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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끈>이라는 철조망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이 있다.

철조망을 맨 먼저 설치한 건 농부들이 짐승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은 인간이 키우는 가축을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의 분쟁 지역에 설치된 철조망은 적국을 향한 것이고,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 한반도의 38선도 철조망으로 남북을 갈라놓았다. 그러고 보면 철조망은 격리의 의미가 강하다.

남북이 아닌 이 한반도 남쪽에서 국가로부터 철저하게 격리 당한 배반의 땅, 대추리와 도두리. 정부는 국가 정책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제 나라 농부들 땅을 빼앗아 미군기지에 갖다 바치려고 별별 짓을 다 벌였다.

또 하나의 격리, 대추리·도두리의 철조망

▲ 미군기지 확장 계획에도 불구하고 대추리에서 천연덕스럽게 피어난 참외꽃
ⓒ 김정희
5월 4일 대추분교 파괴 이후, 황새울 들판은 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쳐졌고, 벼이삭이 자라야 할 들녘에는 철조망이 칼날꽃을 피우면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논길을 따라서 밭길을 따라서 칼날철조망은 억새풀보다 더 질기고 강하게 쭉쭉 뻗어나가고, 군인과 전경들이 들판을 군사보호시설구역이라고 보초를 서고 있으며 사람들을 막기 위한 검문검색이 철저하다.

배반당한 땅 대추리, 도두리. 칼날철조망으로 칭칭 휘감아 놓은 대추리, 도두리. 이 속에도 생명은 자라고, 사람들은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새들은 지저귄다.

농부들은 군인들이 들판을 파헤쳐서 모아 놓은 흙더미에 씨를 뿌렸다. 그렇게 자라난 푸릇푸릇한 잎사귀 사이로 콩이 주렁주렁 달렸고, 들판의 벼이삭은 누런 빛을 띠면서 여물어 간다. 또 담벼락 거름더미에 심어 놓은 호박은 넝쿨을 따라 누렇게 늙은 호박으로 익어 가고, 온갖 곤충들이 뛰어다닌다.

며칠 전에는 떨어지는 빗방울에 더운 기운이 싹 가시고,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때마침 집 앞에 호박 넝쿨을 뒤지면서 애호박을 따는데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더운 기운이 싹 가신다.

나는 처마 밑으로 뛰어가서 들판을 바라보았다. 마을과 철조망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가지가 휘늘어진 버드나무로 참새 떼가 와르르 날아갔다. 얼마나 바빴을까. 새들의 다급한 날갯짓 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졌다.

그 와중에 몸집이 조금 큰 새 두 마리가 함께 버드나무로 날아갔다. 이내 소나기가 퍼붓고, 큰 새 두 마리는 참새 떼를 피해 다시 빗속을 뚫고 뿌옇게 흐려진 허공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참 한갓진 농촌 풍경이었다. 무씨, 배추씨를 뿌리고 가뭄 때문에 싹이 나오지 않자 애를 태우는 주민들. 내게 "자꾸 밭 보지 말어. 씨가 무서워서 못 나오잖어"라며 농을 던지던 할머니가 우산을 받쳐들고 나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밭을 보았다.

노란 호박꽃 위로 꿀을 따러 다니던 벌과 흰나비들과 풀 위를 뜀뛰기 하며 돌아다니던 메뚜기는 어디로 몸을 피했을까.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면서 들판은 모처럼 생명의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저녁에 마을 버스를 타고 대추리 촛불 행사를 다녀오는 길에 어두운 골목 어귀에서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이 모여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아산만이 수몰되면서 사람들이 이 갯벌로 하나둘 씩 모여들어 천막을 치고 가래, 지게, 삽으로 갯벌을 메워 일궜다며 그땐 맑은 물도 없어 구덩이를 파고 빗물을 받아 백반을 넣어 식수로 사용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농지정리 하기 전이라 저 들판을 막아서 겨울에 물을 받아 놓고 봄에 농사를 지었당께. 차암, 우리가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고생 고생혀서 땅을 일구어 놓으니께 인저 와서 돈 줄 테니께 나가라고 허니께 분통이 터지는 거지. 안 그려?"

대추리·도두리 길목 막을 수는 있겠지만...

▲ 벼가 자라던 논에 군부대가 무시무시한 칼날철조망을 설치했다.
ⓒ 김정희
이야기 틈에 끼어 듣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작년 가을에 대추리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익히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노인분들이 고생한 사연, 힘들고 모진 세월에 대한 기억은 날이 갈수록 더 절박한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목숨 같은 땅을 미군기지확장으로 강제로 빼앗겨야 하는 처지에 그 분함과 억울함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지금 대추리, 도두리로 들어오는 길은 칼날 철조망으로 겹겹이 막아 놓고서 들판에는 군인들이, 길목마다 경찰들이 막고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가로막고 있다. 아무리 칼날 철조망과 제복으로 막는다고 해도 이 땅에서 쫓겨나야 하는 농부들의 마음까지, 기막힌 사연까지 그리고 국가의 폭력 노출까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도두리에 머물면서 해내고 싶은 일은 바로 칼날 철조망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고, 뭇 생명들이 살고 있으며 결코 여기가 죽음의 땅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추리, 도두리에 한 번이라도 더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김정희 기자는 동화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역사에 관심이 많아 일제 시대를 다룬 <국화>, 해방 공간기를 배경으로 민족이 분열되고 내란을 겪은 아픔을 그린 <야시골 미륵이>, 한국전쟁 때 일어난 미군학살사건을 다룬 <노근리>, <그 해 여름>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지금은 도두리에서 살고 있으며, 또 하나의 아픈 역사인 황새울 들판에 사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배경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가옥 강제철거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대추리 도두리에는 애타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온 생애를 들녘에 바쳐 온 늙은 농부들의 삶이 이대로 파괴된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 것입니다.

아직 '양심의 명령'을 지킬 시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오는 9월 24일에는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을,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로 만들지 않기 위한' 4차 평화대행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황새울의 평화를 위해 힘과 뜻을 모아주십시오.

여러분을 9.24 평화대행진 ‘10만 준비위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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