF)의 후보 필립 드 빌리에가 르펜의 지지서명 수집을 정면에서 방해하고 있다고도 했다. 지난달 말 르펜은 드 빌리에 측이 전화를 통해 르펜에 지지서명을 줄 것으로 보이는 시장들을 협박하거나 이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 저속한 술책을 부리고 있다며 고발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그러나 르펜의 불평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돌발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돌발상황은 엉뚱하게도 사르코지에서 비롯됐다. 사르코지는 지난 주 르펜이 자신과 함께 대선 1차전을 겨룰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사르코지의 배려는 집권 대중운동연합 소속 선출직 공무원들이 르펜에 지지서명을 전달하는 것으로 증명됐다.

"지난 2002년 대선 2차전에 오른 후보가 올해 대선 1차전조차 겨룰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1일 프랑스의 인기 유료 TV 채널 <카날 플뤼스>에 출연한 사르코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이것이 단순히 '민주주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2007 대선의 다크호스 바이루 때문이었다.

지난 1월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사르코지와 루아얄에 이어 줄곧 3위를 지켜온 르펜은 한 달 여만에 지지도 14%P를 끌어올린 바이루 효과 때문에 4위로 밀려난 것.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는 사르코지가 26%, 루아얄 25%, 바이루 24% 등 근소한 차이로 1, 2, 3위를 기록하는 비상사태까지 연출됐다. 사르코지에게 바이루는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던 것. 르펜을 끌어들여서라도 바이루의 표를 분산시키겠다는 계산이었다.

▲ 지난 11일 출마포기를 선언하는 시라크 대통령.
ⓒ 프랑스 제2TV
결국 지지서명 마감 기한인 16일 저녁 6시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르펜이 공식 후보로서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에 안착함으로써 사르코지의 '르펜 일병 구하기'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일명 '정치 동물' 사르코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사건이다.

그리고 지난 11일 대선 출마 포기를 선언한 시라크 대통령의 담화는 이 사건을 묵과하지 않았다.

"극단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와 결코 타협하지 마십시오. 극단주의는 독약입니다. 극단주의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타락시키고 파괴합니다!"

2002년 극우파 르펜과 싸워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다운 경고였다.

태그:#시라크, #조스팽, #르펜, #프랑스,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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