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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요즈음에도 가끔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결혼할 배우자의 이상형을 물어보곤 합니다. 그러면 남학생들이나 여학생들이나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인데, 이들은 외모를 많이 따지고 경제적인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회 분위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에나 성형수술이 유행이고, 졸업한 다음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학과로 아이들이 몰리는 것이겠지요. 아이들의 반응을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아주 드물게 상대방의 인간 됨됨이를 보고 결정한다거나 생김새는 보지 않고 마음씨가 착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를 눈이 뚫어질세라 유심히 쳐다봅니다. 그들을 보며 그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이 잘 자라나 꽃을 활짝 피우길 마음속으로 바랍니다.

기성세대의 그릇된 이성관 때문에 요즈음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직업, 학력, 출신지역, 재산, 외모 등이 바로 그런 고통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맺어지는 것이 뒤로 밀려나고,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태 속에서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깊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 경향신문 10월 1일자 '농촌총각 결혼이야기' 기사
ⓒ 경향신문
어느 농민운동가의 결혼관

이런 상황에서 최근 한 신문에 난 기사(<경향신문> 10월1일자)는 나에게 시원한 빗줄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지방에서 농민운동을 하는 분이 쓴 글인데, 제목이 '농촌총각 결혼이야기'였습니다. 그동안 이런 글을 여러 편 보았기에 그렇고 그런 이야기려니 가볍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난 어느덧 그 글에 나오는 두 남녀에게 쏙 반해버렸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장가를 못간 한 농촌총각이 마음에 드는 간호사와 맞선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결혼의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돈 많이 벌지 못한다고 투정하지 말 것, 아내보다 동지를 더 사랑한다고 질투하지 말 것, 농촌을 떠나자고 보채지 말 것입니다.

그는 나이가 월등히 많다는 질문에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고, 간호사를 맞이하기에 고졸 학력이 좀 부담스럽지만 세상 알 것은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했고, 빚은 빚이지 사람 등급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인생의 계획을 묻는 그녀의 부모의 질문에 농민운동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주위에 있던 동료들은 걱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선을 본 그를 위해 위로의 말을 준비합니다. 물론 그의 마음이 상처를 입을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동료들은 뜻밖의 말을 그에게 듣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인 간호사는 그의 결혼 조건에 대해 자신도 결혼 조건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돈을 더 많이 번다고 시기하지 말 것, 자신과 동지를 같은 깊이로 사랑할 것, 농촌에 산다고 막 살지는 말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 말라는 것을 덧붙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료들은 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넵니다. 준비해간 격려와 위로의 말은 순간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잔잔한 목소리로 장가를 못간 후배 이야기를 전해준 한 농민운동가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의 가슴에는 요즈음 거의 느껴보지 못한 참사랑의 뜨거움이 밀물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아름답고 뜻 깊은 '결혼의 조건'이 나를 뜨겁게 감동시킨 것입니다.

처음에 나는 그가 간 큰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즈음 시대에, 그것도 직업이 간호사인 여자 앞에서 농사를 짓는 나이 많은 남자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라도 결혼을 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되면 되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는, 될 대로 되라는 소극적인 자포자기의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 학력, 빚, 미래의 꿈 등도 요즈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에 맞추어 대답하지 않고 정반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퇴짜를 작정하고 나오지 않은 이상 맞선 보는 자리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참모습을 숨김없이 상대방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마 그 여자와 부모는 이 점을 높이 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의 화답은 정말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보았기에 그 여자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결혼의 조건'을 내세웠는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본 사랑의 감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자신에 걸맞은 사람을 만난다더니 그 농촌총각과 간호사가 그 경우에 딱 들어맞는 것 같았습니다. 농촌총각인 그의 말도 대단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멋지게 사랑의 화답을 한 그 여자의 말이 더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여간호사의 4가진 결혼조건

이제 앞으로 그들은 사랑하는 부부의 연을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맞선을 보면서 주고받은 '결혼의 조건'을 잘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지켜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남자는 농사를 지금보다 더 열심히 지으며 동료의 정당한 권익을 위해 농민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나갈 것입니다.

그 여자는 농사를 직업으로 하는 그를 존경하며 월급이 자신이 많다 해서 그를 낮춰 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점점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는 농민들이지만 그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일을 더욱 이해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진한 감동을 준 네 가지 '결혼의 조건'을 내세운 그 여자를 떠올리며 나는 잠깐 동안 소리 없이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자신 있고 당찬 여장부지만 여자는 역시 여자로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깊은 사랑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함께 살면서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농촌총각인 그가 진짜 그 여자에게 잘해주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일편단심 민들레처럼 그 여자만 사랑하며 잘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멋진 농촌총각이여! 더 멋진 그의 배우자 간호사 처녀여! 당신들이 내세운 '결혼의 조건'들은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당당한 것이었습니다. 부디 그 조건들을 서로가 존중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나가기를 인생의 선배가 멀리에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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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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