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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식축구 선수 하인스 워드로 부각된 한국의 인종편견 문제를 혼혈인의 관점에서 들여다본 글을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번이 마지막 편. 필자 마이클 허트는 미국 브라운대학에서 미국 역사를 전공했고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인종비교학으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과 배타적 문화적 특성에 대해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94년 이후 2년간 제주도에서 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지금은 한 외국어 고교에서 미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흑인과 한국인 부모를 둔 미국인이다. 그의 블로그 사이트에서 영어원문을 읽을 수 있다. <편집자주>
▲ 흑인 어린아이들을 놀잇감으로 삼은 포스터.
'블로그'란 말이 생기기도 전부터 블로그에 글을 써왔다. 첫 블로그는 흑인과 한국인 부모를 둔 '혼혈' 미국인이 느끼는 인종과 문화에 대한 생각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검은 피부가 섞인 나를 '재미있다'는 듯 대했다. 그런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나 자신은 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위안이라고 할까. 내가 쓴 글 가운데 한 편이 <코리암 저널>(Koream Journal)에 실렸다. 지면에 실리는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조그마한 자부심도 느낀다.

2000년에 있었던 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당시 짧은 글을 어떤 누리집에 연재하고 있었다. 별로 내키지 않던 곳이었지만 글을 보내기로 했다. 내 발언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내용이 되길 바라면서 그 때 쓴 글을 다시 옮긴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글을 읽고 의견을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미끼를 던져 놓고 고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들의 생각을 기다렸다. 큰 도움이 되었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계기였다.

2002년 논문 자료 준비를 위해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글을 많이 썼다. 수많은 느낌과 생각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영감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움이 몰려와 그만 두는 경우가 많았다. 새벽 3시 다이어트 콜라와 라면을 먹어가며 갑자기 떠오른 좋은 생각을 옮기느라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역시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한국이 세계화되지 못하는 이유>를 비롯해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어딘가에 실렸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지만 사실 부족하기만 한 글들이다.

때때로 <한국에 부치는 편지>를 썼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 쓴 이 편지들은 생각과 글쓰기를 예민하게 다듬으며, 한국 사회에 대한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내가 가진 분노를 건강하게 발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상대방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보다 나은 바람직한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소재로 삼아 편지를 썼다.

'여중생 장갑차 사건'으로 인한 한국인들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던 2003년 무렵 나는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여기 제시한 글은 그때 썼던 <한국에 부치는 편지> 가운데 한 편이다.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와 웨더 걸즈(The Weather Girls)의 음악 풍을 섞어 놓은 듯한 한국의 4인조 음악그룹 버블시스터즈가 이상한 차림을 하고 새까만 얼굴로 등장해 자신들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몇 달 전에도 버블시스터즈에 대해 글을 올린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충분한 논의를 펼치지 못했다.

버블시스터즈가 보여준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내가 전부터 우려하던 바가 이런 일로 불거진 것이다. 한국에서 겪었던 고통 중에 가장 괴로웠던 경험을 적은 글이라 조금 거칠기에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함께 문제의식을 나누기 위해 오래된 파일에서 자료를 꺼낸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각은 같으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그대로다. 내 솔직한 심정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반미감정 이해하지만 무차별적인 공격은 곤란

나는 미국 대학원에서 한국학 관련 분야를 연구하다 한국어를 더 배우기 위해 한국에 와서 박사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풀브라이트 파견 교원으로 제주도의 중학교와 여러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현재 3년 넘게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인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서 이제는 반미감정에도 익숙해질 정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한국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내게 욕설을 던진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가게나 식당은 출입을 꺼리게 된다. 미국인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는다.

