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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 두려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잠들 수 있던 날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몸속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나온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어느 날은 밥을 먹다가도 눈물이 났고 또 어떤 날은 길을 걷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울어도 기운만 빠질 뿐 죽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나도 그도 참 어렸다. 어리다, 는 말로 모든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다른 방법을 몰랐다. 너무 사랑했고, 잔인하게 상처를 주기도 했으며 나 역시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그토록 미워하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절대 용서하기 싫다고 울면서 보낸 밤들, 지금이라면 조금 달랐을까. 왜 지나고 나면 행복했던 기억보다 이렇게 아프고 힘들었던 날들이 생생하게 남는 걸까. 나는, 과연 누군가와 다시 예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을 수도 없이 해야 했다.

#. 어떤 이별

벌써 오래전 일이다. 겨울이었고, 고작 스무 살이 조금 넘었다. 아직 사랑이란 걸 겁내지 않던 나이였고 그렇게 아플 이별 혹은 상처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았을 때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어보지 못했던 나는, 처음 접해본 이별이 마치 죽음과도 같은 헤어짐으로 여겨졌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가 눈 오던 어느 날, 친구와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보게 되었다. 열심히, 눈물을 꾹꾹 참으며 봤던 영화. 그때쯤의 일기를 들춰보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작은 글씨들. 그리고 그 위에 흩어져 있는 아련한 상처들.

ⓒ 영화 <러브레터>
"… 울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고 슬프다고 하고 싶지 않아서 아주 아무렇지 않게 재미없었다고 말했다. 단지 얼굴이 닮았기 때문에 사랑을 고백하진 않았겠지? 많이 사랑했을 거야. 가슴에 끝까지 남은 것도 그녀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버린다는 것, 다시 볼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다는 것. 대체 어떤 기분일까? 정말이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너무 많이 접해서 잘 알던 장면인데, 그래서 영화를 보면 별다른 감흥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그런데도 이 장면에서 역시나 울어버렸다.

누가 듣고 있을까, 그 사람이 듣겠어. 들을 수 없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여자는 외친다. 잘 지내냐고 나는 잘 지낸다고, 부디 잘 지내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버린 그 곳에서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 밖에 없었다니. 그 짧고도 긴 인사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녀의 마음속 멍울도 지워진다면 좋으련만."


처음으로 '연인의 죽음'이란 걸 생각해보았다. 채워지지 않는 가슴속 구멍 같은 걸 느끼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그날 밤엔 잠을 설쳤다. 생각만으로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만날 수 없어도, 헤어져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더라도 그가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며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전하지 못한 말

<우리들이 있었다>라는 만화를 보았다. 죽은 (그것도 바람피우다가) 옛 여자친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애(야노)와 여자애(나나미)가 나온다. 아직 끝은 알 수 없지만 그 둘은 사랑과 솔직함으로 많은 것들을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다. 재미있었지만 읽는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불안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죽어버린 옛 연인에게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두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언젠가 많이 울었던 겨울날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 만화 <우리들이 있었다>
그날, 어린 두 연인은 사소한 일로 다퉜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서로에게 정말로 화가 난 채 헤어졌고, 야노는 여자의 사고 소식을 듣는다. 옛 애인의 차에 탄 채 죽어버린 여자의 소식. 그 여자의 전화기에는 야노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관계. 야노는 자신을 배신하고 그렇게 죽어버린 옛 연인의 기억을 계속해서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나미는 야노에게 자신이 모두 들어줄 테니 말하라고, 이제는 전해지지 않을, 옛 연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해보라고 재촉한다. 말을 하고, 털어놓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자고.

“내가 다 들어줄게. 하지 못했던 말, 원망의 말이든 뭐든 다. 말하지 못한 게 있을 거 아냐.”

하지만 나나미는 짐작할 수 있었을까? 눈물과 함께 야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떤 원망도 미움의 말도 아닌, 간절한 그리움의 말이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여자를 미워할 리가 없잖아. 전부 용서해줄게. 그러니까, 살아서 돌아와줘…….”

목숨처럼 사랑하고 아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엔 뭐가 남는 걸까? 무얼 바라보며 살아야 할까. 옛 사랑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거라고들 하지만, 그 새로운 사랑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옛 연인의 죽음 이후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야노의 진심을 끌어내기까지 수많은 의심, 불안, 두려움,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당연히 아픔은 존재한다.

과거는 어떻게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극복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무얼 해도, 어떻게 살아도 후회가 따라온다. 그때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의미한 가정들, 행복의 결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불안들.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너무 고통스러워.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내 자신이 싫어지니까.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니까.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싶어지니까…….”

#. 살아 있어줘, 그걸로 충분해

아직은 모른다. 한 번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 애의 행복을 100% 빌어주지는 못했지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뿐이다. 헤어졌으면 그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일이 되면 내가 혹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미워하는 마음 혹은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영영 헤어지게 된다면,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채 우리 중 누군가의 삶이 그렇게 먼저 끝나버린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딘가에 살아 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혹은 미워하는 것과 이제는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추억에만 존재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어떻게 해도 만날 수가 없다는 게 어떤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부디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 모든 괴로움, 미움, 원망 같은 것들이 추억이 되고 미소가 되고 진심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날이, 분명 올 거다. 머지않아. 그리고 영원히 헤어진다 해도 후회되지 않을 만한 인사를 나눌 수도 있을 거다. 한 번 지나고 나면 모든 게 후회로 남지만, 앞으로 올 날들은 또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 날들을 위해서 부디 이 험한 세상, 살아만 있어주기를. 야노의 말처럼, 과거를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면 과거에지지 않을 현재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위민넷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있었다 1

오바타 유키 지음, 대원씨아이(만화)(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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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겠다. 보잘 것 없는 목소리도 계속 내다 보면 세상을 조금은 바꿀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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