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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이 그린 황진이 그림
ⓒ 유정열
어제(21일) 오후의 일이다. 학생들과 계발활동을 끝내고 집에 왔는데, 딸이 안방에서 나와 인사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하나 들여다봤더니 요즈음 방송하고 있는 ‘황진이’ 재방송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재미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중학교 2학년인 딸이 ‘황진이’에 푹 빠졌다. 그냥 한두 번만 보는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볼 계획을 갖고 있으니 아마도 마지막 회까지 볼 것이리라.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보고 있는 딸을 보며 나의 옛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게 중학교 때인지 아니면 고등학교 때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황진이를 짝사랑했던 한 총각이 상사병으로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데 황진이 집 앞에서 멈춰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그를 위해 제문을 짓고 저고리를 벗어 상여위에 올려놓았더니 그때서야 상여가 다시 움직였다.

지족선사와 서경덕과의 사연도 무척 흥미로웠다. 살아있는 부처라는 칭호를 받은 지족선사를 파계하게 만든 그녀, 당대의 최고 석학인 서경덕의 인품에 반해 자신과 서경덕, 그리고 박연폭포를 가리켜 ‘송도3절’이라고 일컫던 그녀의 이야기는 나의 혼을 완전히 빼앗아 가버렸다.

위 이야기는 내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난 다음에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게 됐다. 게다가 황진이의 주옥과 같은 한시나 시조가 몇 편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성이 조선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매년 몇 번이나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황진이 이야기였는데, 딸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것까지 아빠를 닮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이었다. 아내가 시골에 잔치가 있어서 늦게 오는 바람에 아내 혼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우연히 딸 방에 들어가 책상 위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 요즈음 딸의 마음을 빼앗은 황진이의 그림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 그렸던지 내 눈이 그 그림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내에게 보여줬다. 아들에게도 보여줬다. 고등학생인 아들은 “수정이 그림 솜씨가 늘었네.” 하며 제법 평가까지 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딸을 보며 대단히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평소에 자유롭게 그림 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황진이를 멋있게 잘 그릴 줄은 몰랐다.

부모와 오빠의 극찬에 딸은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했다. 딸은 말 그대로 황진이에 빠진 것이다. 나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그림이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그녀에 대해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했으면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코팅까지 해놓았을까? 나는 넋을 잃고 한참동안 그 그림을 바라봤다.

몇 달 전의 일이다. 텔레비전 시청을 좋아하는 딸이 7세 이상이 보는 ‘점프’라는 프로를 보고 있기에 유치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재미있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컴퓨터를 켜고 평소에 좋아하는 가수 이선희의 노래 ‘알고 싶어요’를 들었다.

의자에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 그 노래를 듣고 있는데, 딸이 자기 방에서 나오며 “그 노래, 아까 텔레비전에서 들었어요. ‘점프’ 프로에 나왔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뜨고 딸을 보며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그 프로에 요즈음 황진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녀와 ‘소세양’이란 사람이 만나 사랑을 나눌 때에 그 노래가 배경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딸의 말을 들으니 그 노래가 황진이와 무엇인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래 듣는 것을 잠시 멈추고 컴퓨터 여기저기에 들어가 보았다.

아, 놀라웠다. 굉장한 발견이었다.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는 바로 황진이의 한시가 바탕이었다. 한 남성에게 향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잘 나타낸 한시인데, 바로 그것이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조금 수정을 한 후 현대가요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딸에게 얼마나 많이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 모른다. 그 노래에 그런 역사적인 배경,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황진이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황진이의 한시를 감상하고 난 뒤에 그 노래를 들으니 느낌이 훨씬 더 정겹게 내 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한번은 딸에게 왜 황진이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딸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당당해요. 다른 기생들과는 다르게 퍽 당당하게 보였어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뭐가 당당하게 보였는지 말해보라고 했더니 그것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딸은 황진이를 한 시간 정도 그렸다고 한다. 구름, 붓과 벼루, 거문고, 대나무, 북, 춤 출 때 소매에 끼는 것, 삿갓을 쓰고 노리개를 차고 멋진 옷을 입은 그녀, 그리고 ‘황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 딸이 그린 그 그림이 그녀를 무지무지 좋아했던 나의 마음을 다시 빼앗아 갔다.

딸이 지금 보고 있는 ‘황진이’ 프로가 좋은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딸을 믿고 싶다. 열심히 잘 보면서 그녀의 참된 면을 스스로 발견했으면 좋겠다. 어떻게 사랑을 하고 어떤 계기로 좋은 작품을 짓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자신이 말한 것처럼 딸이 그녀의 ‘당당함’을 기억하며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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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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