나는 한국 역사를 잘 알고 또한 미국 부시 정권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만도 알고 있다. 나처럼 젊은 미국인들은 대부분 앨 고어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고 부시로 대변되는 보수정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나 같은 개인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미국 정부를 압박하는 대신 나 같은 개인에게 분풀이를 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에 살면서 한국인들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러시아나 필리핀 사람들은 자국 여성들이 한국 매춘조직의 꼬임에 빠져 한국에서 매춘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러시아와 필리핀 당국은 E6 '관광비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한국 관광비자가 한국의 카바레나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업소에서 값싼 성노동자들을 유입시키는 손쉬운 방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한국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다. 이런 문제를 방관하는 정부의 허술한 조치에 대한 책임이 한국인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러시아와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분노하더라도 한국인들을 모욕하며 물리적인 공격을 가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에게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유감이다. 한국 언론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는 일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한국의 현실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흑인 없는 흑인 문화는 위험하다

한국인들은 텔레비전에 나온 버블시스터즈를 보고 경악하는 미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것은 미국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인종주의적 모욕이다. 역사 시간에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떠올리기 꺼려한다. 미국인들이 넘지 않는 선이다. 자유분방한 유머감각을 지닌 미국인들이지만 백인들 앞에서 춤추며 웃는 '흑인아이'를 보고 즐거워할 사람은 없다.

인종차별로 얼룩졌던 노예제가 만들어낸 유산이다. 흑인들은 매질 당할까 두려워 백인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어느 날 한 밤중에 갑자기 사라져 돌아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검은 얼굴'이 인종주의와 증오 그리고 노예제의 잔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미국에서 공개적으로 검은 얼굴을 보여주던 예전의 텔레비전 쇼와 만화들은 사라졌다. 불법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도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전혀 웃기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달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충무로의 한 사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여성가수 네 명이 새까만 얼굴을 하고 웨더 시스터즈의 노래 '잇츠 레이닝 맨'(It's Raining Men)을 부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살면서 많은 것들을 봤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있어야 했다.

한국에서 '흑인'으로 오랫동안 머물러 지냈기 때문에 한국어도 할 줄 알게 되었고 한국문화를 깊이 느껴볼 기회도 많이 갖는다. 한국에도 적지 않은 흑인들이 있다. 미국 영화와 방송이 보여준 흑인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한국 사람들도 흑인에게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흑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음에도 흑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흑인을 비롯한 짙은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은 증오나 공포 때문이 아니라 무지에서 기인한다.

그날 버블시스터즈의 뮤직비디오를 지켜보면서 한국에 온 이유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토록 금기되는 인종주의적 증오의 상징이 왜 한국 텔레비전에 버젓이 방영되어야 했던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검은 얼굴'의 상징성을 몰랐다 하더라도 그런 장면을 연출할 때보다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1990년대 한국그룹 룰라가 검은 색조로 분장하고 흑인처럼 등장했던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새까맣게 칠하고 나온 것이다.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연출하려면 관련 사진과 자료를 모아 머리모양이나 화장에 참고해야 한다. 흑인분장을 한 버블시스터즈 사진을 보면 머리를 위로 말아 올린 통통한 '흑인아이'의 모습이 빠지지 않는다. 붉게 칠한 입술, 과장된 표정이나 바보 같은 웃음, 잠옷차림 등은 1900년대 초 미국의 순회극단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한 순회극단은 흑인으로 분장하고 흑인 노래를 불러댔다. 따라서 이런 장면을 연출한 사람들이 미국 역사 가운데 가장 저열한 인종주의적 상징을 몰랐다는 말은 그리 신빙성있게 들리지 않는다.

'검은 얼굴'에 관련된 자료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자료는 주로 인종차별적인 할리우드의 문제를 조명하거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와 관련된 책 또는 기사의 일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본 사람들은 쉽게 이에 대해 알 수 있다. 따라서 검은 얼굴이 지닌 상징성을 몰랐다는 것은 인터넷에서 김치조리법을 찾아 제대로 된 김치를 담가 놓고 한국음식인 줄 몰랐다고 시치미 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 배추나 고춧가루, 젓갈은 어떻게 구했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많은 성형외과를 가진 나라 그리고, 흑인을 바보취급 하는 나라

▲ 백인에 대비해 흑인을 비하하는 만화.
그러나 버블시스터즈만을 탓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들이 흑인 분장을 하게 된 전후사정을 들었다. 그들은 음악적 재능을 지녔지만 그리 드러나지 않는 외모 때문에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흑인분장을 하고 나온 후에는 달랐다.

