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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경남 진주 국립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특별전 '조선 지방 사기의 흔적'을 보러 갔습니다. 필자는 도자기를 굽고 사는 사기장입니다. 사기장에게 있어 진주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500년 전 진주에서 빚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들이 이도자완이라 부르고, 필자가 진주사발이라 부르는, 진주사발의 고향이 진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본인들은 이 진주사발을 국보와 보물(일본-중요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대명물이 된 진주사발 대부분이 '막사발'이 아니라 조상을 위해 정성껏 빚은 제기라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는데, 그런 이 조선사발의 고향 진주에서 사금파리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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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사발은 왜 조선의 제기인가?


▲ 일본 중요 문화재가 된 진주 멧사발. 하다케야마 기념관 소장.
ⓒ 하다케야마 기념관
사실 우리 도자사 연구를 보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분청 연구 중 관요에 대한 연구는 많습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그 지방의 흙과 유약으로 빚은, 개성있고 각 지방의 토속미가 듬뿍 배어 있는 지방 가마의 연구는 미미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가 진주 지방가마에서 열리는 사금파리 전시회라 더욱 관심이 더 컸습니다. 전시장에 들어가자 사금파리를 중심으로 옛 진주목지방을 도자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 관람해도 역사와 도자기 공부하기 쉽게 진열해 놓고 있었습니다. 사금파리는 역사의 미스터리를 파악하는 열쇠입니다.

▲ 전시 중인 사금파리
ⓒ 진주국립박물관
처음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진', '장흥'이라고 각인되어 있는 분청 사금파리였습니다. 이것은 15세기 진주지방에서 빚어져 중앙으로 납품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금파리입니다. '진'은 진주의 가마터를 뜻하고, '장흥'은 진상품을 모으는 창고 이름입니다.

그리고 단성리, 방목리의 가마터에서 나온 사금파리에 눈을 멈추었습니다. 이런 사발들을 보고 임진왜란 후 일본이 양산의 가마에 일본인들이 '호리 미시마'라 부르는 사발을 조선 도자기를 모델로 주문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또, 일본 시노야키에서 자랑하는 네즈미시 기법은 이런 우리의 분청을 흉내낸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좌- 전시중인 사금파리 우- 일본 미술관에서 명물이 된 분청선문사발을 보고있는 필자.
ⓒ 진주국립박물관신한균

▲ 전시 중인 사금파리
ⓒ 진주국립박물관
사실, 우리 나라 15∼16세기 가마터에는 분청과 백자가 동시에 나오는 곳이 많습니다. 이것은 분청과 백자를 동시에 빚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옆의 사진과 같이 분청과 백자 붙어있는 사금파리는 그것을 확실히 증명해줍니다.

그리고 진주사발(이도자완)이 생산되었습니다. 알려진 진교면 백련리 가마터에서는 진주사발로 알려진 사금파리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 이유에 대해 이번 전시회의 도록에서 정양모 선생님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백련리 일대의 가마는 일본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소위 '이도계'의 찻잔(말차를 마시는 다완)을 생산한 곳이라고 알려져 지각없는 우리 나라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야합하여 이 일대 가마를 송두리째 파헤치고, 수십 년간 그들이 이도라고 생각되는 파편들을 모두 도굴해가고, 지금은 거의 하나도 남아있지 아니한 상태이다."

슬픈 일입니다. 필자는 2대를 이어 도자기를 굽고 있습니다만, 저희 아버님 고향이 진주 옆의 사천이라, 아버지는 그곳에서 많은 사금파리를 보았다 합니다.

▲ 일본에서 차와 함께 나온 일본 사금파리.
ⓒ 신한균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1960년대 일본인이 '이도자완'이라 부르는 진주사발의 사금파리를 순천 그리고 삼천포(지금의 그 자리는 화장장이 들어 있고) 사천, 하동, 웅천 그리고 언양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고 하십니다. 필자는 일본에서 우리 옛 사금파리에 음식을 담아 파는 식당도 본 적 있습니다.

