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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옌안 양꺼대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안사이 야오구 공연. 젊은 남성 농민들로 조직된 야오구대는 활력이 넘치고 정열적인 공연을 선사한다.
ⓒ 모종혁
그랜드 캐년을 연상케 하는 거대하고 깊은 황토의 고원. 그 위를 형형색색 의상을 입고 각종 도구를 흔들며 경쾌히 춤을 추는 일단의 사람들. 황토 위에서 먼지를 날리며 허리에 맨 작은 장구를 신명나게 치고 춤추며 흥을 돋우는 흰옷 입은 젊은 농민들.

1986년 방영되어 적지않은 다큐멘터리 마니아를 낳은 일본 NHK가 제작한 <대황하>(大黃河)의 한 장면이다. 지금도 감미롭지만 강렬한 노무라 소지로의 오카리나 연주곡이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대황하>에서 보여준 황하 주변에 사는 중국 한족들의 생활과 문화는 단조롭고 밋밋했다.

@BRI@오늘날 중국내 소수민족은 거센 한족 문화의 침입 속에 가파른 동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고집스레 유지해 오고 있다. 황하 주변에 사는 여러 민족들 또한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한족은 100여년간 지속된 서구열강 및 일제의 침략, 서구문화의 침투, 전통문화와 역사유적을 압살하고 파괴한 문화대혁명의 10년 재난 속에 전통풍습을 점차 잊은 채 살고 있다.

중국 대륙의 한족 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습은 대만과 홍콩이 오히려 더 잘 보존하고 계승해 왔다"고 고백하는 21세기 중국의 현실. 서구문화와 물질문명의 침략 속에서도 자연에 순응하며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전통을 이어나가며 지역문화를 꽃피운 한족 거주지가 있으니, 바로 산시(陝西)성 북부지방이다.

▲ 옌안 곳곳에서 중국공산당의 혁명 유산이 넘아있다. 자오위엔(棗園)에 보존된 마오쩌둥의 야오동.
ⓒ 모종혁
▲ 옌안 양자핑(楊家坪)에 남아있는 주더(朱德)의 야오동 내부. 토굴을 파는 짓는 야오동은 단열성이 강해서 난방효과가 극대화된다.
ⓒ 모종혁
중국공산당의 혁명거점이자 산베이의 중심지 옌안

옌안(延安), 그 곳은 산베이(陝北)지방의 중심도시이자, 중국공산당의 혁명성지이다. 평균해발 1000~2000m, 한국 3배에 달하는 면적에 몽골의 고비사막에서 불려온 황토가 수백만 년동안 쌓여서 생성된 황토고원. 황토고원의 토양은 비옥하지만 10년 중 9년이 가뭄이고 토지의 지속적인 유실 때문에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옌안은 황토고원의 험산 고산지대에 에워쌓은 작은 분지에 형성된 도시이다. 옛부터 용맹한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는 요충지로 번성한 옌안은 연평균 기온이 7.7~10.6℃, 강수량은 500~700mm에 불과하다.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야오동'(窯洞)이라 불리는 전세계적으로도 독특한 형식의 거주방식인 동굴주거를 하는 산베이의 도시 옌안.

옌안이 외부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36년 마오쩌둥이 이끈 홍군이 2만5000리의 장정을 마치고 중국 공산혁명의 근거지로 삼으면서부터이다. 긴 세월동안 산베이의 경제·문화·교통의 요지였다고는 하지만, 당시 옌안은 대부분 목축업에 종사하고 약간의 모직물을 생산하는 가난한 농민들이 사는 산간도시였다. 재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중국공산당은 옌안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1936년 12월 공산당 토벌을 위하여 산시성 시안(西安)에 주둔했던 장쉐량의 동북군과 양후청의 서북군은 난징(南京)에서 온 장제스(蔣介石)를 감금한 시안사건을 일으켰다. 시안사건 후 국공내전은 정지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공산당은 향후 항일투쟁과 2차 세계대전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힘을 키웠다.

▲ 1940년대 초반 옌안의 한 양꺼대와 함께 한 마오쩌둥(왼쪽). 작년 1월 옌안을 방문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도 옌안 양꺼를 격찬했다.
ⓒ 옌안정보사이트, 싱다오닷컴

▲ 올해도 옌안에서는 지난 4일 정월대보름에 대형 양꺼대축제가 벌어졌다.
ⓒ 신화통신 산시홈페이지
마오쩌둥이 격찬한 민간예술 옌안 양꺼

1942년 옌안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권을 공고히 한 마오쩌둥은 '옌안문예좌담회담화'(이하 '담화')를 발표했다. 중국문예사의 이정표로 불리는 이 '담화'에서 마오는 "중국 문화예술을 발전시킨 진정한 공로자는 인민대중"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예술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는 인민대중의 실제 삶과 생활 속에서 소재와 형식을 찾아 나온데서 비롯된다"면서 "옌안의 양꺼(秧歌)는 산베이의 지리적, 문화적 토양 위에 본래의 민속성과 자발성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발전한 혁명문예운동의 본보기"라고 격찬했다.

양꺼는 음력 1월 1일 춘지에(春節), 정월대보름의 위안샤오제(元宵節) 등 큰 명절에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추는 집단 노동무이다. 본래 양꺼는 모내기 할 때 부르던 노래에서 유래됐다. 명절 때마다 마을의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면서 평안과 재복을 기원하는 군무를 추는 양꺼는 태평소와 타악기로 구성된 악대가 더해지면서 규모가 커졌다.