음악방송 M-Net에 나오는 가수들을 보면 그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력이 부족한 데도 음악 외적인 요소로 무장하고 나오는 가수들을 많이 본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을 외모지상주의로 내몬다. 내가 틀리지 않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형외과를 가진 나라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다 나은 직업을 얻거나 좋은 결혼 상대자를 구하기 위해 여성들이 성형수술을 하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외모가 중시되는 가요 프로그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넓게 봤을 때 한국 사회는 여성의 내적 가치보다 외모를 중시한다.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흑인 분장은 주목을 끌기 위한 그릇된 방편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상황의 심각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검음'을 '어리석음'과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능력에 비해 외모에 자신이 없다고 해서 새까맣게 얼굴을 칠한 모욕적인 흑인 분장을 해야 하는가?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가?" 버블시스터즈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동의하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 아이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자. 한국에서 흑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에 발령받은 일부 미군을 제외하고, 왜 그렇게 흑인을 찾아보기 어려운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미군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한국은 신병들이 가장 꺼리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북한이라는 현실적 위협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군에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 분위기가 주된 이유다.)

지난 달 MBC는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을 보도한 적이 있다. 한국 어학원들은 흑인 강사들을 채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흑인들이 아무리 훌륭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도 채용하지 않는단다. 왜냐고? 간단하다. 세계 어디서나 부모들은 자식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주고 싶다. 흑인 강사가 나타나면 왠지 탐탁지 않은 교육환경이 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 같은 키 큰 백인강사가 있는 학원과 어딘가 모자라 보여 학력이나 이력서 아니면 추천서 같은 서류들을 따져봐야 할 것 같은 흑인강사가 있는 학원 중 어디에 자식을 보내겠는가? 흑인은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

학원경영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장사를 해야 하지 않는가. 학원장들은 흑인에 대한 차별과 관계없이 이런 엄연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미국에서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백인 밀집지역으로 이주하려는 흑인을 받지 않는 부동산 업자들, 흑인 손님을 꺼리는 레스토랑 주인들, 흑인 학생들이 백인 위주학교에 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똑같이 말한다. "인종차별이 아니다. 여기가 좀 그렇다. 그걸 바꾸기 힘들다.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한다." 검은 얼굴 때문에 세계 어디를 가도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가족의 나라인 한국에서까지 말이다.

내가 늘 느끼는 바이지만 문화적으로 자유분방한 입장을 가진 한국인들도 미국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종문제는 중요한 사례다. 젊은이들은 반미감정에 불타지만 백인들을 선호한다. 이 지점에 인종에 대한 한국인들의 내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오해하지 마시길. 나는 미국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철저히 자국중심의 이기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까. 그러나 한국에서 복고주의와 소비주의가 국가적 자존심 속에서 힘을 얻어가던 1990년대에도 한미관계는 공고하게 이어졌다.

국가적 자존심과 배타적 애국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

나는 보통 미국인들처럼 축구에 별 관심이 없다. 많은 관중이 모이는 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부심은 존중하지만 축구가 진정한 국가적 자존심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대표팀에 대한 열광 밑에는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축구경기가 흥미롭다는 점은 인정한다. 한국에서 자랐다면 나 역시 축구에 상당한 재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몸에 붉은 칠을 하고 요란하게 응원에 나선다. 기도를 올리거나 울부짖기도 한다. 자국 국가대표팀에 대한 과장된 애정이다. 국가의 자부심은 누구에게 이겨야 하는지와 정확히 겹친다.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국가적 자부심은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미국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한국이 승리해 다행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미국이 이기면 불안하다는 얘기다. 이런 반응은 경기장 주변의 경계상태에서도 확인된다. 한국과 미국의 경기가 있으면 주변 경비가 삼엄해진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보안 책임자들 역시 한국이 이기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소란한 관중을 다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토로한다. 그들은 미국팀을 응원하기만 해도 욕설을 듣기 일쑤다.

