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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겨울,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지께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며 들뜬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다고 덧붙였다. 신선하고 뜨거운 감동이었다. 조금의 안면만 있다면 누구에게든 서슴없이 자랑을 했고 또 다시 자랑했다. "아버지가 이 나이에 영어 공부하여 어디에 써 먹겠나. 무엇이든 해보는 동안 얻어지는 것들이나 과정이 그냥 좋은 거지. 안 그러냐? 너희들도 책 부지런히 읽고, 틈틈이 공부하여라." 아버지는 어쩌다 자식들 집에 오게 되면 책장부터 우선 뒤지셨다. 역사에 관한 책들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손에 뽑혀지고 "너는 다시 사 보거라", 이 한마디면 계산은 이미 끝이었다. 그리하여 책이 빠진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책을 꽂지 않고 두기도 하였다. 그 자리는 아버지의 가르침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서 여차하면 자랑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게을러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그런 빛이었다.
 친정 부모님의 혼례 모습
 친정 부모님의 혼례 모습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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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 부모님은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 온 촌로이시다. 아버지는 소학교만 나왔으며, 어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로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했다. 어머니는 도둑 공부 때문에 성당에 다니며 글씨를 깨우친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는 잠깐의 틈에도 신문이나 책을 펼치곤 하셨다.

어린시절부터 늘 보고 자라온 모습이었다. 이렇듯 정신적으로 맑고 당당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정신적 부재를 보였다. 2002년경 가을 새벽에 관광을 떠나 몇 시간이 지나서야 멍한 시선으로 집에 간신히 들어오셨는데, 아무런 의식도 없는 것이었다. 그간 해온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깡그리 잊어 버린 듯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이던 모습 대신 의자 하나 마당에 두고 하염없이 길만 바라보고 계셨다. 끼니마저 아예 잊어 버린 듯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렇게 마냥 누군가를 기다리는 날들이 되풀이됐다. 병원에서는 '공황병(공황장애)'이라고 했다. 정신적인 공황. 그랬다. 이미 살아 온 날이 누군들 아쉽지 않겠냐만, 내 아버지의 회한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칠순을 넘어서 안게 된 이 '공황병'은 그간 아버지께서 살아 온 세월의 부질없음을 말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찬바람 속에서 그렇게 고향을 기다리고, 부모형제를 기다리고 계셨다.

혼자 월남해 외롭게 살아오신 아버지. 누구에게 말 못하고 그리워하고 가슴 저몄던 한이 차곡차곡 가슴에 쌓여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찾아들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한없이 그립고 죄스러운 부모형제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공황장애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 증상은 1년 6개월 동안이나 아버지를 괴롭혔다. 이산과 망향의 아픔을 안고 살아 온 아버지의 세월. 아버지는 주변의 외로운 노인들은 모두 부모처럼 섬겼다. 명절마다 북쪽을 향해 차례를 지내곤 했다.

죽은 날짜를 모르는 사람들을 제사 지내는 음력 9월 9일이면 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것을 아버지의 한이 사그라들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늦둥이였기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그런 부모와 형제를 두고 나온 아버지의 한은 치유될 수가 없었다. 1983년 6월부터 이산가족 찾기로 전국이 눈물바다를 이룰 때, 아버지의 눈에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가 간신히 멈추기를 되풀이했다. 선거철만 되면 공약으로 내세우는 이산가족 찾기나 고향 방문에 실낱같은 희망으로 번번이 매달렸다. 선거가 끝남과 동시에 깡그리 잊혀질 망정 고향과 부모형제를 두고 어쩔 수 없이 월남한 아버지로서는 그래도 매달리고 싶은 간절한 희망이었다.

 
금강산 여행, 만물상에서
▲ 금강산 여행, 만물상에서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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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1926년생이며, 고향은 함경남도 원산이다.  6·25이 터지기 직전인 3월, 청년들의 징집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징집을 합법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노동자로서 소련으로 이주하는 것에 자원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비밀스럽게 조직됐던 청년 의용단을 찾아 도망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도망은 시작되었다. "너희들은 독안에 든 쥐다. 곧 찾아내어 처단할 것이다. 이제라도 입대하면 살려 준다."

날마다 퍼붓는 육성방송을 들으며 아버지는 아궁이 속에 숨어 한달을 버티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막연히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입으로 전해지던 백호부대(백두산 호랑이)를 찾아 고향을 떠났다. 밤이면 간신히 조금씩 이동하고, 낮이면 땅을 파고 몸을 묻어 은신하면서 오로지 청년의용단을 찾아 도망했다. 백호부대는 8·15 광복 이후, 북한에서 순수하게 생겨난 청년 의용단이었는데 북한에서 게릴라 식으로 김일성 정권과 싸웠다.

그들은 500명에 달했는데 1950년 11월 대한민국 국군이 승승장구 이북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렇게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300명이 국군에 합류했으면 그 중 150명만이 첫 호로 월남했다.

