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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비롯한 미디어들의 목적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 두뇌까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입니다(미디어(media)는 '전달매체'라는 영어단어임을 상기하시길). 간단한 서술이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의 감각은 매우 섬세하여 만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고, 설사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진 정보라고 할지라도 쉽게 인간의 두뇌에 남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디어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정보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해 왔습니다.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아이디어, 예를 들면 1950년대 미국에서 시도되었던 '장면에 맞는 향기를 배출하는' 극장이라던가, 놀이동산에서 볼 수 있는 입체화면 영화 등이 생겨났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역시 뭐니뭐니 해도 미디어가 전달하는 것을 가능한 한 원본에 가깝게 재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잡음투성이의 원통판에서 시작되었던 레코드는 납작한 비닐 레코드를 거쳐 CD로 발전해 오면서 비약적인 음질의 향상을 이루었습니다. VTR로 시작된 화상저장매체 역시 DVD를 거쳐 최근에는 고화질 DVD로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라디오 역시 AM에서 FM으로, 최근에는 위성라디오로 점점 더 음질을 향상시켜 오고 있지요.

이들 미디어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역시 TV 방송입니다. 최초 자그마한 흑백 화면으로 시작되었던 방송은 컬러 방송, 대화면 방송을 거쳐 최근에는 고화질(HD) 디지털 방송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게도 지난 6월 5일부터 방송국들은 이러한 당연한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미 아주 훌륭한 화질로 방송되고 있던 자신들의 방송을 저화질 방송으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태도는 그러나 그 이면의 이유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행태입니다. 문제는 그 이유라는 것이 우리 시청자가 아닌 방송국의 이익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사실관계를 설명해 드리면, 기존의 디지털 고화질 방송은 가로화면 1080 주사선의 화질로 방송되어 왔습니다. 한 화면에서 가로화면에 점을 1080개 찍을 수 있는 해상도로 방송된 것이지요. 그런데 6월 5일부터 방송국들은 이 화질을 720주사선 화질로 낮추어 방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방송국이 1초간의 화면을 만들기 위해 송출해야 하는 정보의 양은 약 18메가에서 13메가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남는 초당 5메가 가량의 전송량을 이용해서 또 하나의 채널을 만들어 멀티미디어 방송, 즉 음악이나 추가 채널 등 다양한 정보방송을 내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전자신문>은 "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KBS 등 지상파 4사는 방송위원회의 정책 결정에 따라 5일부터 한 달간 기존 디지털TV 채널(6㎒)에서 HD채널 1개, 표준화질(SD)채널 1개 등 라디오·데이터방송을 포함해 3∼6개 채널씩을 방송하는 MMS 시험 서비스에 나선다"며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디지털 지상파방송의 여러 채널을 갖는 '지상파 다채널'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고 지난 5일자로 보도했습니다.

이렇게 사실관계를 설명하면 이해가 쉬워질 것입니다. 화질은 떨어지게 되지만 방송국은 채널 하나씩을 더 확보하게 됩니다. 거꾸로 말해 시청자인 우리는 별로 필요도 없는 음악방송, 자막정보가 나오는 방송 하나를 더 보는 대가로 더 나쁜 화질의 방송을 봐야 하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전송 받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체 용량이 적은 동영상일수록 화질은 떨어집니다. 또 실시간으로 인터넷 동영상을 볼 경우에 전송망의 속도가 떨어지면 끊김이 심해지지요.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1초당 18메가비트의 인터넷 속도를 가진 전송망과 1초당 13메가비트의 인터넷 속도의 전송망 중 어느 것이 실시간 전송화질이 더 좋을지는 묻지 않아도 명백합니다.

여기에 비교화면을 첨부합니다. SBS의 뉴스화면입니다. 사진 밑의 설명을 보시지 않더라도 어느 것이 기존의 고화질 방송이고, 어느 것이 이번 주부터 방송되고 있는 낮은 전송율의 고화질 방송인가를 구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지난주까지 방송되던 고화질 화면(왼쪽)과 이번주부터 방송되는 고화질 화면.
ⓒ SBS
그렇다면 방송국들이 이렇게 흐름, 그리고 상식을 역행하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채널이 여러 개 생기는 것은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화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당장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기사에서 짚었듯이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방송국들은 지금의 고화질보다 훨씬 떨어지는 중간화질(480p)의 디지털 방송으로의 전환을 꾸준히 주장해 왔습니다. 이때 방송국들이 내세웠던 논리는 수신율의 차이, 이동 수신 가능여부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내심 가졌던 생각은 중간화질로 방송할 경우 3∼4개의 채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제가 올렸던 일련의 디지털TV 관련 기사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당시의 논란은 정보통신부의 조정을 통해 고화질 방송을 계속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하지만, 방송국들은 다채널 방송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이번에 또 한 번 흐름을 돌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송 방식 전환은 시청자보다는 방송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변경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도, 환영받을 수도 없는 시도라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디어는 항상 시청자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더 넓게 보면 소비자들은 항상 자신들의 만족을 최대화하는 상품을 선택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상품들, 즉 질이 떨어지지만 만드는 이의 입장에서 돈을 많이 남기는 상품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아 시장으로부터 퇴출돼 왔습니다.

방송국들이 단기적인 이익에 매달려 결국 소비자인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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