동료 기사들이 외국인을 태우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태운다고 한 택시기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몇몇 미국인들이 폭행당한 소식도 들었다고 했다. 유감이라고 말하며 내게 더욱 친절을 베풀었다. 나는 그런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미국인들이 폭행당하던 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조용히 집에 들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국가적 자부심의 이면에 비뚤어진 애국주의가 똬리 틀고 있다. 두 요소를 떠받치고 있는 실체는 허약함과 변덕스러움이다.

히딩크는 신처럼 숭배를 받는다. 과장하기 위해 '숭배'라는 말을 쓴 게 아니다. 두 달 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으로 히딩크를 봤다. 한 대담 프로그램에서 그는 월드컵의 영광과 한국 대표팀 감독 기간을 회고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부둥켜안고 소리 높여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스쳐 지나갔다.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히딩크와 인사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지나던 사람들은 히딩크가 이룬 업적을 칭찬하기 바빴다. 어린 소녀들은 그들의 영웅을 보고 괴성을 질러댔고 남성들은 앞 다투어 한 잔 하기를 원했다. 그 외에도 여러 장면이 있었다. 히딩크야말로 한국인들의 완벽한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딩크는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미국과 거리를 두려는 새로운 국가적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적당히 나이든 잘생긴 백인이었고 새로운 맥아더 장군이었다. 다시 돌아온 위대한 백인 구세주였던 것이다. 장년 세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에게 호의적이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신물이 난 젊은 세대는 '큰 형님'의 나라에 비판적이다. 인천상륙작전의 낡은 영웅을 대체하는 새로운 영웅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왔지만 아무런 문제될 게 없었다. 어쨌거나 그도 백인이고 권위 있어 보였으니까. 게다가 한국축구를 도약시켰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주지 않았던가.

히딩크가 정말 한국인들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꺼리는 흑인에 대한 관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미국인 정확히 말하면 미국 백인들을 숭배한다. 지나친 일반화일 수 있지만 논의를 위해 일반적인 풍토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식민주의 냄새를 풍기는 '힘 센 형님-약한 동생'이라는 한미관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한국은 내가 가본 어느 나라보다 패스트푸드점이 밀집해 있는 나라다. 미국보다 많은 것 같다. 미국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많은 햄버거를 한국에서 먹었다. 사람들은 미국 백인들처럼 옷을 입고 미국 대중음악 장르를 똑같이 본뜬 음악을 들으며 따라한다. 미국 대중문화를 열심히 소비하고 미국 소비자본주의가 지시하는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미국보다 더 열성적인 기독교 신앙과 반공을 실천하고 있는 한국은 '말 잘 듣는 미국의 학생이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정부나 언론이 내세우는 것 외에 진정 독자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있는가?

히딩크의 기쁨과 외국인노동자들의 비애

히딩크를 깎아 내리려는 게 아니다. 그는 한국팀의 이끌며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훌륭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가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이름도 없이 묵묵히 일하는 짙은 피부색의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보다 큰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을 그들을 지하철에서 만날 때마다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외국인 노동자들이야말로 한국 노동자들이 꺼리는 위험한 일들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노조가 조직되고 임금이 올라 한국인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었다. 오늘날 한국은 정보와 기술 집약적인 부문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한국은 저임금 노동자들을 외국에서 수입할 만큼 잘살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나타나는 필연적 현상이다. 한국처럼 압축된 기간 동안은 아니지만 미국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백인이 한국 사람들 앞에서 서툴게나마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건네면 사람들은 놀라 칭찬하기 바쁘다. 지하철 안에 백인이 서있기라도 하면 온갖 사람들이 다가와 말을 건다. 그러나 다른 유색인들의 상황은 어떤가. 10년을 한국에서 살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도 값싸고 효율적인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 피부색 때문이다. 한국에 사는 인도 사람은 투명인간에 가깝다. 한국에 눌러 살거나 영주권을 얻을 수도 있지만 높은 기준 때문에 별 가망성이 없다.