옌안 양꺼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데, 옌안과 그 주변에서는 천여년 전 송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양꺼와 야오구(腰鼓)를 추는 벽화, 부조각 등이 끊임없이 출토되고 있다. 가지각색 의상과 화려하게 장식된 우산을 흔들며 독특한 스텝으로 추는 양꺼대는 보통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른다.

양꺼대 참여자는 마을 주민들로, 이들은 일상생활과 생산노동 외의 시간에 양꺼를 익힌다. 전문공연단이 아닌 양꺼대의 공연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자연스럽고 흥이 넘친다. 복을 가져다주는 양꺼대의 행렬이 지나가면 동네 주민들은 모두 나와 같이 춤을 추면서 흥겨운 분위기를 돋운다.

▲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각양각색의 도구를 흔들며 옌안식 꼭지점 댄스를 추는 양꺼대.
ⓒ 모종혁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양꺼대축제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옌안에서는 위안샤오제 양꺼대축제가 벌어진다. 옌안시 뿐만 아니라 주변 각 현과 지역내 주요 기관, 공장 등에서 조직된 양꺼대, 야오구대는 다양하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옌안거리를 활보한다. 기자는 지난 2003년 옌안을 방문, 위안샤오제 양꺼대축제의 준비 상황과 축제 현장을 취재했었다.

당시 축제를 주관한 옌안시 문화국 공연예술과 자오다위안 과장은 "옌안 위안샤오제 양꺼대축제는 1950년대 후반 지역 주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시정부가 해마다 주관하는 행사"라며 "춘지에 후 4, 5일 되는 시점에서 옌안과 주변 각 현에서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된 양꺼대가 주축이 되어 지역 특색의 양꺼 축제가 벌어진다"고 소개했다.

자오 과장은 "양꺼가 1열 혹은 2열 종대로 긴 행렬을 이루는 것은 험한 황토고원 위에 세워진 마을에 한 두 사람 오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둔 지리적 특성에서 유래된다"고 말했다. 그는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소규모나마 양꺼대축제는 지속되어 왔다"면서 "마오쩌둥의 '담화'를 통해 중국의 대표적인 민간예술로 발전한 옌안 양꺼의 명맥을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조차 어찌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양꺼대축제 현장에서 만난 뤄촨(洛川)현 부현장은 "현정부에서 양꺼대의 공연을 지원하긴 하지만 참여자는 모두 농민으로 스스로 조직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안샤오제를 비롯해서 청명절, 노동절, 중치우제(中秋節, 우리의 추석), 국경절에도 옌안과 각 현마다 나름대로의 양꺼축제가 행해진다"면서 "위안샤오제 양꺼대축제를 위해서 각 현은 주제와 형식이 다른 양꺼를 선보이기 위해 준비한다"고 말했다.

▲ 양꺼대축제에 참가한 한 양꺼대는 사람을 연변조선족자치주까지 보내어 우리 민족의 춤사위를 배워오게 했다.
ⓒ 모종혁

▲ 양꺼대축제를 보기 위해 멀리 베이징, 상하이, 홍콩에서까지 관광객이 몰린다. 현지 주민들도 양꺼대의 다양한 공연이 보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 모종혁
중국을 대표하는 민간예술로 발돋움 하기도

양꺼대축제가 끝날 쯤 만난 홍콩 피닉스위성TV 제작진 일원인 마이클 창은 "안사이(安塞)를 무대로 한 지역 양꺼 양식인 야오구대의 이야기를 다큐로 제작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NHK가 제작한 <대황하>에서 장쾌하고 다이내믹한 야오구를 방영하면서 안사이 야오구는 개혁개방후 처음으로 외국으로 진출한 민간예술단 중 하나가 되었다"면서 "안사이 야오구대는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개막식, 1997년 홍콩반환기념행사, 1999년 중국 건국 50주년 기념식 등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유명한 지역농민에 의해 운영되는 민간예술단"이라고 말했다.

창은 "야오구는 본래 전쟁에서 병사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해 허리에 작은 북을 매고 두드리던 것에서 유래됐다"면서 "북방민족과의 전쟁이 빈발하고 오지에 있어 의료 혜택이 적었던 안사이에서는 적에게 위협을 주고 질병을 쫓는 의미에서 야오구 활동이 발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 양꺼대축제도 대성황을 이뤘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3월 4일 옌안에서 거행된 '산베이양꺼대축제'를 보기 위해 10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낮 12시에 시작된 양꺼대축제에는 옌안과 주변 각 현에서 온 3000여명으로 조직된 10여개 양꺼대가 참가했다"면서 "양꺼대축제를 보기위한 주민들과 관광객으로 옌안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보도했다.

오늘날 가족끼리 위안샤오(元宵) 혹은 탕위안(湯圓) 먹는 날로 전락한 중국의 위안샤오제. 척박한 황토고원 위에 사는 산베이 농민들은 지금도 양꺼축제를 자발적으로 벌이고 주민들 간의 협동과 상부상조의 정신을 다지며 전통문화와 민간예술을 전승해 나가고 있다.

▲ 오늘날 안사이 야오구대는 중국을 대표하는 민간예술공연단으로 성장했다.
ⓒ 모종혁

#양꺼대축제#대황하#황토고원#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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