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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아리에 담겨 잘 차려진 홍어 한 접시. 삼합은 홍어와 돼지고기 사이에 오래 묵은 김치를 넣고 볼딱지가 터지도록 씹어야 맛이 납니다. 향내 없는 막걸리 한잔 쭈욱 마시면 배도 금방 부르지요.
ⓒ 김규환
때 아닌 '홍어' 얘기로 심란하다. 호남출신 사람들은 ‘만만한 홍어 X’이 되지 않을까 마음이 착잡하다. 엊그제 밤에도 홍어가게 주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때 열렬히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행여 이 작은 해프닝으로 매번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지역감정이 도질까 염려스럽다.

장본인은 꺼져만 가는 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이다. 며칠 뒤 있을 당사 기자실 개소식 때 “민주당의 상징어족이 홍어”라며 파티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민주당에 홍어가 돌아왔다”며 "'관습당헌'에 홍어를 상징어족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 세인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인 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번 작전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함을 더해 시들어가는 채소 같아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한 당의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누가 봐도 훤히 보이는 발언을 했다는 건 우리 정치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다. 여전히 감성에 호소하고 이벤트에 기대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비극적 상황을 모면하려는 술책이지 않고 무엇인가.

계산된 발언이나 일회성 모임이라 하더라도 홍어는 호남 잔치음식의 상징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라는데 문제제기를 할 사람은 없다. 인정한다. 다만 홍어를 끄집어내 과거 민주당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지지세를 회복하고 싶은 소망이 담겨 있다는 건 삼척동자 딱지를 뗀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는 구차하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 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으로 건너가서도 홍어를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공수해 먹을 정도였다고 강조하며 DJ와 DJ의 명성을 이용하려 한다. 이번에 돌아오는 홍어에 대해 "예전 홍어와는 다르다"며 "민주당의 부활을 알리는 홍어"라는 정치적 해석까지 달았다.

이번 그의 발언은 2002년 DJ가 퇴임을 앞두고 있을 때 <조선일보> 이규태씨가 하루아침에 홍어를 ‘정치홍어’로 등극시켜 전임 대통령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그와 지지자를 분리시키려는 전술보다도 못하다.

대중들에게 말발이 먹히는 이씨의 노림수는 역사에서 멀어져가는 노(老) 정객 발목을 끝까지 잡고 늘어지는 파렴치한 수법이었다. 이현령비현령을 일삼던 박식한 글꾼이 쏟아내는 글발치고 상상력과 무한한 지식을 소유하고도 YS 퇴임시절에는 멸치 한 마리 꺼내지 않아 공정하지 못한 점은 더 큰 실수였지만 말이다.

불과 3년이 지났을까. 집권당에서 급전직하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군소정당 처지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번 홍어 발언은 궁색하기 그지없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 어떤 맛있는 것도 함께 나눠 먹어야 맛입니다. 홍어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민주당도 당원끼리만 먹지 말고 이웃과 나눠 드시면 더 맛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홍좋사모> 광주회원들이 무등산에 올라 60여 명의 등산객과 홍어를 나눠 먹고 있다
ⓒ 김규환
속빈 강정은 푸석푸석 할 뿐 입맛을 사로잡지 못한다. 알맹이 없는 과거의 향수를 끌어와 ‘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그간의 과오를 일거에 만회하려고 하니 이건 마치 토너먼트 경기에 패자부활전을 열라며 경기 주최 측을 압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관중을 농간하는 사태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과거 그들이 새정치국민회의 때부터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홍어를 준비해 대접해왔던 점에 비춰 민주당이 홍어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 처지에서는 이번 개소식을 자성의 자리, 정책정당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나와 한 때 민주당을 아꼈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죄 없는 홍어를 제발 만만하게 다루지 말라는 거다. 그 맛난 홍어를 들먹이며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아달라고 바란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어찌 보면 애증관계일 수도 있는 사람마저 떠나가게 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홍어는 망망대해 심해 밑바닥에서 연잎 하늘거리듯 유유히 날며 먹잇감을 기다린다. 수면위로 뛰어올라 아무 거나 잡아먹지 않는다. 동해에 기웃거리지 않고 서해안 일대만을 오간다. 지조(志操)가 이쯤은 돼야 한다.