이런 외국인들은 한국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도 없다. 많은 외국인 2세들이 한국에서 태어나지만 한국은 그들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히딩크는 다르다. 한국에 살 뜻이 없어도, 힘겨운 영주권 신청 절차가 없어도 명예시민증이 주어진다. 히딩크 같은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특별비자는 현실을 가리는 장치로 작용한다. 현실과 다르게 한국이 외부에 열려 있는 나라 같은 인상을 준다.

다시 버블시스터즈로 돌아가 보자. 버블시스터즈 사건을 통해 느낀 점은 한국이 과거 백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흑인을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한국 청년문화는 흑인문화에 호의적인 편이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미국 언더그라운드 그룹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을 모방해 4집 음반을 낸 이래 흑인음악 장르인 갱스터 랩, 리듬 앤 블루스, 소울은 한국 대중음악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젊은 한국 '갱스터' 랩가수들이 흑인들의 몸짓과 삶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들은 양쪽에 예쁜 여자들을 끼고 거칠게 보이려고 애를 쓰며 비꼬는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

버블시스터즈는 흑인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했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모욕적인 것인지도 모른 채. 흑인에 대한 한국사회의 무지와 편견을 잘 알기에 나 역시 그들의 말을 믿게 된다.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현실이다.

백인문화에 종속된 한국문화

▲ 인종편견을 드러냈던 흑인 모형 돼지 저금통.
특정 문화가 백인문화에 종속되어 흑인문화에 적대감을 드러낸다면 흑인문화는 상처를 받게 된다. 버블시스터즈를 통해 드러난 한국문화의 흑인문화에 대한 몰이해는 흑인을 진정 존중하지 않고 문화만을 받아들이려는 데서 시작된다. 이번 사건은 '열등한 인종'에 대한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감을 드러낸다.

미국 역시 흑인들에 대해 똑같은 애증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는 흑인 음식, 흑인 음악, 흑인 여성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로 흑인들과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다." 대중적인 통념과는 달리 대다수 남부 백인들은 흑인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흑인들이 '분수를 알 때'만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흑인에 대한 뿌리박힌 고정관념들이다. 한국인들은 흑인문화와 흑인들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흑인들이 주위에 살지 않는 한 말이다. 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흑인에 대한 무지가 이번 사건을 유발시킨 근본 원인이다.

2002년 월드컵 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무엇보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미소를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바람직한 변화다. 한국이 외국인들을 가장 잘 대하는 시기는 세계의 눈이 한국으로 쏠려 있을 때나 정부와 기업이 외국자본에 매달릴 때다. 외국인인 나는 그런 한국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

지난 10년간 한국이 '국제화'나 '세계화' 같은 표어에 걸맞은 변화를 경험했는지 묻고 싶다. 월드컵이 가져다 준 역설적인 상황을 보자. 외국에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 한국은 최선을 다했다. 7년을 준비한 월드컵을 위해 관광객을 맞이하는 데도 여념이 없었다. 한국이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나라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많이 봤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 'Fucking U.S.A'라는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미선이와 효순이가 죽은 후 분노에 찬 각종 집회와 누리집에서 가장 흔하게 듣던 말이 '미국놈'이었다. 미국인들은 거리에서 험한 말을 들어야 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613여중생 촛불 자주평화 사업회'(antimigun.org) 누리집에 찾아가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자주 읽었다. 시위가 누그러진 요즘 반전집회에도 '미국놈' 소리를 듣는다. 집회에 초대된 연사 가운데 미국인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가 한국말을 모르는 게 다행이었다. 집회에 초대된 미국인이 끊임없이 언어적 공격을 당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한국은 세계로 나설 준비가 되었는가

