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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촨성 광안시 덩샤오핑기념관 중앙홀에 자리잡은 덩의 부조상.
ⓒ 모종혁
20세기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체제의 투쟁 시대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 이론을 가장 다양하게 실험한 이는 록펠러, 포드, 빌 게이츠가 아닌 공산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1978년 덩은 문화대혁명의 10년 광란을 종식시키고 중국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유연하지만 굴복하지 않는 강한 의지로 획일화된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고 경제건설을 우선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한 덩.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변하면서 중국은 강대해졌고 세계는 달라졌다.

▲ 덩샤오핑고향마을 입구 주차장에는 상하이, 충칭 등 외지에서 온 차량이 즐비하다. 허나 이 차량들은 춘지에 연휴를 맞아 덩 고향을 찾았을 뿐이다.
ⓒ 모종혁
무질서와 가난의 그림자가 짙은 덩의 도시 광안

춘지에(春節, 춘절)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인 충칭(重慶)시 시외버스터미널을 떠나 2시간여만에 도착한 광안시. 이곳을 네 번째 찾은 기자를 따뜻이(?) 맞이한 것은 택시기사들의 승차거부와 바가지였다.

춘지에 연휴와 덩샤오핑 서거 10주년을 맞이하여 광안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택시들은 하나 같이 미터기 내리기를 거부하며 평소보다 2, 3배의 가격을 불렀다. 천연덕스럽게 덮어씌우는 바가지에, 여러 사람들을 함께 태우는 합승까지 감행하는 택시기사들에 질려 어쩔 수 없이 만원버스에 몸을 실어야 했다.

2001년 처음 찾은 이래 작년에만 두 차례 방문했던 기자의 눈에 광안은 기이한 도시였다. 잘 짜인 도시계획에 따라 넓은 도로, 아담한 건물, 적절한 공원과 개천, 언뜻 보면 광안은 살기 쾌적한 중국의 중소도시 같다. 그러나 도심을 달리는 차량이 많지 않고 도시 빽빽이 들어선 건물 대부분은 비어 있어 괴기스런 느낌을 주었다.

화려한 도시 외형과 달리 오가는 광안 시민들의 옷차림은 남루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삶의 고단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러 상념이 교차하는 가운데 기자가 탄 만원버스는 덩샤오핑이 태어난 마을 시에씽(協興)진 파이팡(牌坊)촌에 도착했다.

▲ 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마을은 모두 철거되고 덩의 기념관과 옛집만이 남아 성역화되었다.
ⓒ 모종혁
성 정부 지도자의 헌화조차 없는 덩샤오핑 동상

지난 1월 18일부터 23일까지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한지 15주년 되는 날이기도 했다. 1989년 텐안먼(天安門)사건 이후 위기에 빠진 개혁개방정책을 염려한 덩은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 남부지역을 돌며 개혁개방을 독려했다.

▲ 덩샤오핑 고향마을 중앙에 위치한 덩의 동상에는 무수한 헌화들로 둘러싸여져 있다. 덩 서거 10주년을 맞아 충칭에서 온 한 시민이 놓고 간 헌화가 눈길을 끈다.
ⓒ 모종혁
무슨 일이나 기념일을 5년 혹은 10년마다 기념하길 좋아하는 중국인들이기에, 기자는 남모를 기대감에 부풀었다. 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여 거국적으로 진행됐기에, 이날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행사가 있으리라 기대됐다.

위대한 성인의 탄생지처럼 성역화된 덩의 고향에 들어선 순간부터 기자의 환상은 무참히 깨졌다. 퇴락한 주민 거주지를 모두 철거하고 잘 꾸며진 덩의 고향마을(故里) 중앙에 자리잡은 그의 동상에는 수많은 헌화가 놓여 있었다.

헌데 주목을 끄는 것은 헌화자의 신분이었다. 중국 중앙정부 지도자의 이름은 하나도 안 보이고 쓰촨성 정부 지도자의 헌화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가장 고위직 관리가 보낸 헌화는 광안시 당서기가 보낸 것이었다.

