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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회 창립행사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80년 전 오늘인 1927년 2월 15일 오후 7시 서울 한복판 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조직과 단체들이 명멸했지만 신간회만큼 당시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계는 물론 국민들에게 여전히 관심과 주목을 받고 회자되는 항일독립운동단체도 드물다.

그것은 해외에까지 지회를 조직하여 회원수가 최대 3만9000명을 넘는 국내 최대의 조직이었다는 점과 함께, 일제 강점 이후 '민족해방'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졌음에도 지역과 인맥 특히, 이념 차이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좌와 우로 나눠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의 강령과 규약 아래 결성된 조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신간회의 태동부터 잠시 살펴보면 1919년 3·1운동 이후 민중의 폭발적인 저항에 놀란 일제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겉으로는 '문화통치'라는 유화정책을 구사하면서도 뒤에서는 친일파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이광수를 비롯해 최남선 최린 송진우 김성수 등이 이른바 '자치론'을 들고 나오자 민족주의 운동 계열의 홍명희 안재홍 신채호 등이 이에 반발하면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 노선을 견지하고, 여기에 민중들과 결합해 폭넓은 기반을 형성한 권동진 허헌 한위건 등의 사회주의 운동 계열이 결합해 탄생한 것이 바로 신간회다.

당초 신한회(新韓會)로 하려던 명칭은 일제의 간섭으로 신간출고목(新幹出枯木) 즉 '마른 나무에서 새로운 줄기가 싹 튼다'는 뜻의 신간회로 정해지고 3대 강령으로 ①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며 ②단결을 견고히 하고 ③기회주의를 일체 부인 하였다. 세 번째 강령은 말할 것도 없이 자치론자들에 대한 배제를 뜻한다.

혁명-대동-항쟁 정신의 밑바탕은 신간회의 통합정신

▲ <조선일보>, (사)방일영문화재단, (사)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15일 프레스센타 19층에서 열린 신간회기념사업회 창립총회 및 학술대회.
ⓒ 오마이뉴스 조호진
월남 이상재 선생을 초대 회장으로 출범한 신간회는 우리 민중들이 싸워서 얻어 낸 합법공간에서 많은 정치·사회적 실험을 벌여 나간다. 그동안 상층 명망가 중심의 운동을 극복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조직'을 주창하면서 전국과 해외의 지회를 120여 개나 건설하는 놀라는 성과를 보여준다.

또한 신간회는 정치경제 예속을 탈피하는 민족적 권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민주적 권리, 청소년과 여성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인권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제와 그에 타협하려는 세력에 대해 적지 않은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실제로 신간회 창립으로 기층 민중들의 요구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926년 119개이던 농민단체의 결사가 1927년에 160개, 1928년에는 307개로 늘어나고 신간회가 해소된 1931년에는 무려 1759개에 이른다. 또한 소작쟁의 발생 건수 역시 1926년에 198건이던 것이 1927년에는 275건으로 늘어나고, 1931년에는 무려 1590건의 크고 작은 쟁의가 발생한다. 이는 마치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기점으로 노동자는 물론 농민 빈민 교원 등 억눌렸던 민중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던 양상과 비슷하다.

비록 일제의 집요한 방해와 신간회 구성원 중 일부의 변절과 타협으로 신간회 내부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해 4년 만에 자진 해소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신간회는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영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첫째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의를 위해 기꺼이 하나가 되어 결합한 통합성. 둘째 국권 상실 후 끊임없는 항일투쟁으로 쟁취한 합법공간을 최대한 이용해 중간 계층을 아우르려 한 유연성. 셋째 상층 명망가 중심의 운동이 아닌 기층 민중들과 함께 하려한 대중성.

이는 2007년 오늘 날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없는 가르침이 아닐 수 없으며 해방 이후 4·19의 혁명정신, 80년 광주의 대동정신 그리고 87년 6월의 항쟁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총독부 대변지로 변신한 방응모의 <조선>

▲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러한 신간회의 정신을 기리자는 80주년 기념행사가 양쪽으로 나눠져 열리고 있다. 특히 <조선일보>의 경우 지면으로 통해 신간회에 대한 기사를 여러 차례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물론 80주년 행사 자체도 거의 주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일보사와 방일영문화재단이 이 행사의 주최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언론사들이 기념행사의 후원 정도에 그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적극적인 모습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신간회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당시 자치론은 김성수 등 <동아일보> 쪽에서 주로 주장한 반면,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일보> 사장을 번갈아 맡았던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등은 신간회의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신간회의 활동을 민중들에게 알려나가는 데 신문을 최대한 활용했다.

때문에 이 당시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대변지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사장을 맡았던 <조선일보>는 이 시기에 정간 2차례, 발행인 구속 2차례 등을 겪으면서 경영이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1933년에는 광산으로 돈을 번 방응모에게 <조선일보>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만다.

방응모가 새로 사장을 맡은 <조선일보>는 이전의 조선일보가 아니었다. 방응모가 들어서면서 신간회의 대변지였던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대변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반민족 역사를 지닌 현재의 <조선일보>는 신간회 창립 기념행사에 대대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희석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내보낸 초청장에는 "신간회운동의 정신은 다원성과 화해협력의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에도 일정한 정신적 좌표를 제공하는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말이 <조선일보>의 입에서 나오다니 어딘지 어색하다.

<조선일보>는 최장집 이장희 강정구 교수에 대해 빨갱이 마녀사냥을 자행한 적이 있고, 최근에도 지방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통일교육을 하던 선생님을 친북좌파 혐의로 또 한번 마녀사냥을 했을 뿐 아니라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 아닌가.

신간회 80주년을 맞아 학술토론을 통해 그 정신을 이어받고 계승·발전시키자는 취지에 반대할 뜻은 없으나 입으로는 통합을 외치면서도 아직까지 냉전 시절의 눈으로 사회 통합과 민족의 평화통일을 지연시키는 세력은 신간회의 정신을 말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신간회의 창립 강령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통합을 위해서는 그동안 일제와 독재에 부역했던 기회주의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정치권과 시민사회 그리고 재야 민중진영의 최대의 화두는 통합인 것 같다. 여당과 여당에서 탈당한 의원들 모두 통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시민사회와 재야 민중진영 역시 '창조한국 미래구상'과 '한국진보연대'라는 이름으로 각각 통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통합의 움직임들이 각각 어떤 모습으로 수렴될지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각각의 진영들이 80년 전 선배들이 앞서 걸어 간 길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계승할 것과 반성할 것을 따져 보았으면 한다. 신간회가 남기고 간 적지 않은 여백은 바로 우리 시대가 채워야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방학진 기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태그:#조선일보, #민족문제, #신간회, #냉정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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