 
군대 시절이 태어나 가장 값진 날들이라고. 아래 오른쪽이 아버지.
▲ 군대 시절이 태어나 가장 값진 날들이라고. 아래 오른쪽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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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동안 물만 마시며 월남해 도착한 곳이 바로 경북 포항의 장기곶. 아버지가 탄 배가 북한군의 기세가 밀리면서 국군의 작전 수행으로 남하한 첫 호였다고 한다. 이렇게 아버지의 군인 생활은 시작됐다. 전쟁 중이라 쪽잠 끝에 눈만 뜨면 다시 전투에 나가야만 하는 그런 날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자유 품 속에서 사나이답게 살 수 있는 길이어서 보람있는 시절이었다고 지금도 자주 들려 주신다. 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김일성 고지보다 더 치열했던 레닌 고지나 스탈린 고지 같은 전투에도 수없이 참가해 어렵게 살아남으셨다. 5년8개월의 군 복무 후 아버지는 화랑무공훈장과 함께 제대하셨다.

전쟁 그후, 아버지의 삶은 고달팠다

제대 후 어머니와 이미 가정을 이루었지만, 먹고살 길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아버지는 전라도로 이주했다. 당시 전라도는 기름진 땅과 사금 채취로 가진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열심히 일하면 끼니 걱정은 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라도로 전국에서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의 고향은, 십수 년 전 사금 채취로 논바닥이 파헤쳐졌던 김제다.

문득, 나의 어린시절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낮이면 품팔이로 땀에 절었고, 해가 지고 나면 늦은 밤까지 산밭을 일구었다. 품팔이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억척스럽게 뿌리내린 아카시아 뿌리들을 더 억척스럽게 캐내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아버지가 불쌍할 만큼, 늦은 밤 지게 가득 '뜽클(전라도 말로 그리 불렀다. 나무들의 뿌리)'을 짊어지고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끊임없이 일하시던 아버지
▲ 끊임없이 일하시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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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진 것 없어서 늘 쪼들렸던 터라 아버지는 농한기에,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에 공사장 잡부로 일을 다녀오곤 했다. 아버지가 일을 하러 객지로 떠난 겨울방학에는 아버지의 얼굴을 내내 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이롱(나일론)'이 국내에 판매되기 시작해 엄청난 인기를 모을 때는 나이롱 양말 장사도 하셨다. 또 숯이나 약을 팔기도 하셨는데 물론 농사일을 주업으로 하면서 틈틈이 하는 그런 장사였다.

가진 것 없지만, 부지런히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하는 것만이 우리 칠남매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칠남매. 아버지는 월남해 외로운 터라 자식을 많이 두었다. 자식이 많아 삶이 버겁긴 했지만 그것을 오히려 낙으로만 여겼던 아버지. 우리 칠남매는 그런 아버지의 땀과 피를 먹고 자라났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명절에만은 먹을 것이 넘쳐났다. 아버지의 마음이 늘 그랬다. 또 아버지는 틈틈이 일군 산밭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는데, 자식들에게 과일이라도 실컷 먹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에서였다.

 
아버지 가슴에서 빛나는 훈장
▲ 아버지 가슴에서 빛나는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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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에 외롭게 사는 사람들의 잦은 일은 모두 아버지 몫이었다. 아버지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어려운 마음을 헤아려 보살펴 주는 것을 자처하셨다. 사시사철 땔감이 떨어지지 않고 채워 주는 일, 남의 똥마저 가림 없이 짊어 퍼내고 져내는 일,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밝혀 주고 장사 지내 주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내 아버지의 몫이었고,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런 것들을 불만스러워 했다. 하지만 고향과 부모 형제와 떨어져 살아가는 아버지의 외로움 앞에 그나마 위안이려니 묵묵히 바라보며 이해하셨다. 오히려 이런 아버지를 불만스러워 한 것은 우리 칠남매였다. 우리들은 철이 들고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한편으로는 부질없고 돌아올 것 없는 봉사처럼 여겼다.

1978년 어느 날, 밤낮으로 몸을 혹사하던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아버지의 투병 소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아버지가 평소에 남에게 베풀었던 마음은 온정이 되어 돌아왔다. 지역 주민들로부터 시작된 온정은 다른 지방에까지 전해져 모금 운동이 시작됐고 위문 편지가 쌓여 갔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대로 아버지는 몇 개월의 입원 끝에 퇴원했고, 몇몇 일간지에는 제법 큰 기사가 실려 아버지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다행히 병원비 걱정 없이 아버지는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길을 삶 자체에서 고스란히 보여 주셨다. 그것이 내 아버지의 삶의 방식이었다.

 
고생이 많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
▲ 고생이 많던 젊은 시절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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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아버지가 그 어떤 위인들보다도 존경스러운 그런 분이다. 부녀간의 혈연을 떠나 냉정하게 판단을 해보아도 실로 존경스러운 내 삶의 위대한 위인이다. 아버지의 삶, 그 반절 만이라도 살아 낼 수 있다면 좋겠다.

"아버지. 당신을 부모로 둔 우리들은 선택 받은 삶입니다. 보약 한번 먹여 보지 못하고 키웠다고 늘 마음 아파하시지만, 몸은 한번씩 허덕여도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해주셔서 더없이 고맙습니다. 사람으로서 제일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삶으로 보여 키워 주신 아버지. 목이 쉬도록 방방곡곡 자랑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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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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