산란할 때는 흑산도 인근에서 혹독한 시절 자신의 새끼를 퍼트린다. 조기 떼 바다 위를 휘저어도 묵묵히 그 자리에 살아남아 종족을 보존했고 쌍끌이 저인망이라는 외부 악조건에도 살아남았다. 이 생명력을 보라.

홍어회는 무엇인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여 항아리 바닥에 지푸라기를 깔고 은근히 오래 삭혔을 때 제 맛을 발휘한다. 사람일도 마찬가지 아닌가. 혀에 닿자마자 톡 쏘는 맛을 일거에 흩뿌려 한번 먹어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들마저 질겁하게 하지도 않는다. 씹어보며 음미할수록 은은히 배어나오는 깔끔한 향이 있어야 제대로 된 홍어다.

민주당은 홍어에서 그렇게 배울 게 없는가. 오로지 먹는 데만 관심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대중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단 말인가. 이번 기획이 궁색해 보이는 이유다.

만에 하나 오랜 기다림과 정성어린 노력에 물 좋은 진짜배기 홍어를 골라 만인이 먹어도 몸에 좋을 웰빙 식품으로 거듭나도록 홍어를 가꾸고 다루는데 어떤 세력이나 집단도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부 기자를 현혹하지도 말고 세인의 가십거리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 이번 설에 한번 바꿔 먹어볼까요? 조상님들이 놀라시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나라당은 홍어를! 민주당은 과메기를! 누가 손해일까요? 좀 친해집시다. 음식가지고 지역 나누지 않은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진짜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과메기도 맛있다고 잘 먹습니다.
ⓒ 김규환
모름지기 민주당은 흥겨운 잔치집이 아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사람들 마음이 떠나간 까닭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고 옛 정에 매달리는 모습 처량해 보인다.

이 처지에서는 천하일품(天下一品) 홍어라도 조용히 먹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홍어가 좋다면 식구를 늘리고 이웃 인심을 회복한 다음에 먹어도 늦지 않음이니 이제라도 속내 다 드러나 보이는 홍어파티는 접는 게 좋다.

입만 열면 호남과 DJ를 팔아먹고, 고향과 향수를 들먹이지 말라. 엄연히 정치를 한다고 하면 전국정당, 정책정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정당하게 경쟁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과메기가 좋다고 하고 빙어가 제철이라고 하라. 서울과 광주 전남만을 친정집이나 친가에 문지방이 닳도록 오가는 구태의연한 방식과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민주당에 미래란 없다.

30여년 죽어있던 홍어가 인터넷바람을 타고 전 국민이 즐겨먹는 궤도에 오른 마당에 찬물을 확 끼얹는 이번 조치에 황당함과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 전 국민에게 사과해야 마땅하다. 순수하지 못한 결정은 민주당에 득이 될 게 없다.

기존 지지자는 그렇게 내세울 게 없는가 반문하며 지지를 재고하게 되고 민주당에 등을 돌린 사람들과 눈곱만큼도 의사가 없는 부류는 “민주당이 원래 그렇지 뭐. 호남과 DJ, 지역감정 기대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정당이야”라며 비아냥거릴 호재가 아니고 무언가.

그 지역에 나고 자라 고향에 대한 애착 누구 못지않으며 현재 서울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몇 년째 운영하고 있지만 홍어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달갑지도 반갑지 않은 까닭이다. 진정 공당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말 나온 김에 한나라당도 과메기만을 들먹일 게 아니라 홍어도 먹어보고 젓갈도 즐기는 기회로 삼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음식에는 그 지역 정서가 배어있고 오랜 역사와 전통이 숨어 있다. 냄새난다고 꺼리다보면 서양 사람들이 마늘 냄새난다고 멀리하는 이치와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사랑도 둘이서 맘이 통했을 때 비로소 이뤄진다. 지나친 구애작전은 스토커로 낙인찍힐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다. 그런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진심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고 각인(刻印)해야 한다. 사랑받고 싶으면 평소 사랑받을 일을 하면 되지 않은가.

애꿎은 홍어만 가지고 그러지 말고 충언을 가벼이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끝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도 험난했던 인생사를 차분히 정리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우리 몫이고 누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 애가 타면 애를 먹어줘야 간이 온전합니다. 잊혀지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건 쉽지 않습니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인데 올 2월에 음식과 홍어를 다룬 책이 따로 나올 계획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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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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