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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 특집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
ⓒ 실천문학사
<실천문학>의 2006년 가을호 특집은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도가 매섭게 밀어닥치고 있는 요즘, 이번 특집의 문제제기는 시의적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언어의 윤리적 완성도에는 허점이 있었다. 이른바 '약소자론'을 표방하는 글이라면, 거기에 쓰이는 언어에서도 타자지향적 원칙에 충실해야만 한다.

말만 번지르르한 해법과 전망을 늘어놓는 것보다, 논자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강자ㆍ주류의 언어가 비판 없이 글로 옮겨지는 것을 경계하는 글쓰기 과정이야말로 '약소자론'인 것이다.

<실천문학>의 이번 특집에 이러한 윤리적 철저함이 부족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단어가 있다. '코시안(Kosian)'이 그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여성, 혹은 농촌 총각과 아시아계 여성 사이에서 생긴 '코시안(Kosian)' 등 세계화의 영향으로 외국인과 혼인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편견과 따돌림, 문화적 차이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 김재영, '동해로 간 사이트 칸' 중에서

"아시안(Asian)과 코리언(Korean)사이에서 출생한 이른바 코시안이 바로 그들이다. ……(중략)…… 그 가운데 '코시안'이라 불리는 새로운 혼혈인이 등장하였다. - 허정, '코시안과 한국문학' 중에서


약소자(弱小者)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나선 잡지에서 비판 없이 '코시안(Kosi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현상에 대해, 실제로 '코시안'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동남아 출신 결혼 이주민 등이 주축 회원인 '한국 베트남 가족모임'(이하 '한벳')에서는 "자신과 다른 다름을 차별화하는 치졸한 신조어의 사용을 무조건 거부"한다고 강력히 항의하고 있다. '한벳'은 인터넷 다음 카페를 통해 100만인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이들은 서명 양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국제결혼가정의 2세들에 대해 인종차별적 행위와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기 위해 10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한다! '코시안', '온누리안'이란 올가미로 우리의 사랑스런 2세들을 옭아매고 있다! 자신과 다른 다름을 차별화하는 치졸한 신조어의 사용을 무조건 거부한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취득한 우리 2세들에게 별칭이 부여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 한국 베트남 가족 모임(www.cafe.daum.net/hvfamily)에 게재된 서명 양식 중에서

'한벳'이 '코시안'과 함께 반대하는 '온누리안'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것은 전북교육청이었다. 이곳에서 '온누리안'이라는 신조어를 마련하고자 했던 취지 중 하나가 '코시안'의 대체어를 찾는 것이었다.

설동훈 교수를 비롯한 사회학자들과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죠센진이 편견을 담은 용어가 된 것처럼 '코시안'도 이미 그렇게 쓰이고 있다"는 주장이 한창 제기되던 시점이었다.

결국 올 3월 현상공모를 통해 '온 세상'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 '온누리'와 사람을 뜻하는 어미 '-ian'을 합친 '온누리안'이 선정됐다. 정부와 여당에서도 올해 안에 혼혈인 용어 개정을 비롯한 각종 외국인 정책 개선책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도의 영역 안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구별 짓는 용어'가 필요한 것이다.

'코시안'은 '국내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일 뿐

원래 '코시안(Kosian)'은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사용된 용어였다. 처음 이 말이 사용될 때만 해도 '국내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의 자녀'를 가리키는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점점 '튀기'의 유의어로 의미가 바뀌었다.

코시안이 'Korean+Asian'의 합성어임에도 사회적으로 '코시안'이라고 호명(呼名)되는 이들은 구체적이다. 일본이나 중국계보다는 필리핀, 베트남, 스리랑카 출신의 배우자 사이에서 낳은 자녀가 으레 지칭되게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이 용어를 대체하는 '온누리안' 역시 그 지칭의 범위와 기준이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뤄지는 모든 '구별 짓기'는 결국 돈의 힘에 휘둘리고 있다. '온누리안'의 경우도 그렇게 불려야 하는 이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당하는 수모인 것이다.

베트남 여성과 재벌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코시안'이나 '온누리안'이라고 함부로 부를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권력층이 흑인과 결혼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면? 애당초 동남아시아가 한국만큼 경제적으로 발전했더라면 살벌한 순혈주의의 전통이 지배하는 한국으로 억지로 결혼 올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결국 누군가를 이치에 맞게 구별 짓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타자와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 자기 자신의 편협함을 냉철히 진단하는 것이 먼저다. <실천문학>의 이번 특집의 출발점도 이 지점에서 마련됐어야 했다.

'튀기'가 '코시안'이 되고, 다시 '온누리안'으로 명칭이 갱신(更新)되는 동안 정작 사회에서 그렇게 호명 당하는 이들의 의사는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자신이 선택한 이는 없었다. 이들 용어의 변천사는 우리 사회의 의식수준의 발전을 반영하는 결과물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괄시하는 고약한 내면을 은폐하는 기술일 뿐이다.

그런데 허정의 '코시안과 한국문학'에서는 '코시안'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글에서 '코시안'은 새로운 혼혈인을 지칭하는 아이콘(icon)처럼 쓰일 뿐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코시안'이라는 말이 지식인 사회에선 이미 개념화된 말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무신경한 자연스러움이야말로 '한벳'이 격렬히 반대하고 있는 사회적 언어폭력의 일면이다. 시대의 창이 되길 자처하는 <실천문학>에서 '코시안'이라는 용어가 준비 과정의 논의를 통해 걸러지지 못했다는 것은 또 다른 허점의 노출이다.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 창에 '코시안'이라고만 쳐봤어도 이 용어에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성의부족인 셈이다.

옴진리교에서 라깡, 레비나스, 지젝, 가라타니 고진, 만하임, 르페르브를 인용하며 현학적으로 약소자론을 펼치는 김영민의 "연대의 사잇길 : '보편-개체'의 계선을 넘어"는 정작 구체적으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모호하기 그지없는 글이었다.

약소자에 대해 문제 제기하겠다고 나선 <실천문학>이...

이번 특집이 윤리적 완성도의 부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책 너머의 것을 응시하지 못한 미련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주노동자, 혼혈, 환경, 장애, 디아스포라, 북한 문제를 포괄하는 이번 특집에서 '코시안'이라는 단어는 손꼽을 만큼밖에 쓰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 글이 지나치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단어 하나에도 최선을 다해 사려 깊지 못한 글은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게다가 이런 글은 타자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호명(呼名)을 또 다른 매체로 매개할 우려마저 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번 특집이 적대(敵對)하고자 했던 대상이 논자 자신의 손모가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천문학>은 이번 특집을 내놓는 소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 앞으로 <실천문학>이 제기하는 '약소자론'이 완고한 현실에 균열을 가할 수 있는 희망의 발견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 '책머리에'

<실천문학>은 이런 소감보다는 좀 더 투철한 윤리적 원칙부터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결국 언어에 대한 고민이 될 것이다. 이 시대 문예지의 역할도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온통 오염된 언어의 세상이다. '사회주의'는 그 말이 처음 등장했던 시절의 참신함과 설렘을 잃고 편협한 선입관과 잔인한 오해로 오염되었다. '사랑', '평등', '자유' 같은 말조차 속물근성에 오염되어 버렸다.

때문에 글로 적기 전의 '마음의 상태'를 새로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만 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이러한 노력은 유효하다.

그래서인지 '코시안과 한국문학'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이 글을 쓴 논자 자신과 <실천문학>을 향한 격언처럼 읽힌다.

"타자와의 만남은 어렵다. 그것은 소재나 주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 허정, '코시안과 한국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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