방목리 2리에는 굽을 도려 낸 것이 보입니다. 이것은 제기라 여겨집니다. 일본에서는 와리고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16세기 이 제기용 사발은 현재, 일본에 10개 정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이 사발의 독특한 디자인을 흉내낸 일본 차사발은 아주 많습니다.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는 '부산요'라 부르는 가마의 일본 주문 기록에 이 제기와 같은 디자인과 차사발을 주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 좌- 전시중인 사금파리 우- 우리의 제기로서 일본대명물. 항설미술관 소장.
ⓒ 진주국립박물관신한균
이번 전시회는 연대별로 우리의 지방 사발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사금파리를 통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자기를 만드는 사기장 입장에서 전시도록의 내용 중 특별 논고, '경남 일원의 분청사기'의 글을 일고 2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 진주멧사발. 일본 중요문화재. 개인소장.
ⓒ 일본개인소장
그 중 하나는 '이도자완은 특별한 기형이 아니고, 또한 차그릇으로 용도로 만든 것도 아닌 10세기에 제작된 일상 생활 기명이었을 뿐이다'라는 글귀입니다.

필자는 사학자가 아니고 사기장이라 우리 옛도자기를 볼 때 흙과 유약 그리고 어떤 기능으로 만들었는지를 알기 위해 형태를 봅니다. 진주사발(이도자완) 중 대이도라 부르며 일본에서 대명물이 된 것들의 가장 큰 특징은 굽이 좁고 높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일본에서 이 사발들을 직접 손으로 만져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밥을 담아 상 위에 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이 사발들은 조그만 충격에도 넘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발을 밥사발이라 최초로 말한 사람은 일본인으로 도예가도 아니고 도자기 사학자도 아닌 철학자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야나기 무네요시입니다. 일본 민예 부흥 운동을 한 사람입니다. 필자는 그 사람이 우리 조선의 공예를 일본에 알린 것은 인정하나, 그 사람이 주장하는 조선공예미의 '애상미'는 부정합니다.

진주사발이 잡기인 밥사발이었다는 것도 근거없이 자기의 민예론에 억지로 짜 맞추었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또, 그 당시 일본에서 이도자완의 잡기설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정양모 선생님도 일본 도자 학자와의 인터뷰에서 진주사발을 제기라 추정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일본의 미술10, 고려다완, 赤沼多佳).

그리고 또 하나는 도록 260페이지에 나와있는 곤양수을토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수을토는 물토의 한문식 표기입니다. 물토는 백자의 유약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기장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것이 흙으로 표기되어 유약이었다는 설명이 없습니다(조선후기 백자 연구. 방병선 일지사).

옛 진주목에 속한 곤양의 수을토는 백자의 흙이 아니라 임금님을 위한 가마였던 분원의 백자 유약이었습니다. 이것은 옛 진주목이 백토와 더불어 도자기 유약도 유명하다는 뜻입니다.

▲ 수을토(물토)
ⓒ 신한균
여기 진주 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이 박물관에는 두암 선생이 평생에 걸쳐 모은 작품을 기증한 두암실이 있습니다. 두암 선생은 고향이 사천인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여 고국에 기증하신 분입니다. 두암실에는 우리 아름다운 도자기 뿐만 아니라 목공예품, 서화 등의 명품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마침, 오늘 특별전 관람을 위해 선생의 아드님이 와 있었습니다.

문화는 대중의 사랑을 잃고, 잊혀져 갈 때 정말로 사라져 버립니다. 필자는 오늘 진주 국립박물관의 사금파리전이 대중이 보기에 친근하도록 기획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의 예로 사금파리 달력을 소개하겠습니다.

▲ 좌- 진주국립박물관장. 고경희관장. 우 – 기념 달력
ⓒ 진주국립박물관
외국에 나가보면 가족과 함께 박물관에 오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독자 여러분 이번 진주박물관의 특별 전시회를 본다면 15세기까지 도자기의 종주국이었던 한국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 전시장 내부
ⓒ 진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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