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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차가 배티재에 올라서자 울퉁불퉁 근육질로 뭉친 기암괴석들이 나타났다. 구름이 비껴선 푸른 하늘 속으로 솟구친 바위들의 위용이 너무나 장엄해서 하마터면 난 숨이 멎을 뻔했다. 기암괴석들은 여전했다. 기기묘묘한 대둔산 정상의 바위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5년 전 가을이었던가.

단풍이 현란하게 불타던 대둔산(전부 완주, 878m)을 오른 지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몇 해를 건너 띄어 살을 깎을 듯한 한겨울 추위를 몰고 왔다. 마침 주말이었지만 (23일)대둔산을 오르는 길목이라 그런지 추위는 더 살을 파고들었다.

아내와 나는 등산복에 딸린 두툼한 모자를 눌러쓰고 장갑까지 낀 채 단단하게 무장을 했다. 살을 깎는 추위가 몰아쳐도 등산객들의 행렬은 울긋불긋 물결을 이뤘다. 하나같이 건강을 챙기고 대둔산 정상에 올라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 앞에 소원을 빌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입구에 들어서자 매표소가 등산객들을 가로막았다.

전에 받지 않는 입장료를 언제부터 받았는지 자동기계로 입장료를 척척 찍어내는 매표소 직원의 손길이 분주하기만 하다. 세상을 살다보니 돈을 받아 챙기는 솜씨도 제법이다. 산에 주인이 따로 있던가.

누구나 먼저 산에 들면 주인이 되는 것을 자신들이 주인이라고 손을 내미는 얼굴이 낯 뜨겁다. 돈을 갖다 바치면서 대둔산을 올라야 하는 심사가 뒤틀려 아내는 연신 투덜거렸다. 그러나 아내의 투정은 케이블카를 타고 난 후 멈췄다.

▲ 마천대에서 바라본 연봉들
ⓒ 유스테판
▲ 케이블 카아 전망대 바로 앞의 바위들
ⓒ 유스테판
애초에 그냥 걸어서 정상인 마천대까지 오르려고 했지만 연약한 여자 힘으로는 무리일 것 같아 등산길엔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길엔 다릿심을 이용하기로 했다. 대붕처럼 날아오르는 케이블 카, 어린애처럼 마음이 설레는데 실내의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연신 이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능선과 계곡이 한 눈에 펼쳐졌다.

희끗희끗 남아있는 잔설과 가랑잎을 홀랑 벗고 떨고 있는 잡목들의 행렬을 보자니 보통 을씨년스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눈 속을 가득 채우는 기암괴석의 절경에 우울한 기분도 사라져 버렸다.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가을에 찾았으면 현란한 단풍에 덮인 바위가 더 절경을 이룰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스치는 순간, 케이블카는 전망대에 사람들을 우르르 쏟아놓았다. 눈앞을 압도하는 바위에 넋을 잃었다. 어떻게 저리 절묘하게 바위들을 빚어놓을 수 있을까.

떡살처럼 층이 진 바위들은 갖가지 모양을 연출하고 있었다.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먹구름에 휩싸이고 폭풍우에 시달리면서도 한결 같이 손을 잡아 몇 천 년 동안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바위들이 놀라웠다.

철제 계단 밑에는 온통 산죽 밭이었다. 푸른 댓잎들이 철제계단을 밟는 발걸음 소리에 놀라 사각사각 소리를 내었다. 모두들 조심하라며 당부하는 말소리처럼 들렸다. 아 그런데 저 영롱한 소리는 목탁소리 아니던가. 웬 스님 하나가 시주통을 앞에 놓고 염불을 하며 경쾌하게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다. 병풍 같은 바위를 부딪치며 흘러나오는 소리라 더 청아했다. 암벽이 들러 쳐진 가파른 곳까지 올라와 염불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심 궁금증이 일었다.

▲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한 금강 구름다리
ⓒ 유스테판
▲ 목탁을 치며 염불하는 스님
ⓒ 유스테판
그러나 곧 눈앞을 턱 막아선 구름다리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연결한 높이 81m, 길이 50m의 철제 다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간이 움찔했다. 잘못하다 이 철제다리가 붕괴라도 된다면 하는 망상이 스쳐가자 등골이 오싹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아내가 어지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아내는 잘도 따라왔다. 힘이 부쳐 중간에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따라온 것 만해도 대견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가족까리 산행을 하면 입구에서부터 주저앉던 아내였다. 그런데도 오늘은 전과는 달리 젖 먹던 힘까지 쏟아가며 나를 따라온 것은 평소 아내가 건강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확 트인 앞을 바라보았더니 개미떼처럼 철제계단에 달라붙어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흡사 천국문을 향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처럼 장엄했다. 여기서 아내와 난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최정상인 마천대까지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던 아내가 오뉴월 바람처럼 변덕을 부리더니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마천대까지 올라가 보자고 했다.