미국 최장수 보도 프로그램인 CBS <60분>은 지난 달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심각한 장면들이 방송을 채웠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 모두가 증오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반미감정도 비관적으로 보고 싶지 않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분노는 많은 부분 타당하다고 느낀다. 그런데도 사태를 다각도로 분석해 문제점을 해결하기보다 한국을 몰아붙이는 <60분>을 보며 안타까웠다. 외국 언론에게 무엇을 더 바라겠으며 한국에 살지 않는 기자에게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처음으로 아시아를 여행하기 위해 한국을 찾으려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분단 상황과 더불어 미국인의 신변 안전 문제를 걱정했다. 자세히 설명해주었지만 그는 안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년 이상 준비해오던 여행을 취소했다. 특별한 경우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한국에 친구가 없는 외국 여행자들은 한국에 오려면 정말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야 한다.

버블시스터즈의 '검은 얼굴'은 흑인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종차별적이며 폐쇄된 나라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버블시스터즈는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음악적 재능을 갖춘 그들이 진정 성공하기를 바란다. 다만 얼굴을 검게 칠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 요점을 정리하고 싶다. 진정 세계와 어울리는 문화를 만들려면 삼가야 할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흑인들의 의견이 존중받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본이지만 그 나라의 힙합 그룹들은 다르다. 그들은 동경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미국내 유명 힙합 월간지 <더 소스>(The Source)도 늘 일본의 힙합문화 동정을 전한다. 일본 방송에서는 흑인음악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흑인음악을 좋아하는 일본 팬들이 흑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일본에도 '검은 얼굴 소녀들'(Ganguro Girls)이 있다. 그들 역시 흑인처럼 꾸민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흑인문화를 좋아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인다. 인종주의적 모욕을 지적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인종적 특징들을 적절히 '즐기려는' 일본만의 고유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미국의 힙합이나 랩 분위기도 아니지만 검은 피부와 금발, 핑크빛 입술 등은 일본문화의 특색과 맞물려 있다. 미국 흑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비춰보아도 전혀 모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슬럼가를 기웃거리기'보다 '인종의 다양성'을 즐기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정문화를 비교해 칭찬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문화가 보여주고 있는 흑인문화에 대한 무지와 절도행위와 다를 바 없는 흑인음악 도용은 백인들이 자행했던 인종차별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주목'을 끌기위한 버블시스터즈의 행위는 가장 천박하고 질 낮은 형태의 모욕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을 읽는 한국인들이 당혹스런 장면을 연출하게 만든 문화적 현실을 천천히 그리고 솔직하게 되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한국인들에게 할 수 있는 소중한 기여는 외부인으로서의 객관적 시각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때로 인내력을 시험하는 상황이 있을 때면 내가 왜 한국에 와 있는지 되묻게 되지만 지금까지의 내 견해가 한국사회에 건설적인 비판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글을 쓰는 동안 줄곧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자찬일지 모르지만 한국사회가 귀 기울여 들어야할 바람직한 의미의 문화비평은 이런 글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번 계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진정으로 '세계적 시각'을 갖추길 기대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이제는 적이나 다를 바 없는 동맹국에 와서 잔소리만 늘어놓는 나 같은 사람을 무시하길 바란다. 대신 월드컵이나 올림픽보다 더한 세계적인 평판을 얻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기르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이여,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세계화'라는 공허한 구호에서 벗어나 진정 세계를 이끌 주요국가가 되기 위해 한 단계 올라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새로운 광장으로 나올 것인가 아니면 공허한 말만 반복할 것인가. 이제는 결단해야 할 시간이다.

*번역: 이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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