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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백두산의 일출, 구름의 장막을 헤치고 어둠을 가르며 떠오른는 해로 광복 60돌인 올해는 조국통일의 서광이 비치는 해가 되기를 빈다
ⓒ 박도
시대의 산물

이따금 아내는 나에게 "어쩌면 당신은 아버님을 그렇게 닮느냐"고 말한다. 아내뿐 아니라 할머니도 고모들도 그랬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흉이 될 것도 없는데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아버지의 파란 많은 인생길이 싫었기 때문이다.

▲ 아버지의 젊은 날
ⓒ 박도
아버지와 내 나이 차는 19세였다. 아버지는 아이가 아이를 낳아서 부끄러웠다며 출생신고도 뒤늦게 했다고 하셨다. 해서 지금 내 주민등록번호는 출생연도보다 1년이 늦다.

언젠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면서 차내 판매원이 지날 때, "아부지 캐러멜 사주이소"라고 하였을 때, 아버지는 앞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 승객에게 부끄러워서 혼났다는 얘기를 하신 적도 있었다.

중학교 5학년(요즘 고2)에 결혼하였으니 그 무렵에도 결혼이 무척 빠른 셈이었다. 그것은 시절 탓이었다. 대동아(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인 1944년 여름, 아버지는 동경유학생으로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온다는 기별을 받고 며느리 감을 점지해 두었다.

아무래도 외아들이 학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갈 것 같은 불안감에 우선 대라도 이어놓자는 할아버지의 헤아림이었다. 외가 측에서도 막내딸이 군수공장(일제는 정신대로 끌고 가면서도 군수공장에 데려간다고 둘러댔음)에라도 끌려갈까봐 우선 성례라도 시켜야겠다는 헤아림으로 양가 어른들의 생각이 맞아떨어져서 아버지가 귀향한 지 1주일만에 혼사가 이루어졌다.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이 있게 되자 할아버지는 아들을 불러들여 당신 누님 댁에 피신시켰다. 피신 중, 주재소 주임에게 발각되어 젊은이가 전시에 빈둥빈둥 놀고 있다고 소학교(초등학교) 임시교사 제의를 받고 근무 중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기차가 철길을 벗어나면

해방은 당신 인생길에 큰 교훈을 주었다. 해방 뒤 민족을 배반한 이들이 백성들로부터 어떤 벌을 받는지를 아버지는 목격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 내가 태어났다(1945년). 나는 해방둥이로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이듬해(1946년) 10월, 구미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10·1 사건(10월 항쟁)에 연루되어 20여일만에 선산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어떤 이는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는데(박정희 대통령 중형 박 아무개씨) 그나마 풀려난 게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 뒤 아버지의 인생길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예사롭게 사시지 못한다는 맏아들의 항의에 아버지는 변명하였다.

"기차가 한 번 철길을 벗어나면 뒤죽박죽이 되듯이 내 인생도 교사직에서 해직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해방이 된 후 왜놈들이 물러가면 우리 나라가 바로 독립이 될 줄 알았는데 38선이 생겨서 남북이 분단되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때 민족적 양심을 가진 이들은 단정을 반대하는 편에 섰다. 그때 똑똑한 사람 많이 죽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1981년 초, 아버지는 통일에 방해되는 신군부가 집권하는 걸 못마땅히 여겨 비판하시다가 불법 체포된 뒤 2년 남짓 큰집(교도소)을 다녀오셨다. 그 뒤로는 말문을 닫다시피하시며 붓을 잡으셨다.

아버지가 그렸던 그림의 화제(畵題)는 '설중마부(雪中馬夫)'요, 대춘록보(待春鹿譜)요, '달마상(達磨像)'이었다. 눈보라를 헤치고 말을 모는 마부를 당신이라 하고, 눈 속의 사슴이 봄을 기다리는 그림에서 사슴을 당신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기다렸던 조국통일도 보지 못한 채 13년(1992년) 전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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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야, 너도 사느라고 욕본다


▲ 백두산에서 바라본 조국강산
ⓒ 박도
아버지가 못다 부른 통일의 노래

"나는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글을 쓸 수 없구나"하시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 교사가 되고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 아들이 뒤늦게 둔재임을 깨닫고 글 쓰는 일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아들의 글을 세상에서 가장 잘 썼다고 칭찬을 하면서 내 글감이 되라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조국통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마침내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라고 <한시외전>에서 전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에야 불효의 죄를 씻기 위해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내가 오늘까지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칭찬과 용기 탓으로 여겨진다.

▲ 방북 중 조선작가동맹 김병훈 위원장(왼쪽)과 함께. 그분은 아버님처럼 편케 대해 주셨다.
ⓒ 박도
지난달 나는 평양 묘향산 백두산에서 열렸던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2005 민족문학작가대회'에 다녀왔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방북 기간 내내 아버지를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오던 날, 평양공항에서 방북기간 중 나의 말동무였던 심기섭 안내원이 문득 아버지 선물 준비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처 준비치 못했다고 대답하고는 얼른 평양공항 매점에서 백두산 들쭉술 한 병을 샀다.

올 추석 성묘 때 상석 위에 백두산 들쭉술을 따라 올리면서 북녘 소식을 전해 드려야겠다.

"애비야, 네 솜씨로 만주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 이야기를 들려다오."
"네, 아버지. '통일이 되어야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해방이 된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쓰고서 저도 아버지 곁으로 가겠습니다."


▲ 백두산 천지의 싱그러운 아침, 저 맑은 물로 지난 날 동족상잔의 상처들을 말끔히 씻어 냈으면 좋겠다.
ⓒ 박도

ⓒ 오마이뉴스

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과 8.15' 기사 공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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