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1일부터 일본을 방문 중인 존 하워드 호주 총리가 뜻밖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거론해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하워드 총리는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무역파트너인 일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런 행보를 보여 왔는데, 다른 일도 아닌 안보조약 서약을 위한 공식방문의 자리에서 일본의 아킬레스건인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주 획기적인 변화이다.

이런 변화의 조짐은 지난 2월 15일 미국 하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청문회에서 시작됐다. 이어서 3월 7일 시드니 시내에서 열린 175번째 수요집회 과정이 시드니 발 뉴스로 뉴욕타임스, 로이터, CNN 등의 언론에 집중보도 되면서 불거진 측면도 있다. 뉴스의 진원지인 시드니에서 전후사정을 알아보았다.

▲ 7일 정오 시드니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제751회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
ⓒ 윤여문
뉴스의 초점이 된 175번째 수요집회

이미 보도했지만, 지난 3월 6일 시드니에서는 한국, 대만, 호주 국적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의 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들의 마지막 질문이 10여 차례 반복될 정도로 회견장의 취재열기는 높았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의 발언이 단초를 제공했다. 바로 그날 아침 외신을 통해서 "위안부 강제 동원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발언이 시드니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3월 7일, 시드니 중심가에 위치한 시드니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751번 째 수요집회도 아베 총리의 망언 때문에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79), 타이완에서 온 우시우메이 할머니(吳秀妹 91), 호주국적의 얀 오헤른 할머니(84)가 아베 신조 총리에게 보내는 항의성명서를 히로시 마나베 일본 부총영사에게 직접 전달한 것도 시드니 수요집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한 몫 했다.

그후 지난 며칠 동안, 시드니 발 외신보도가 계속 전 세계로 타전되면서 이런저런 논쟁의 불씨가 됐다. 특히 미국과 일본 언론의 공방전이 뜨겁다. 뉴욕타임스에 대한 산케이신문은 감정적인 대응은 수위를 넘어선 모습이다.

뉴욕타임스 기자의 집요한 취재와 집중보도

@BRI@그런데 정작 화약고는 일본에 있었다. 미국 하원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될 전망이 높아지자 아베 총리가 돌연 강경자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본정부가 그동안 마지노선처럼 지켜왔던 '고노 요헤이 내각관방장관 담화'(1993년 8월 4일)를 철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위안부 강제동원에는 증거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 한 것.

한국에서 온 이수현 뉴욕타임스 서울지국 실장과 함께 공동취재에 나선 오니시 노리미쓰 뉴욕타임스 도쿄지국장은 3월 5일 외신기자회견 전날부터 3월 7일 시드니 수요집회까지 3일 동안 본 기자와 계속 마주칠 정도로 활발하게 취재활동을 펼쳤다.

게다가 시드니 수요집회 증언에 나선 세 할머니들 인터뷰 일정이 전부 앞뒤로 잡혀있었다. 대부분 본 기자가 뉴욕타임스 기자들 다음에 인터뷰를 했는데 보통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물론 통역이 요구되는 인터뷰인 탓도 있었지만, 그들의 취재가 그만큼 집요했기 때문이다.

함께 취재에 나선 본 기자로서는 뉴욕타임스의 장거리 원정취재 자체가 흥미로운(?) 취재거리가 됐다. 특히 일본계 캐나다 시민권자인 오니시 도쿄지국장이 일본 극우단체들로부터 테러위협을 당하면서도 용기 있게 취재에 나선 사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기 모국의 치부를 들춰내어 전 세계에 알리는 취재지만 그의 기자정신은 단호했다. 다만 자신의 취재모습이 한국언론에 보도되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정면사진 등을 자제해달라고 본 기자에게 요청했다.

▲ 끔찍했던 위안부 경험을 털어놓고 있는 얀 오헤른 할머니.
ⓒ 송애나
"힘에 부치지만 이를 악물고 증언한다"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위력적이었다. 호주 주요언론이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로이터, CNN 등의 보도사실을 다루었고, 그에 따른 호주정계의 반응과 논객들의 논평도 나왔다. 특히 호주언론까지 관심을 보인 뉴욕타임스와 일본의 보수 계통 언론들인 산케이신문과 요미우리신문의 지상논쟁은 오니시 지국장이 만들어낸 성과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마친 할머니들은 본 기자와의 인터뷰를 갖기 전에 잠깐 동안의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지친 모습이었다. "왜 기자들은 '마지막 질문'을 열 번도 넘게 하느냐?"면서 웃으시는 할머니들께 "그럼 왜 '마지막 답변'을 열 번도 넘게 하시냐?"는 우스개를 주고받으면서, 어떤 내용의 질문을 받았느냐고 물으면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우리의 입장은 하나라도 더 증언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너무 상세하게 질문을 해서 답변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 로이터, CNN, 교도통신, 시드니모닝헤럴드, 호주국영 ABC-TV 등이 어떤 매체들인가. 힘에 부치지만 이를 악물고 증언한다."

특히 호주 국적의 얀 오헤른 할머니의 미디어 대처방식은 아주 전략적이다. 영향력이 큰 매체에 집중하는 것. 매체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체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더욱이 오헤른 할머니는 자신이 최초의 백인여성(the first Caucasian) 증언자여서 일본정부가 아시아국가 출신 할머니들보다 더 두려워 한다는 것을 눈치 챈 후부터, 외신인터뷰를 활용해서 보다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대 일본 압박을 펼치기 시작했다.