그마저도 한 충칭시민이 바친 헌화에 비하면 정성이 덜하다는 느낌이었다. 동상 앞에서 조화를 파는 상인 자오(여)는 "오늘 대목이라 생각했는데 판매량이 그리 많지 않다"며 울상을 지었다.

▲ 작고 초라한 덩샤오핑 서거 10주년 기념식 무대. 이 기념식의 주관기관은 덩의 고향마을관리소와 광안시 TV방송국이다.
ⓒ 모종혁
기념식 주관자가 고작 관리소와 TV방송국?

광안시 지방정부가 주관했다는 기념행사가 열린 무대는 기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19일 오전 10시에 30분간 진행된 덩샤오핑 서거 10주년 기념식 주관기관은 덩의 고향마을관리소와 광안시 TV방송국. 정부 차원의 성대한 기념행사가 아닌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성 행사임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관광가이드 왕타오는 "오늘 덩의 고향을 찾은 방문객이 평소보다 많지만 그 이유는 순전히 춘지에 연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적지않은 방문객은 오늘이 덩 서거 10주년인지도 모른다"며 "2004년 덩 탄생 100주년 기념식 당시 온갖 지도자들이 보낸 헌화와 인산인해를 이룬 방문객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 하루"라고 아쉬워했다.

▲ "장사치들만 신났네." 춘지에 연휴를 맞아 몰려든 방문객들에 덩샤오핑기념관 앞 상인들은 덩 관련 기념품 판매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 모종혁
고향마을 입구부터 동행한 천즈강도 "춘지에를 맞아 아내의 고향을 찾은 김에 가족과 함께 방문했다"면서 "솔직히 오늘이 덩 서거 10주년인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 왔다는 그는 "방송뿐만 아니라 신문조차 덩 서거 1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가 거의 없었다"면서 "오늘날 중국을 건설한 위대한 위인의 기념일을 이렇게까지 잊혀졌다니 너무 뜻밖"이라고 말했다.

연휴를 맞아 남자친구와 함께 덩 고향마을을 찾은 리스(여)씨도 "충칭에서 하루 만에 다녀갈 수 있는 관광지라 방문했다"면서 "덩이 사망한 날이 오늘이 맞긴 맞냐"며 기자에게 되물었다.

▲ 덩샤오핑이 태어나고 자란 옛집은 그를 추모하려는 사람들보다는 기념사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 모종혁
중국은 더이상 그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작년 9월 9일은 사회주의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서거한지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기자는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成都)시 텐푸(天府)광장에서 흥미로운 행사를 목격했다. 사설 마오쩌둥기념관을 운영 중인 샤오밍싱이 지인들과 더불어 자비를 털어 시민들에게 마오 배지를 증정하는 행사를 연 것.

샤오는 "마오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자본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중국 인민을 해방시킨 위대한 인물"이라며 "마오에게 과오가 있긴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부강한 신중국은 결코 건설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작년 9월 9일 마오쩌둥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마오 배지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샤오밍싱.(왼쪽에 등을 돌리고 선 이)
ⓒ 모종혁
샤오는 마오가 그립다고 했다. 이에 비해 덩을 존경한다고 해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었다. 마오가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신중국을 건국한 '국부'라면,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중국 인민들에게 부와 발전의 기반을 닦아준 '작은 거인'이다. 그러나 덩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은 너무나 조용하다.

19일 밤 중국 국영 CCTV 국내뉴스에서 덩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후진타오 주석의 간쑤(甘肅)성 공업시설 및 농촌마을 방문소식을 되풀이해 전해줄 뿐이었다.

덩은 선부론을 기치로 오늘날 중국을 부강케 했다. 그러나 지역 격차, 도농 격차, 빈부 격차의 치유할 수 없는 양극화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후의 조화사회론에 덩의 그림자는 부담이 되는 것일까. 덩의 고향에서 맞은 그의 서거 10주기는 너무나 초라했다.

▲ 덩샤오핑 고향마을 곳곳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방문을 기념하여 남긴 기념석과 기념수가 즐비하다. 그들은 진정 덩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 모종혁

태그:#덩샤오핑, #르포, #10주년, #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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