대둔산에 왔으면 그래도 정상까지는 올라가야 스릴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또 입구에서 덥석 내 주었던 입장료가 아까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산죽이 깔린 철제 계단을 밟고 약수정 휴게소를 지나 조금 올라가자 이번에도 목탁을 치는 스님이 보였다. 염불과 함께 어우러진 목탁소리는 혹한의 겨울 추위를 뚫고 대둔산의 능선과 계곡으로 일제히 퍼져 내려갔다.

산에서 듣는 목탁소리는 어찌나 청아한지 삼천대계를 깨우고 고통 받는 영혼들을 충분히 위로해 주고도 남을 만 했다. 바로 옆의 거대한 바위가 왕관바위라 했던가. 철제계단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없었다. 급하게 경사진 철제 계단은 뒤로 기울 듯 아슬아슬하다. 사람하나 빠져나갈만한 폭 사이로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몸 하나 꼼짝할 수 없다.

위를 쳐다보았더니 내 얼굴에 닿는 아가씨의 넙적한 엉덩이, 민망해 얼굴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까마득한 절벽이다. 오금이 저렸다. 잘못하다 떨어지면 뼈다귀 하나 찾을 수 있을까. 위엔 아가씨의 엉덩이, 아래엔 까마득한 절벽, 오줌 저린 강아지처럼 낑낑대고 있자니 목탁소리가 사정없이 내 귓전을 때리고 지나갔다.

▲ 삼선바위와 연결된 철제계단을 밟으며 오르는 사람들
ⓒ 유스테판
▲ 금강굴을 통해 하산하는 사람들
ⓒ 유스테판
곰곰 생각해 보니 위험한 길목마다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는 것이 다 이유가 있을 성 싶었다. 계단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의 무사를 비는 것과 아니면 혹시라도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경사가 얼마나 가파르고 힘들게 올라왔던지 땀이 밴 옷 속이 촉촉하다. 썼던 모자도 벗어버렸다. 여기가 대둔산의 최정상 마천대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해서 원효대사가 이름을 붙였다는 마천대에 올라서니 천하가 다 내 것이다. 막힘없이 내 시야로 들어오는 능선과 계곡들, 파도를 치며 뿌연 안개 속으로 막막히 사라지는 연봉들 사이로 서대산, 덕유산, 운장산, 모악산의 모습도 보였다.

볕이 무르익고 꽃들이 왕창방창 늘어진 봄이라면, 햇볕이 알맞게 숙성된 가을이라면 이 마천대에서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으련만, 시간을 보니 4시. 빨리 내려가자며 닦달 하는 아내의 말을 새겨들으며 내려가는 하산길도 험하긴 마찬가지다.

움푹 들어간 계곡은 전체가 울퉁불퉁한 바위와 돌투성이다. 그러나 하산길은 내려오기가 한결 수월하다. 아내와 내가 타고 울렁거리며 건너갔던 금강 구름다리 아래를 지났다. 시야가 확 트였다. 푸른 산맥들이 겹쳐 사라지는 연봉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 동심바위, 옆으로 무너진 바위들
ⓒ 유스테판
한참을 내려와 팻말을 보고서 이 계곡 이름이 금강굴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동행 하던 아내 뒤에 한참 쳐진 것은 쫄쫄거리며 물이 흐르는 바위틈의 고드름에 반해서였다. 바위에 눌러 붙은 푸릇푸릇한 이끼들, 그 사이에서 갖가지 형상으로 빚어진 고드름들, 요리저리 구도를 재봤더니 영락없는 예술이다.

카메라로 사진 작품을 만들고 있으려니 저 아래서 아내의 부르는 소리가 계곡을 따라 올라왔다. 아내는 잘도 내려갔다. 바위와 돌을 밞고 내려가는 폼이 촐랑거리는 다람쥐 같다. 몇 해 전만 해도 몸을 사리던 아내, 이제부턴 주말이면 산을 타기로 결심을 했다.

동심 바위 옆에서 아내가 돌탑을 쌓았다. 돌탑을 쌓으면서 아내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보나마나 가족과 자신의 건강을 빌었겠지. 위를 올려다보니 대둔산의 기암괴석들이 넘어질 듯 위태롭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을 전망대까지 실어다 주었던 케이블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케이블카 속에서 걸레질을 하는 아낙의 모습을 보니 이제 운행 시간이 끝난 모양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걸어서 하산한 시간까지 합치면 무려 3시간을 대둔산의 위용을 마음 속에 집어넣고 돌아다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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