200자 원고 31매 분량의 긴 기사

▲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미-일 언론 공방전을 촉발한 <뉴욕타임스> 8일자 기사
3월 7일 시드니 수요집회 현장에서 마주친 오니시 지국장이 "뉴욕타임스에 실린 사설을 읽어보았느냐?"고 기자에게 물어와서 읽어봤다고 대답하자 그는 "일본 우익계 신문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면사진 한 장만 찍자"는 기자의 요청에는 거듭 손사래를 쳤다.

오니시 지국장은 시드니에서 만난 길원옥, 우시우메이, 얀 오헤른 할머니와의 인터뷰기사를 통해서 세 할머니들의 끔찍했던 사례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섹스, 강간, 낙태, 유괴, 납치 등의 용어가 등장하는 200자 원고 31매 분량의 긴 기사였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서 들은 생생한 증언을 기초로 "아베 신조 총리가 국가나 군대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동원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말했지만 아직도 생존해서 생생하게 들려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총리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고 공박했다.

한편 오니시 지국장이 궁금해 하던 일본 우익계통 신문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즉각 나왔다. 그가 전송한 시드니 발 기사가 뉴욕타임스의 3월 8일자 1면 톱으로 보도되자 산케이신문 등이 즉각 반격을 가한 것.

특히 산케이신문은 북한과 일본이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보도하면서 "뉴욕타임스가 위안부(comfort women)를 섹스노예(sex slave)로 왜곡한 것은 미 하원에 상정된 위안부결의안 통과에 큰 영향을 줄 것이고 김정일도 고무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 VS 산케이신문+요미우리신문

그 기사에는 산케이신문이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어진다. "뉴욕타임스에는 제이슨 블레어라는 이름의 민완기자가 있었다. 그는 반년 동안 36건의 허위기사를 써서 해고됐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뉴욕타임스를 최고의 정론지로 떠받들고 있지만 사실은 오보와 허위보도의 산실이기도 하다"면서, 다분히 오니시 국장을 겨냥하는 듯한 비판기사를 게재했다.

일본에서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도 비판의 대열에 가세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정부의 장기간 조사결과 위안부 강제연행은 사실이 아니며, 그것을 증명할 문서도 없고 대다수 일본 역사학자들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한다"는 내용의 뉴욕타임스 반박 사설을 게재했다.

일본군의 강제연행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베 총리뿐이 아니다. 고노담화의 작성에 관여한 바 있는 이시하라 노부테루 당시 관방부장관도 "관계당국이 장기간 철저히 조사했지만 정부나 군이 위안부를 강제연행을 지시했다는 문서나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일본의 일부언론과 일본정계 거물들의 언행에 화가 치밀 대로 치민 오헤른 할머니가 차마 입에 담기도 거북한 끔찍한 사실들을 토로하면서 "이래도 강제 연행이 아닌가?"라며 그들에게 공박을 가했다.

오니시 지국장이 송고하여 3월 8일자 뉴욕타임스 1면 톱기사로 게재된 오헤른 할머니의 기사는 미국인들이 충격을 받기에 충분한 민감한 내용들이 포함됐다.

오헤른 할머니 자신을 포함한 여러 명의 네덜란드계 백인 처녀들이 2년 넘게 일본군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급기야 위안소로 강제 연행되는 과정과, 오헤른 할머니가 사무라이 칼로 위협하는 장교에게 순결을 빼앗기는 장면을 포함해서 성병진료를 나온 의사에게 사정을 호소했지만 오히려 의사에게 강간을 당하는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보도된 것.

▲ 지난 7일 시드니 수요집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한국, 대만, 호주 위안부 할머니들.
ⓒ 윤여문
일본은 할머니들이 죽기만 기다릴 것인가?

오헤른 할머니는 본 기자에게도 같은 내용을 숨김없이 토로하면서 "이런 내용이 보도되어야 아베 신조 총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독자들이 알게 된다"면서 차마 한 번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을 하루에 두 번이나(뉴욕타임스, 오마이뉴스) 반복했다.

언뜻 듣기에는 어렵지 않은 일 같지만, 거의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증언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때로는 "저러시다가 쓰러지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일본 정부가 고집스럽게 쓰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그들이 과거를 인정하면서 사과하기를 바라는 것. 특히 최근에 불거져 나온 아베 총리의 망언을 정면으로 뒤집어 엎고 싶은 의지가 아주 강하게 읽혔다.

특히 지난 2월 16일자 오마이뉴스에 보도된 본 기자의 기사를 전달받은 오헤른 할머니는 그 기사 내용 중에 인용된 E. 헤밍웨이의 글을 읽으면서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라고 말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멸될 수 있을 지언 정 결코 패배당할 순 없다(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may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단지 오헤른 할머니뿐이 아니다. 타이완에서 수 천 마일을 날아와서 이틀 동안 "내 과거 때문에 두 번 이혼 당하고 지금도 양녀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눈물로 증언 한 후에 바로 타이완으로 돌아간 91세의 우시우메이 할머니, 15살에 중국 동북지방으로 끌려가서 1년 동안 치욕을 당하고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늙어가는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79)의 불패정신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이래도 계속 부정만 할 것인가? 할머니들이 죽기만 기다릴 것인가?"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다.

▲ 자신의 사연을 보도한 오마이뉴스 기사를 들고있는 오헤른 할머니와 딸 캐롤, 손녀 루비.
ⓒ 윤여문

태그:#위안부, #존 하워드, #호주, #오헤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