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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준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장이 7일 인터뷰에서 "민족일보 창간정신은 '우리 민족끼리 조국통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 이철우
<민족일보> 창간 45돌을 맞아 첫 기념행사를 준비 중인 조용준 민족일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73, 당시 민족일보 기획실장)을 7일 서울 중구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나 <민족일보> 창간의 의미를 들어보았다.

조용준 위원장은 "<민족일보>가 지향하는 통일노선은 지금 6·15시대의 정신과 같다고 생각한다"며 "외세를 동원해서는 통일이 요원하다는 것이 그 내면에 깔려 있었고 <민족일보>는 한마디로 자주통일을 지향했다"고 밝혔다.

조 위원장은 이번 기념행사에 대해 "작년에 있은 6·15 공동선언 5주년 행사와 8·15 행사에서 고무 받은 바가 크다"며 "<민족일보>의 탄생 동기나 목적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정도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민족과 통일을 사시로

실제로 <민족일보>는 창간 전에도 광고를 내어 '민족과 통일문제를 다루겠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창간사에서 ▲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이라는 4가지 사시를 밝히고 있다.

조 위원장은 <민족일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낙관하며 "과거사법에 '확정 판결된 사건을 제외'하는 독소조항이 있지만 <민족일보> 사건을 조사 안하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10일 과거사위에 국가폭력피해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공동신청을 낸 바 있다. 과거사위는 접수 후 90일 이내에 조사 여부를 결정하게 되므로 늦어도 <민족일보> 폐간일 전(5월 19일)에는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재심신청에 대해 "과거사위에서 잘해 줄 것을 기대하며 판정이 나오면 그것을 계기로 재심청구를 할 것"이라며 "인혁당 재건위사건이나 동백림사건을 국정원에서 조작이라고 확인해서 자연스럽게 재심으로 이어지고 있듯이 우리 사건도 그렇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누구나 사법살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혼자 (판결이) 잘됐다고 하는 고집스런 법관 밑에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법관 구성원들의 성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민족일보 당시 가판판매 1위, 국민정치의식 지금보다 높아"

<민족일보>가 당시 최고 4만5000부까지 발행하며 가판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당시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지금보다 훨씬 나았고 민족을 거론하지 않아도 자손들의 장래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특히 4·19 혁명 이후 지성인들은 <민족일보>에 음양으로 동참했고 그 과정에서 정론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민족일보>는 당시 '광야의 소리'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장건상씨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인터뷰를 이어갔고 민족과 통일에 대한 전망들을 사설로 내놓았다. 또한 언론사로서는 드물게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원호사업을 하기도 했다.

조 위원장은 이에 대해 "원호사업은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당시 비참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조그마한 정성이라도 전달했던 것"이라며 "취재하려고 하면 차에 쌀가마니를 싣고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그것 때문에 사회부 기자들이 불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사나 독립운동가) 그분들은 우리 후학들이 하고자 했던 일을 먼저 했던 분들이고 그러한 공적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런 형태(원호사업)로 나타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동생으로서 생각하는 형(조용수)에 대해 "성격이 좀 급했지만 잔정이 많은 사람이고 가족들에게 애정이 남달랐다"며 "형한테서 얻어맞기도 많이 했지만 그의 애정 표현이었고 이만큼이라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 은인"이라고 말했다.

"혁신세력의 대단결을 위해 고심하고 노력했다"

그는 당시 조용수 사장이 일본 유학 중 민단 내에서도 교포북송반대를 비롯한 우익활동을 했던 것을 거론하면서 "우익진영 사람으로 보였는데 진보성향의 활동을 했느냐 하는 문제는 그 경계에서 반성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며 "특히 그는 조봉암 선생 구명운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수구세력들은 어찌됐건 잘 모이는데 혁신 진보성향인 사람들은 전부 자기만 옳은 듯 생각하고 주장한다"며 "청년 조용수는 그들(수구세력)에게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고 싶어 했고 적어도 민족일보는 혁신계와 청년학생,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 고심하고 노력해왔다"고 강조했다.

<민족일보>는 1961년 2월13일 창간호를 낸 지 3개월 만인 5월 19일 박정희 5·16 쿠데타정권에 의해 폐간됐다.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는 13일 오후 2시 흥사단 강당에서 '민족일보 창간 45주년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다.

▲ <민족일보> 창간호.
ⓒ 이철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 참말로 www.chammalo.com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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